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
마감은 없습니다.
종종 쫓기는 기분으로 시를 씁니다.
쫓아오는 자는 내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자주 부어서 울었지요.
그게 내 눈망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죽은 눈을 빼서 그에게 보여주면
건너편 창문에서 냉큼 물어가곤 합니다.
전에는 공터였던 자리가 한낮의 종이로 변하고
내 손에서 가느다란 펜이 떨어질 때 지면에서
나의 두 발이 살짝 들어 올려질 때
걸어오는 건 새들이 아니라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아니라
걸어서 삼십 년 후에 도착할 장소가
여기라는 것뿐. 겨우 아프냐고 물으면
나는 미치겠다고 대답하는 그가
던져놓고 간 깊고 검은 눈동자 주변에
내 얼굴은 모여 삽니다. 언젠가
걸어본 길에 찍힌 크고 검은 구덩이가
그저 얼룩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표정이
여기 또 있어 하고 소리치는 사람의 표정이
건너편 창문에 수상하게 말라붙어서
아직 죽지는 않았더군요. 그 사람
어둡고 깊은 이쪽의 깊이가 난감하여
참 웃긴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한번은 걸어본 다리 위에서
그가 들려주는 얘기를 잊지 않고
다시 들려줄 생각입니다.
표면에는 물을 담고 그 물을 다 쏟아버려
내 눈에서 스티로폼 한 조각도 떠내려가지 않는 날
다리 밑에는 또 얼마나 많은 생선들이 죽어
떠오를까요? 이거라도 잡수세요.
갈매기들의 잔칫날입니다.
― 김언, ‘거인’(중앙북스, 2011)에서
양치기 소년처럼 글쓰기 중독
쓰는 것도 결국에는 중독이 된다. 격렬한 운동을 하는 선수가 경기 후에 종종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맛보듯, 힘들여 쓴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 작가들은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에 도달한다. 비록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 짜릿함은 거의 매번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니까 마라톤 선수가 42.195km를 뛰고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회사원이 밤샘작업을 마치고 창문을 활짝 열어 새벽의 상쾌한 공기를 온몸으로 껴안을 때, 화가가 마지막 점을 찍어 평생 동안 매달린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야말로 화룡점정의 순간. 이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마침내, 그 사람이 된다.
글을 쓰다 보면 언제나 “쫓기”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편집자일까? 독자일까? 아니면 더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 자신일까? 어쩌면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다음 문장일 수도 있고 내가 언젠가부터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된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자주 부어서 울”기도 한다. 나는 방금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번 배신을 행한 것이다.
나를 향한 믿음은 ‘냉큼’ 사라지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좌절은 길다. 머리는 그야말로 백지상태가 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럴 때는 정말 ‘미치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그 수밖에 없다. “내 눈에서 스티로폼 한 조각도 떠내려가지 않을 때”는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다. 나는 어떤 “깊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수렁에서 나를 건져 올릴 사람은, 슬프게도 나 자신밖에 없다.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힘껏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시간, 혹은 어떤 상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청춘’ 같은 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반짝이던 순간 같은 거. 나는 그 시절을 향해 자꾸 달려가고자 애쓰지만, 나이는 먹고 “눈”에 고여 있던 “물”은 점점 증발한다. 내가 남긴 “발자국”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신의 발자국을 떡하니 찍어놓았다. 나는 점점 고갈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낡고 뒤처지는 것이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여기서 맥없이 그만둘 수 없다. 나는 무언가를 남기지 않으면 허기가 져 견딜 수 없는, 천생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실, 오히려 쓰지 않으면 도리어 쫓기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 중독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순순히, 자발적으로.
이 중독의 결과가 어떤 모양새일지, 그 여정은 또 얼마나 고독할지, 나는 섣불리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삼십 년 후에 도착할 장소”만 희미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장소는 어김없이 “한낮의 종이”. 나는 삼십 년 후를 상상하며 종이 위에 “가느다란 펜”을 미끄러뜨린다. 또다시 어떤 “얼룩”을 내고자 한다. 어떤 외압으로도 결코 지워지거나 빠지지 않을 나만의 얼룩을. 종이 위에서는 상상의 도약과 확장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상상이라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종이 앞에서만큼은 당당할 수 있다. 한없이 두근거릴 수 있다.
마감은 없다. 마감이 없어도 나는 시를 쓴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 자신에게 고백하고 비로소 떳떳해지기 위해. “그가 들려주는 얘기를 잊지 않고” 나 자신에게 “다시 들려”주기 위해. 쓰는 것도 결국에는 중독이 되고야 만다. 양치기 소년처럼, 우리는 쓴다. 밥 먹듯, 거짓말하듯. 그리고 불쑥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처음 혹은 마지막 “표정”. 그렇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인인 것이다.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마감은 없습니다.
종종 쫓기는 기분으로 시를 씁니다.
쫓아오는 자는 내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자주 부어서 울었지요.
그게 내 눈망울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요?
죽은 눈을 빼서 그에게 보여주면
건너편 창문에서 냉큼 물어가곤 합니다.
