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교복자율화가 시작된 1983년 전두환 정권 시절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런데 영화 ‘써니’의 시대 상황은 뒤죽박죽이다. 마흔 살이 넘은 임나미는 여고생 시절의 기록을 DVD로 본다. 하지만 1980년대는 영상물을 개인적으로 찍을 캠코더가 거의 없던 시절이다. 더욱이 컬러 캠코더는 88서울올림픽 이후에나 등장했다.
한준호가 임나미에게 ‘라붐’을 들려주던 헤드셋도 1990년대 이후에 유행하던 것이다. 칠공주 ‘써니’가 추는 춤도 1980년대 유행하던 ‘디스코 춤’이라기보다 2000년대 방송댄스와 결합한 세미 디스코다. 감독은 시대극을 찍으면서도 시대적 고증을 치밀하게 하지 못한 듯하다.
영화는 추억을 담보로 관객의 ‘향수’를 ‘삥 뜯으려’ 한다. 향수를 미끼로 하다 보니 칠공주 여학생은 개연성 없이 지나치게 선량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불량서클 ‘일진’이면서도 주변 학생의 돈을 ‘삥 뜯지도’, 알량한 불량기로 폭력 교사와 ‘맞장 뜨지도’ 않는다.
‘스카치테이프 쌍꺼풀’을 만들거나, 머리카락을 ‘고데기’로 말고 미스코리아를 흉내 내거나, 수동타자기로 타자를 치며 작가를 꿈꾸는 여학생이 어떻게 ‘일진’인가. 불량서클이라 하기엔 함량 미달이다.
수지가 피는 양담배도 불량기를 드러내기보다 신비로움을 덧입힐 뿐이다. 짙은 립스틱을 바르거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그 또래 여학생이 흔히 하는 어른 흉내 내기의 일부다. 기껏 자기 딸아이를 괴롭히던 여고생 일진을 혼내주고, 다른 구역 일진과의 대결에서 그들을 기지로 물리치는 정도가 어떻게 칠공주의 명성을 지켜주겠는가. ‘써니’의 칠공주는 ‘일진’ 여자 깡패 얘기가 아니다. 7명의 공주, 핑크빛 꿈으로 인생이 가장 환하게 빛나던 사춘기 여학생 얘기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영화에 ‘칠공주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붙였을까. 왜 불량서클의 칠공주를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영웅전설신화’에 대한 꿈 때문이다. 적절한 반항기와 현실에 대한 도전, 기성세대와 시대에 대한 노골적 불만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압도할 수 있던 시절, 그것이 고교 시절이다. 남학생 ‘짱’에 대한 얘기를 살짝 ‘젠더’차원에서 비틀어 여학생 ‘일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1980년대 억압된 고교 시절을 보낸 꿈 많던 여학생도 2000년대 마흔 살이 돼 드라마 귀신으로 살아간다. “우리 형제는 아니겠지?” “아니, 형제래”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 “아니, 오래 못 산대”. 똑같은 불륜 모티프와 출생 비밀, 불치병이 고정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말이다. 무심한 남편과 왕짜증만 내는 사춘기 딸의 비위를 맞추면서 말이다.
병원에 누워 있는 부모를 간호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일상의 진부함을 견딘다. 이때 일상의 진부함을 살짝 벗어나게 해주는 환상이 ‘일진’이라는 ‘뽀대 나는’ 집단의식을 갖고 ‘공주’로 살았던 시절이다. 인생에서 ‘주인공’이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틈새가 찾아든다. 과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서히 자라나 현재를 잡아먹는다. 환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
영화 ‘써니’는 ‘칠공주’를 통해 진정 ‘공주’가 되고 싶어 하던 사춘기 여학생들의 나르시시즘, 그 핑크빛 환상을 보여준다.
한준호가 임나미에게 ‘라붐’을 들려주던 헤드셋도 1990년대 이후에 유행하던 것이다. 칠공주 ‘써니’가 추는 춤도 1980년대 유행하던 ‘디스코 춤’이라기보다 2000년대 방송댄스와 결합한 세미 디스코다. 감독은 시대극을 찍으면서도 시대적 고증을 치밀하게 하지 못한 듯하다.
영화는 추억을 담보로 관객의 ‘향수’를 ‘삥 뜯으려’ 한다. 향수를 미끼로 하다 보니 칠공주 여학생은 개연성 없이 지나치게 선량하게 그려진다. 그들은 불량서클 ‘일진’이면서도 주변 학생의 돈을 ‘삥 뜯지도’, 알량한 불량기로 폭력 교사와 ‘맞장 뜨지도’ 않는다.
‘스카치테이프 쌍꺼풀’을 만들거나, 머리카락을 ‘고데기’로 말고 미스코리아를 흉내 내거나, 수동타자기로 타자를 치며 작가를 꿈꾸는 여학생이 어떻게 ‘일진’인가. 불량서클이라 하기엔 함량 미달이다.
수지가 피는 양담배도 불량기를 드러내기보다 신비로움을 덧입힐 뿐이다. 짙은 립스틱을 바르거나 포장마차에서 술을 마시는 것도 그 또래 여학생이 흔히 하는 어른 흉내 내기의 일부다. 기껏 자기 딸아이를 괴롭히던 여고생 일진을 혼내주고, 다른 구역 일진과의 대결에서 그들을 기지로 물리치는 정도가 어떻게 칠공주의 명성을 지켜주겠는가. ‘써니’의 칠공주는 ‘일진’ 여자 깡패 얘기가 아니다. 7명의 공주, 핑크빛 꿈으로 인생이 가장 환하게 빛나던 사춘기 여학생 얘기다.
그렇다면 감독은 왜 영화에 ‘칠공주 프로젝트’라는 부제를 붙였을까. 왜 불량서클의 칠공주를 강조한 것일까. 그것은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있는 ‘영웅전설신화’에 대한 꿈 때문이다. 적절한 반항기와 현실에 대한 도전, 기성세대와 시대에 대한 노골적 불만을 청춘이라는 이름으로 압도할 수 있던 시절, 그것이 고교 시절이다. 남학생 ‘짱’에 대한 얘기를 살짝 ‘젠더’차원에서 비틀어 여학생 ‘일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1980년대 억압된 고교 시절을 보낸 꿈 많던 여학생도 2000년대 마흔 살이 돼 드라마 귀신으로 살아간다. “우리 형제는 아니겠지?” “아니, 형제래” “설마 불치병은 아니겠지?” “아니, 오래 못 산대”. 똑같은 불륜 모티프와 출생 비밀, 불치병이 고정으로 나오는 드라마를 보면서 말이다. 무심한 남편과 왕짜증만 내는 사춘기 딸의 비위를 맞추면서 말이다.
병원에 누워 있는 부모를 간호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일상의 진부함을 견딘다. 이때 일상의 진부함을 살짝 벗어나게 해주는 환상이 ‘일진’이라는 ‘뽀대 나는’ 집단의식을 갖고 ‘공주’로 살았던 시절이다. 인생에서 ‘주인공’이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 틈새가 찾아든다. 과거는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서서히 자라나 현재를 잡아먹는다. 환상은 현실보다 힘이 세다.
영화 ‘써니’는 ‘칠공주’를 통해 진정 ‘공주’가 되고 싶어 하던 사춘기 여학생들의 나르시시즘, 그 핑크빛 환상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