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인구의 60%는 전 세계 소득의 6%로 생계를 이어가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에 2달러 이하의 생활비로 살아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거꾸로’ 가는 한 은행이 가난을 구제하는 동시에 자본주의의 새로운 미래를 열고 있다. 부자보다 가난한 사람이 더 환영받는 은행, 여성이 차별받는 나라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더 환영받는 은행, 바로 방글라데시의 그라민은행이다.
2006년 이 은행은 창시자 무함마드 유누스(67) 총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무담보 소액융자 제도인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공로다. 지금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60여 개국에 도입돼 가난한 사람들의 자활을 돕고, 그라민은행에서 출발한 다양한 사회기업들은 지구촌시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때마침 유누스 총재가 9월9일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그는 서울평화상을 받기 위해, 올해엔 ‘세계여성포럼 2007’ 대표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이번 방문에선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 퇴치와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여성들의 권익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10, 11일 이틀간 그를 만나고,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그의 대중강연도 들었다. 세계여성포럼의 한 관계자는 “그의 강연을 들으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비전을 제시해주고,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백발이 성성한데도 어린아이처럼 밝고 친절한 인상이다. 반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어떤 선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2007년 5월 현재 그라민은행은 방글라데시 전역 2431개 지점에서 7만8659개 마을의 빈곤계층 720만명에게 대출을 해주고 있다. 담보도 없이 대출해주고 있지만 상환율은 98.85%에 이른다. ‘그라민(Grameen)’은 방글라데시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라민은행의 거의 모든 업무가 마을 채무자들 모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취지에 잘 맞는 이름이다.
“요즘 그라민은행을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이 뭐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럼 나는 은행업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은행업무에 대해 알았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은행규칙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꿈에서 만들었느냐고 묻는다. 사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규칙을 마련하지 못했을 때는 기존 은행들과 반대로 정하곤 했다.”
빈곤층에 담보 없이 대출해주는데도 98.85% 상환율 ‘기적’
흥미롭게도 그라민은행은 대출 시 ‘대출자 16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아이들을 교육시킬 것, 언제나 남을 도울 것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나름대로 빈곤 지표도 만들어 모니터링하고 있다. 최소한 양철지붕 집에서 살고, 끓인 물을 마실 수 있고, 하루 세 끼를 1년간 어려움 없이 먹을 수 있는 등 10개 지표가 충족되면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다. 일반 은행으로선 생각하기 쉽지 않은 지표들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 사고가 열려 있지 않으면 바로 눈앞의 소중한 것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선입견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완전히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 지난해 노벨상을 받은 뒤 달라진 점이 많을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라민은행의 취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전에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상을 받은 뒤에는 사람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신뢰를 갖고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그라민은행이 문을 연 지 25년이 지났다. 방글라데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아지고, 여권이 신장돼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그라민은행 고객의 97%는 여성이다. 우리가 여성에게 주목한 이유는 여성에 대한 대출이 가정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현재 추세라면 2015년까지 빈곤율이 50% 낮아질 것이다. 유아 사망률, 산모 사망률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보다 낮아졌다. 반면 인간개발지수는 높아지고 있다.”
- 은행을 운영하면서 어떤 점이 특히 어려웠나.
“전통 이슬람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주로 집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그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성들이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여성(어머니) 때문이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14명(5명은 유아기 때 죽음)의 아이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에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자주 봤고, 이를 계기로 빈곤 퇴치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1969년 밴더빌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들테네시주립대학에서 경제학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다 72년 방글라데시 치타공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74년 방글라데시에선 수만명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그는 대학 강의실에서 현실과 유리된 고상한 경제학 이론들만 가르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 세상을 바꿔보겠노라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방글라데시라도 바꿔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 역시 너무 컸다. 그 다음엔 대학 옆 마을을 위해서라도 뭔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좀더 현명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을은 내가 뭔가를 하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옆 마을에서 한 여인이 자신이 만드는 모든 물품을 원하는 가격에 팔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고리대금업자에게 1달러도 안 되는 돈을 빌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사는 일과 같았다.”
그는 대학 옆 마을 조브라에서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시달리는 피해자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피해자는 모두 42명. 그런데 피해금액은 총 27달러에 불과해 그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이 돈을 꺼내 내놨다.
다음 단계로 그는 대학 구내 은행에 찾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대출을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보증인이 되겠다고 나서, 가난한 사람들이 대출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이 시작됐고, 1983년 그라민은행이 설립됐다.
그라민은행은 몇 년 만에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 방식이 점차 성공하면서 그에게서 한 수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86년에는 당시 미국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그를 초청했다.
