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은 이미지를 좇는다. 이미지를 먹고 마신다. 이미지를 소비한다. 실체가 아닌 파생적 실재, 허위적 실재인 ‘시뮬라시옹’에 대해 말한 이는 프랑스 철학자 장 보드리야르다. 그는 “시뮬라시옹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말했다. 이미지의 어원적 기원은 ‘그림자’다. 그런데 오리지널리티가 아닌 이 허위적 실재가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중심 코드가 됐다니. 이는 무슨 말인가.
이효리를 좋아하니까 이효리가 마시는 술을 마시고 김태희를 좋아하니 김태희가 광고하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산다. 한예슬이 마시는 커피를 들이켜며 수애가 광고하는 화장품을 바른다. 이미지라는 거울 속 분신. 그 분신은 섹시하고 여성스럽고 귀여우며 우아하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보이다 안 보이는 그 경계에서 권위를 지닌다. 그것은 곧 현대인에게 재현된 것, 실체가 아닌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서의 대체물이다. 현대인은 이미지를 통해 결핍을 채우고 슬픔을 진정시키고자 한다. 스크린이라는 시각적 장치 속에서 스타라는 수많은 이미지를 소비하며 위안을 얻는다. 바야흐로 ‘매혹적인 허위’의 시대, 이미지 시대에 당도한 것이다.
처음부터 ‘비호감 캐릭터’로 각인
실체 없이는 이미지도 없다. 이미지는 결국 2차적 존재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체보다 힘이 세다. 그리고 실체보다 영원하다. 이미지는 오랜 시간 사람의 뇌리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문제는 뭔가.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에 ‘흠’이 나면 끝장이다. 한마디로 ‘쪽팔려서’ 살 수 없다.
MBC 예능프로그램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매주 뜨겁게 주목받고 있다. 가창력 있는 가수에 목말라하던 시청자의 호응 덕분이든, 서바이벌 형식이라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든 이 프로그램이 논란 속에서도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다. 임재범의 노래가 관중을 압도한 것은(약간의 불안정한 음정과 거친 목소리임에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그의 개인사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암 치료 중인 아내의 사연과 무명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살아온 인생…. 개인의 역사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관중은 그 이미지에 도취한다. 대중은 어떤 방식으로 스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까. 발산하는 이미지와 수용되는 이미지 사이에서 스타들은 공포를 느낀다(너 떨고 있니?).
스타들은 경미한 교통사고를 내도, 단순한 폭행사건에 연루돼도 이미지가 추락한다. 그들은 이미지를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부해서 기부천사가 되고 입양해서 입양천사가 되고 많은 아이를 낳아 다둥이 가족이 되는 일마저도, 수많은 우연과 진정성과 의도가 서로 섞이고 엇갈리면서 특정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순수한 진정성이나 우연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나라에서 관용은 없다. ‘비호감’이 그것이다. ‘나가수’에서 옥주현은 처음부터 비호감 이미지로 각인됐다. 이 혹독한 평판이 단순한 통과의례일지, 그를 영원히 따라다닐 ‘꼬리표’일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를 비호감으로 여기는 이가 적지 않다. 그가 비호감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슈퍼스타K’에서 상대의 인격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그는 노래를 부른 지원자에게 “그렇게 노래하는 것을 보니 수치스럽다”는 식으로 말했다. 유관순 패러디와 관련해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걸그룹 ‘핑클’의 멤버였다는 사실도 그를 옥죈다. 기획사가 흥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한, 즉 대중의 감각적 기호에 맞는 미모와 적절한 댄스로 무장한 아이돌그룹 첫 세대라는 점이 이미지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멤버 중 그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딸리는’ 축에 들었고 이것이 그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폭탄’ 이미지였다. 핑클이 전 방송사의 전파를 타며 인기 상한가를 쳤을 때도 그는 카메라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됐다. 통통한 몸집과 호감 가지 않는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카메라 뒤에 숨어 핑클 멤버 이효리가 최고의 섹시스타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진과 성유리가 TV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건강미인이라는 콘셉트의 요가, 그리고 뮤지컬 배우로서의 가창력과 연기다. 뮤지컬 ‘아이다’의 성공은 그의 뛰어난 가창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진정한 가수의 길 찾는 절호의 기회
‘핑클’ 열풍 속에서 가장 소외됐던 가수, 멤버들이 현란한 춤을 출 때 뒤에서 노래를 부르며 카메라 줌 바깥에 자주 서 있던 가수. 옥주현은 ‘나가수’를 통해 진정한 가수로서의 길을 되찾게 될지도 모른다. 반대로 비호감이라는 캐릭터가 사람의 뇌리에 강하게 인식되는 순간 ‘스타로서 제명되는’ 길을 밟을 수도 있다. 옥주현은 이미지 사회에서, 그러니까 구경거리 사회에서 ‘왕따’로서의 자기 운명을 지켜봐야 할지도 모른다.