전에는 공터였던 자리가 한낮의 종이로 변하고
내 손에서 가느다란 펜이 떨어질 때 지면에서
나의 두 발이 살짝 들어 올려질 때
걸어오는 건 새들이 아니라 새들의
어지러운 발자국이 아니라
걸어서 삼십 년 후에 도착할 장소가
여기라는 것뿐. 겨우 아프냐고 물으면
나는 미치겠다고 대답하는 그가
던져놓고 간 깊고 검은 눈동자 주변에
내 얼굴은 모여 삽니다. 언젠가
걸어본 길에 찍힌 크고 검은 구덩이가
그저 얼룩이라는 걸 알았을 때의 표정이
여기 또 있어 하고 소리치는 사람의 표정이
건너편 창문에 수상하게 말라붙어서
아직 죽지는 않았더군요. 그 사람
어둡고 깊은 이쪽의 깊이가 난감하여
참 웃긴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한번은 걸어본 다리 위에서
그가 들려주는 얘기를 잊지 않고
다시 들려줄 생각입니다.
표면에는 물을 담고 그 물을 다 쏟아버려
내 눈에서 스티로폼 한 조각도 떠내려가지 않는 날
다리 밑에는 또 얼마나 많은 생선들이 죽어
떠오를까요? 이거라도 잡수세요.
갈매기들의 잔칫날입니다.
― 김언, ‘거인’(중앙북스, 2011)에서
양치기 소년처럼 글쓰기 중독
쓰는 것도 결국에는 중독이 된다. 격렬한 운동을 하는 선수가 경기 후에 종종 러너스 하이(runner’s high)를 맛보듯, 힘들여 쓴 글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때 작가들은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에 도달한다. 비록 당시에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기분이 드는 것이다. 그 짜릿함은 거의 매번 마지막 순간에 찾아온다. 그러니까 마라톤 선수가 42.195km를 뛰고 결승선을 통과했을 때, 회사원이 밤샘작업을 마치고 창문을 활짝 열어 새벽의 상쾌한 공기를 온몸으로 껴안을 때, 화가가 마지막 점을 찍어 평생 동안 매달린 그림을 완성했을 때. 그야말로 화룡점정의 순간. 이 순간이 모여 인생이 된다. 마침내, 그 사람이 된다.
글을 쓰다 보면 언제나 “쫓기”는 기분에 사로잡힌다.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누군가가 내 뒤를 “쫓아오”고 있다. 그는 누구일까? 편집자일까? 독자일까? 아니면 더 좋은 작품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힌 나 자신일까? 어쩌면 내 발목을 잡는 것은 다음 문장일 수도 있고 내가 언젠가부터 더는 사용하지 않게 된 단어일지도 모른다. 그(것)들은 “내 발에 걸려/ 넘어지거나 자주 부어서 울”기도 한다. 나는 방금 아무렇지도 않게 또 한 번 배신을 행한 것이다.
나를 향한 믿음은 ‘냉큼’ 사라지지만, 내가 감당해야 할 좌절은 길다. 머리는 그야말로 백지상태가 되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이럴 때는 정말 ‘미치겠다고 대답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그 수밖에 없다. “내 눈에서 스티로폼 한 조각도 떠내려가지 않을 때”는 정말이지 미칠 것만 같다. 나는 어떤 “깊이”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수렁에서 나를 건져 올릴 사람은, 슬프게도 나 자신밖에 없다.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다. 힘껏 일으켜 세울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시간, 혹은 어떤 상태와도 묘하게 맞닿아 있다. 이를테면 ‘청춘’ 같은 거.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반짝이던 순간 같은 거. 나는 그 시절을 향해 자꾸 달려가고자 애쓰지만, 나이는 먹고 “눈”에 고여 있던 “물”은 점점 증발한다. 내가 남긴 “발자국”에는 이미 누군가가 자신의 발자국을 떡하니 찍어놓았다. 나는 점점 고갈되는 것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낡고 뒤처지는 것이다. “난감”하기 이를 데 없지만 여기서 맥없이 그만둘 수 없다. 나는 무언가를 남기지 않으면 허기가 져 견딜 수 없는, 천생 그런 사람인 것이다. 사실, 오히려 쓰지 않으면 도리어 쫓기는 것 같아 참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 중독에 사로잡히고야 만다. 순순히, 자발적으로.
이 중독의 결과가 어떤 모양새일지, 그 여정은 또 얼마나 고독할지, 나는 섣불리 가늠할 수 없다. 그저 “삼십 년 후에 도착할 장소”만 희미하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 장소는 어김없이 “한낮의 종이”. 나는 삼십 년 후를 상상하며 종이 위에 “가느다란 펜”을 미끄러뜨린다. 또다시 어떤 “얼룩”을 내고자 한다. 어떤 외압으로도 결코 지워지거나 빠지지 않을 나만의 얼룩을. 종이 위에서는 상상의 도약과 확장만이 있을 뿐이다. 어떤 상상이라도 가능할 것이라는 희망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종이 앞에서만큼은 당당할 수 있다. 한없이 두근거릴 수 있다.
마감은 없다. 마감이 없어도 나는 시를 쓴다. 나에게 보여주기 위해. 나 자신에게 고백하고 비로소 떳떳해지기 위해. “그가 들려주는 얘기를 잊지 않고” 나 자신에게 “다시 들려”주기 위해. 쓰는 것도 결국에는 중독이 되고야 만다. 양치기 소년처럼, 우리는 쓴다. 밥 먹듯, 거짓말하듯. 그리고 불쑥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처음 혹은 마지막 “표정”. 그렇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시인인 것이다.
시인 오은
*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