“처음엔 그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재차 요청해와 아칸소를 방문했는데, 클린턴 부부가 그곳에도 소액대출 방식을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시카고대와 하버드대 교수들, 미국 은행가들은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빈국의 방식이라 부국인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이것이 빈국과 부국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층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도 빈곤층이 있고, 그들도 대출을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칸소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시작돼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은 미국에서만 뉴욕 할렘가 등 700개 이상의 소액대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수만 명 굶어죽는데 대학서 강의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전 세계적으로 마이크로 크레디트 이용자가 1억명을 돌파했고 그라민은행도 명성을 얻었지만, 그의 계획은 더욱 커지고 있다.
“최근 독일에서 열린 G8회의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의장에게 아프리카 소액금융펀드를 창설할 것을 요구했다. 아프리카는 여성들이 대외활동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라민은 은행 외에도 빈곤과 개발 등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해 그라민폰(휴대폰 회사), 그라민 요거트회사, 그라민 안과병원, 그라민 재생에너지회사 등도 운영하고 있다. 이윤추구가 목표가 아닌, 공공 선(善)을 위한 사회기업들이다. 세계화 시대에도 이런 사회기업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세계화를 지지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세계화여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화는 100차선 고속도로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무료로 통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라면 경제강국의 대형 트럭들이 장악하고, 방글라데시의 작은 인력거들은 모두 튕겨나갈 것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화를 위해서는 교통법규가 있어야 하고 경찰, 당국이 감시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강력한 다국적 사회기업이 만들어져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국가에 큰 혜택을 줄 것이다.”
그는 물리학과 교수인 아내 아프로지, 경영학을 전공하는 둘째 딸과 함께 수도 다카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세계적인 은행가들처럼 부유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는 엉뚱한 질문에 그는 “가난을 구제하려는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 잘살기를 바랄 순 없다”고 잘라 말했다. 큰딸 모니카 유누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활약하는 오페라 가수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희망을 위해 노래하라’라는 음악인 NGO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
2006년 이 은행은 창시자 무함마드 유누스(67) 총재와 함께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무담보 소액융자 제도인 마이크로 크레디트(micro credit)를 통해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한 공로다. 지금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한국을 비롯한 세계 60여 개국에 도입돼 가난한 사람들의 자활을 돕고, 그라민은행에서 출발한 다양한 사회기업들은 지구촌시대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때마침 유누스 총재가 9월9일 한국을 방문했다. 지난해 그는 서울평화상을 받기 위해, 올해엔 ‘세계여성포럼 2007’ 대표 자격으로 한국에 왔다. 이번 방문에선 ‘가난한 사람들의 빈곤 퇴치와 인권 옹호에 앞장서고 여성들의 권익 신장에 기여한 공로’로 이화여대에서 명예철학박사 학위도 받았다.
10, 11일 이틀간 그를 만나고, 이화여대에서 있었던 그의 대중강연도 들었다. 세계여성포럼의 한 관계자는 “그의 강연을 들으면 가슴이 부풀어 오른다. 비전을 제시해주고,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감사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백발이 성성한데도 어린아이처럼 밝고 친절한 인상이다. 반평생을 남을 위해 살아온 사람이라 그런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어떤 선한 기운까지 느껴졌다.
2007년 5월 현재 그라민은행은 방글라데시 전역 2431개 지점에서 7만8659개 마을의 빈곤계층 720만명에게 대출을 해주고 있다. 담보도 없이 대출해주고 있지만 상환율은 98.85%에 이른다. ‘그라민(Grameen)’은 방글라데시어로 ‘마을’이라는 뜻이다. 그라민은행의 거의 모든 업무가 마을 채무자들 모임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취지에 잘 맞는 이름이다.
“요즘 그라민은행을 성공시킨 가장 중요한 요인이 뭐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그럼 나는 은행업무에 대해 아는 게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내가 은행업무에 대해 알았다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또 은행규칙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궁금해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꿈에서 만들었느냐고 묻는다. 사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규칙을 마련하지 못했을 때는 기존 은행들과 반대로 정하곤 했다.”
빈곤층에 담보 없이 대출해주는데도 98.85% 상환율 ‘기적’
흥미롭게도 그라민은행은 대출 시 ‘대출자 16계명’을 지킬 것을 요구한다. 여기에는 아이들을 교육시킬 것, 언제나 남을 도울 것 등이 포함돼 있다. 또 나름대로 빈곤 지표도 만들어 모니터링하고 있다. 최소한 양철지붕 집에서 살고, 끓인 물을 마실 수 있고, 하루 세 끼를 1년간 어려움 없이 먹을 수 있는 등 10개 지표가 충족되면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판단한다. 일반 은행으로선 생각하기 쉽지 않은 지표들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싶어하는 것만 본다. 사고가 열려 있지 않으면 바로 눈앞의 소중한 것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선입견에 영향을 받지 않아야 완전히 새롭고 창의적인 방식을 떠올릴 수 있는 것이다.”