누구는 무슨 짓을 해도 예쁘기만 하고 누구는 무슨 짓을 해도 밉기만 하니, 이 무슨 요상한 집단적 신념인가. 그러나 비호감을 극복해가면서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폭력과도 같은 악플에 분노하는 대신(옥주현은 악플러에게 “살인자 같은 심정은 아니겠지요?”라고 대응한 바 있다)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놀라운 진화의 계기로 삼는다면 ‘비호감’은 ‘호감’으로 바뀔 수 있다. 대중은 언제나 이랬다저랬다 하는 까다로운 변덕쟁이니까. 대중이 사랑해주었는데도 자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스타에 비하면 대중의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스타가 의연하고 멋있다. 비호감을 자신의 콘셉트로 삼아 ‘지금부터 내가 너희를 왕따시키겠어’라고 마음먹는다면, 언젠가 “정말 멋있다”라는 말이 되돌아오지 않을까.
이효리를 좋아하니까 이효리가 마시는 술을 마시고 김태희를 좋아하니 김태희가 광고하는 베이커리에서 빵을 산다. 한예슬이 마시는 커피를 들이켜며 수애가 광고하는 화장품을 바른다. 이미지라는 거울 속 분신. 그 분신은 섹시하고 여성스럽고 귀여우며 우아하다. 그것은 있음과 없음, 보이다 안 보이는 그 경계에서 권위를 지닌다. 그것은 곧 현대인에게 재현된 것, 실체가 아닌 거울에 비친 모습으로서의 대체물이다. 현대인은 이미지를 통해 결핍을 채우고 슬픔을 진정시키고자 한다. 스크린이라는 시각적 장치 속에서 스타라는 수많은 이미지를 소비하며 위안을 얻는다. 바야흐로 ‘매혹적인 허위’의 시대, 이미지 시대에 당도한 것이다.
처음부터 ‘비호감 캐릭터’로 각인
실체 없이는 이미지도 없다. 이미지는 결국 2차적 존재다. 하지만 이미지는 실체보다 힘이 세다. 그리고 실체보다 영원하다. 이미지는 오랜 시간 사람의 뇌리 속에서 살아간다. 그러니까 문제는 뭔가. 이미지 관리를 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지에 ‘흠’이 나면 끝장이다. 한마디로 ‘쪽팔려서’ 살 수 없다.
MBC 예능프로그램 ‘우리들의 일밤-나는 가수다’(이하 나가수)가 매주 뜨겁게 주목받고 있다. 가창력 있는 가수에 목말라하던 시청자의 호응 덕분이든, 서바이벌 형식이라는 무한경쟁의 자본주의 논리를 그대로 따왔기 때문이든 이 프로그램이 논란 속에서도 하나의 신드롬을 만들어내는 것은 사실이다. 임재범의 노래가 관중을 압도한 것은(약간의 불안정한 음정과 거친 목소리임에도) 호소력 짙은 목소리와 그의 개인사가 오버랩됐기 때문이다. 암 치료 중인 아내의 사연과 무명의 언더그라운드 가수로 살아온 인생…. 개인의 역사는 하나의 이미지를 만들고 관중은 그 이미지에 도취한다. 대중은 어떤 방식으로 스타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소비하는 것일까. 발산하는 이미지와 수용되는 이미지 사이에서 스타들은 공포를 느낀다(너 떨고 있니?).
