12월 4일 전북 군산시 공설시장에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후보가 연설하고 있다. [뉴시스]
교사와 순경
이 후보는 고향(경북 안동시 도촌리)을 “첩첩산중 산꼭대기 기막힌 오지, 화전민들의 터전. 지금도 버스가 다니지 않는다. 50, 60대 남성의 로망을 그려내는 ‘나는 자연인이다’ 프로그램 배경으로 맞춤한 곳”으로 묘사했다. 교사와 순경을 한 아버지가 이런 오지에 온 배경을 두고 “(아버지는) 외아들이라 부모님을 모시려고 돌아왔다” “효자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 후보 아버지는 오지에 정착하지 못했다. 그 이유에 대해 이 후보는 “(아버지는) 농사일을 하나도 할 줄 몰랐다” “지통마을 그 오지에도 한때 도리짓고땡이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맞다. 20장의 동양화로 하는 그 놀이. 아버지도 마을주민과 어울리며 잠시 심취했고, 그나마 있던 조그만 밭떼기마저 날려버렸다. 아버지의 상경에는 그런 배경이 있었다”고 밝혔다.초등학생 시절 이 후보는 남보다 이르게 성장통을 겪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모친의 땔감 일, 밭일을 돕느라 코스모스를 심는 학교 환경미화작업을 제대로 하지 못해 교사에게 맞은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선생님에게 내 사정은 통하지 않았다. 손바닥이 내 머리통을 향해 날아왔다. (중략) 미화작업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맞아야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맞으면서도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봤다.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많이 맞았을 것이다. 그날 내가 맞은 따귀는 스물일곱 대였다. 친구가 세어줘 알았다. (중략) 내 초등학교 성적표 행동란에 이런 게 적혀 있다. 칭찬하는 말 뒤에 달라붙은 한마디. ‘동무들과 사귐이 좋고 매사 의욕이 있으나 덤비는 성질이 있음.’”
1976년 2월 경북 안동시 삼계국민학교(현 월곡초 삼계분교)를 졸업한 그는 3년 전 고향을 떠난 아버지가 있는 경기 성남시로 가족과 함께 이주했다. 아버지는 그렇게 찾아온 아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공장에 다니게 된 이 후보는 고등공민학교 교복을 입고 공장에 출퇴근하는 아이를 발견하고 “야간학교에 들어가겠다”고 했으나 아버지는 승낙하지 않았다. 그는 웹 자서전에 “돈벌이로 공장이나 다니게 하려고 (아버지가) 공부를 막는다고 나는 단정했다. 아버지와의 길고 깊은 갈등의 시작이었다. 이때부터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나는 오직 공부하기 위해 아버지와 싸워야 했다”고 적었다. 이 후보 아버지의 의중은 무엇이었을까. 이 후보는 “아버지가 성남으로 상경한 뒤로는 완전히 바뀌어 수전노가 돼 있었다. 악착같이 일하고 지독하게 모았다. 집에는 돈 버는 사람만 있고 쓰는 사람은 없었다”고 했다. 그는 형 이재영 씨의 다음과 같은 말도 웹 자서전에 옮겨놓았다.
젊은 시절 이재명 대선후보(왼쪽)와 모친. [이재명 후보 인스타그램]
“악착같이 돈 모아야 한다”
“아버지는 안동 양반 출신이에요. 젊은 시절엔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도리를 다한다는 식의 선공후사 같은 도덕의식이 있었어요. 동네 일은 공짜로 다 해주면서 곧이곧대로 살던 사람이었죠. 자기가 가진 지식과 돈, 시간을 다 남을 위해 썼던 거예요. 그런데 그 결과가 뭐였냐? 성남에 와서 아버지는 체면과 명분, 공부, 이딴 거 아무 소용없다, 거지를 면하려면 악착같이 돈을 모아야 한다, 그렇게 결심한 것 같아요.”왜 성남에 온 아버지는 달라졌을까. 이 후보는 그 이유는 밝히지 않고 아버지를 이해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에게도 아버지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자신의 맘 같지 않은 세상에 상처받은 후로 원래의 자신을 부정하며 살았는지도…. 어쩌면 아버지는 평생 화가 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열네 살 아들이 공장에 다니며 야간학교에 가겠다는 걸 막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아들의 중학교 진학을 막을 정도로 아버지를 분노하게 한 일은 도대체 무엇일까.
청계천 평화시장 노동자 전태일 씨가 분신자살해 사회에 충격을 준 때가 1970년 11월 13일이다. 이 일로 ‘근로기준법’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현재 근로기준법 제64조 1항은 ‘15세 미만인 사람은 근로자로 사용하지 못한다. 다만,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기준에 따라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급한 취직인허증(就職認許證)을 지닌 사람은 근로자로 사용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초등학생에 해당하는 13세 미만은 무조건 근로자로 삼을 수 없고, 중학생에 해당하는 13~15세는 취직인허증이 있어야 근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규제 핵심이다. 이런 아동 노동 규제는 세계적 상식이었고 이는 당시 한국도 큰 틀에서 마찬가지였다.
중학생이어야 할 시절 이 후보는 회사 ‘동마고무’ ‘아주냉동’ ‘대양실업’ ‘오리엔트’ 등을 옮겨 다니며 ‘소년공’으로 일했다고 밝혔다. 당시 편물점 같은 가내수공업체나 음식점 등 법인이 아닌 업소는 10대 초반 소년을 사환처럼 고용했다. 그러나 당국 허가를 받고 운영하는 법인이 중학생 나이인 소년을 고용하는 데는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근로기준법과 시행령 등은 고등학생인 16~18세 젊은이의 고용도 제한하고, 이들을 투입할 수 있는 분야도 제한한다. 10대 시절 노동에 대한 이 후보의 회고와 겹쳐보면 그가 다녔다는 기업의 고용 형태는 불법이다. 이 후보는 자신보다 나이 많은 다른 이의 이름으로 위장 취업한 것일까. 또한 그 시절 이 후보 집안은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던 것일까. 그는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채 시골에서 올라와 산업역군이라는 거창한 이름의 공돌이가 된 아이들. 언젠가부터 나는 엄마에게 도시락 하나를 더 싸달라고 했다. 자취를 하며 점심을 굶는 아이들과 나눠 먹기 위해서였다. 엄마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고 밝혔다.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
이 후보는 검정고시로 중졸·고졸 자격을 취득했다. 고졸 검정고시 준비를 위해 학원에 다닐 때 아버지는 반대했으나, 어머니가 “학원비도 지가 벌어 댕기는 아한테 그게 할 소리니껴? 남들은 다 학교 보내는데, 부모가 돼서 우리가 해준 게 뭐가 있니껴?”라고 맞섰다고 한다. 그를 향해선 “공부해라! 내가 속곳을 팔아서라도 돈 대주꾸마”라고 했다. 그래도 돈이 달려 다니던 성일학원을 그만두려 했다. 그러자 김창구 당시 성일학원 원장이 학원비를 면제해준 덕에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금도 이 후보는 그를 은인이라고 말한다. 이 후보가 고졸 검정고시 합격 후 취업을 하지 않고 대입학원에 다니자 아버지가 못마땅해 했다. 그는 당시 일기에 “학원 갔다 와서 공부 좀 하려 했더니 아버지가 쓰레기 치우러 나오라고 한다. 신경질이 났다. 신발을 확 집어던졌다. 아버지가 그 모양을 보더니 한참 나를 노려봤다(1980. 5. 29)”고 적어놓았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양가(兩價·ambivalence) 감정을 다음과 같이 밝히기도 했다.“비 오는 어느 새벽, 아버지와 쓰레기를 치우는데 급기야 일을 못 할 정도로 빗줄기가 굵어졌다. 우리는 시장통 처마 밑에 쪼그리고 앉았다.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리며 꼬박꼬박 조는데, 아버지가 그 모습을 보더니 가게 좌판에 누워 눈 좀 붙이라고 했다. 새벽에 누가 깨웠다. 엄마였다. 흠뻑 젖은 작업복을 입고 오들오들 떨며 자고 있는 내 모습을 보고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쏟았다. 그때 아버지는 희뿌연 여명 속에서 비를 맞으며 혼자 쓰레기를 치우고 있었다. “재명이 댈꼬 드감더.” 엄마가 소리쳤다. 아버지가 천천히 돌아보더니 들어가라고 손짓했다. 아버지의 그 모습이 문득 아렸다. 생각하면 아픈 것들 투성이. 그래도 아버지, 그래서 아버지였다.”
여기서 다시 한 번 주목할 것은 3년간 가족과 떨어져 있었을 때 이 후보 아버지의 행적이다. 교사 경험이 있던 가장은 도대체 무슨 일을 겪었기에 3년 만에 만난 아들의 진학을 막을 만큼 변했는가. 영특했던 이 후보의 공부 열정을 풀어준 것은 어머니와 김창구 원장, 그를 장학생으로 받아준 중앙대와 당시 교육 시스템이었다. 중앙대 법대를 졸업한 1986년 가을, 그는 제28회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그 직후 이 후보 아버지는 55세 나이로 별세했다.
“정말 열심히 살았다”
2021년 여당 대선후보로 우뚝 선 이재명. 그는 12월 4일 전북 군산시 유세 현장에서 “내 출신이 비천하다. 비천한 집안이라서 주변을 뒤지면 더러운 게 많이 나온다” “내 출신의 미천함은 내 잘못이 아니니까 나를 탓하지 말아달라” “나는 그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다. 앞으로도 그럴 거다. 주어지는 권한이 있다면 최대치로 행사할 것이고, 우리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니 나는 머슴이라는 생각으로 주인 뜻 철저히 따를 것”이라고 말했다. 자신의 가정사와 개인사를 더는 추적하지 말라는 뜻으로 읽힌다. 같은 날 이 후보는 “내 어머니, 아버지는 화전민 출신으로 성남에 와서 아버지는 시장 화장실 청소부로 일하고, 어머니는 화장실을 지키며 대변 20원, 소변 10원에 휴지를 팔았다. 그 젊은 나이에 남정네들이 화장실 들락거리는 앞에서 쭈그려 앉아 먹고살겠다고, 그래 살았다” “넷째 여동생은 요구르트를 배달하고 미싱사를 하다 화장실에서 죽었는데, 산재(산업재해) 처리도 못 했다. 남동생은 지금 환경미화원일을 하고 있다” “내 집안이 이렇다. 그런데 누가 집안이 엉망이라고 흉을 보더라” “나는 정말 열심히 살았다. 나쁜 짓을 하지 않았다. 최선을 다했고 주어진 일은 공직자로서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했다”고도 강조했다.이 후보는 이른바 ‘미천한 과거’를 내세워 자신을 방어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도 선친처럼 분노하며 살아온 것은 아닐까. 열네 살의 그가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듯, 이 시대 젊은이도 그를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을까. 자기 삶을 통해 입지전을 쓴 이 후보의 에너지에 환호하는 사람만큼, 그의 실체를 몰라 불안해하는 사람도 적잖아 보인다.
이재명 대선후보 측은 ‘초등학교 퇴학’ ‘소년원 입소’ 루머를 가짜뉴스라며 일축했다. [이재명 후보 공식 블로그 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