스타들은 경미한 교통사고를 내도, 단순한 폭행사건에 연루돼도 이미지가 추락한다. 그들은 이미지를 먹고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기부해서 기부천사가 되고 입양해서 입양천사가 되고 많은 아이를 낳아 다둥이 가족이 되는 일마저도, 수많은 우연과 진정성과 의도가 서로 섞이고 엇갈리면서 특정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것이 순수한 진정성이나 우연에서 비롯했다고 해도 말이다.
따라서 이미지의 나라에서 관용은 없다. ‘비호감’이 그것이다. ‘나가수’에서 옥주현은 처음부터 비호감 이미지로 각인됐다. 이 혹독한 평판이 단순한 통과의례일지, 그를 영원히 따라다닐 ‘꼬리표’일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그를 비호감으로 여기는 이가 적지 않다. 그가 비호감이 된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는 ‘슈퍼스타K’에서 상대의 인격을 지나치게 무시하는 발언을 했다. 심사위원으로 나온 그는 노래를 부른 지원자에게 “그렇게 노래하는 것을 보니 수치스럽다”는 식으로 말했다. 유관순 패러디와 관련해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걸그룹 ‘핑클’의 멤버였다는 사실도 그를 옥죈다. 기획사가 흥행을 위해 의도적으로 기획한, 즉 대중의 감각적 기호에 맞는 미모와 적절한 댄스로 무장한 아이돌그룹 첫 세대라는 점이 이미지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다. 멤버 중 그는 상대적으로 외모가 ‘딸리는’ 축에 들었고 이것이 그를 따라다니는 일종의 ‘폭탄’ 이미지였다. 핑클이 전 방송사의 전파를 타며 인기 상한가를 쳤을 때도 그는 카메라에서 상대적으로 배제됐다. 통통한 몸집과 호감 가지 않는 얼굴 때문이었다. 그는 카메라 뒤에 숨어 핑클 멤버 이효리가 최고의 섹시스타로 등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이진과 성유리가 TV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모습을 바라봐야 했다. 그가 선택한 것은 건강미인이라는 콘셉트의 요가, 그리고 뮤지컬 배우로서의 가창력과 연기다. 뮤지컬 ‘아이다’의 성공은 그의 뛰어난 가창력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진정한 가수의 길 찾는 절호의 기회
핑클 시절 옥주현의 동료 이효리.
누구는 무슨 짓을 해도 예쁘기만 하고 누구는 무슨 짓을 해도 밉기만 하니, 이 무슨 요상한 집단적 신념인가. 그러나 비호감을 극복해가면서 성찰할 기회를 얻을 수도 있다. 폭력과도 같은 악플에 분노하는 대신(옥주현은 악플러에게 “살인자 같은 심정은 아니겠지요?”라고 대응한 바 있다) 자신의 역량을 키워나가는 놀라운 진화의 계기로 삼는다면 ‘비호감’은 ‘호감’으로 바뀔 수 있다. 대중은 언제나 이랬다저랬다 하는 까다로운 변덕쟁이니까. 대중이 사랑해주었는데도 자살 같은 극단적 선택을 하는 스타에 비하면 대중의 비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자기 길을 가는 스타가 의연하고 멋있다. 비호감을 자신의 콘셉트로 삼아 ‘지금부터 내가 너희를 왕따시키겠어’라고 마음먹는다면, 언젠가 “정말 멋있다”라는 말이 되돌아오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