- 지난해 노벨상을 받은 뒤 달라진 점이 많을 듯하다.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그라민은행의 취지에 관심을 갖게 됐다. 이전에는 사실 사람들을 만나기도 힘들었다. 상을 받은 뒤에는 사람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신뢰를 갖고 우리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 그라민은행이 문을 연 지 25년이 지났다. 방글라데시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율이 높아지고, 여권이 신장돼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됐다. 그라민은행 고객의 97%는 여성이다. 우리가 여성에게 주목한 이유는 여성에 대한 대출이 가정에 더 유리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또 현재 추세라면 2015년까지 빈곤율이 50% 낮아질 것이다. 유아 사망률, 산모 사망률도 인도 스리랑카 파키스탄보다 낮아졌다. 반면 인간개발지수는 높아지고 있다.”
2006년 노벨평화상 수상 뒤 지지자들에게 둘러싸인 유누스 총재(가운데).
“전통 이슬람사회에서는 여성들이 주로 집 안에서 활동하기 때문에 그들을 바깥으로 끌어내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여성들이 두려움을 갖는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빈곤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것도 여성(어머니) 때문이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14명(5명은 유아기 때 죽음)의 아이 가운데 셋째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집에 찾아오는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모습을 자주 봤고, 이를 계기로 빈곤 퇴치에 헌신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풀브라이트 장학금을 받고 미국에서 유학한 그는 1969년 밴더빌트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고, 미들테네시주립대학에서 경제학과 조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다 72년 방글라데시 치타공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1974년 방글라데시에선 수만명의 사람들이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현실을 직시한 그는 대학 강의실에서 현실과 유리된 고상한 경제학 이론들만 가르쳐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젊었을 때 세상을 바꿔보겠노라는 꿈을 품었다. 그러나 세상이 너무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방글라데시라도 바꿔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나라 역시 너무 컸다. 그 다음엔 대학 옆 마을을 위해서라도 뭔가 해보자고 마음먹었다. 좀더 현명해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마을은 내가 뭔가를 하기에 딱 적당한 크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 옆 마을에서 한 여인이 자신이 만드는 모든 물품을 원하는 가격에 팔아야 한다는 조건으로 고리대금업자에게 1달러도 안 되는 돈을 빌리는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마치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사는 일과 같았다.”
그는 대학 옆 마을 조브라에서 고리대금업자들에게 시달리는 피해자들의 명단을 만들었다. 피해자는 모두 42명. 그런데 피해금액은 총 27달러에 불과해 그는 다시 한 번 충격을 받았다. 결국 그는 자신의 주머니에서 이 돈을 꺼내 내놨다.
다음 단계로 그는 대학 구내 은행에 찾아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대출을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보증인이 되겠다고 나서, 가난한 사람들이 대출받을 수 있도록 했다. 이렇게 해서 ‘마이크로 크레디트’ 운동이 시작됐고, 1983년 그라민은행이 설립됐다.
그라민은행은 몇 년 만에 급속도로 확산됐다. 이 방식이 점차 성공하면서 그에게서 한 수 배우려는 사람들도 많아졌는데, 1986년에는 당시 미국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그를 초청했다.
“처음엔 그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재차 요청해와 아칸소를 방문했는데, 클린턴 부부가 그곳에도 소액대출 방식을 도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시카고대와 하버드대 교수들, 미국 은행가들은 마이크로 크레디트는 빈국의 방식이라 부국인 미국에서는 통하지 않는다고 주장했지만, 나는 이것이 빈국과 부국의 문제가 아니라 빈곤층 자체의 문제이기 때문에 미국에서도 충분히 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에도 빈곤층이 있고, 그들도 대출을 거부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칸소에서도 비슷한 프로젝트가 시작돼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은 미국에서만 뉴욕 할렘가 등 700개 이상의 소액대출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수만 명 굶어죽는데 대학서 강의만 하고 있을 수 없었다”
그라민은행에서 대출받은 종자돈으로 가금류를 키우고 있는 회원 집을 방문한 유누스 총재(왼쪽에서 두 번째).
“최근 독일에서 열린 G8회의에 참가할 기회가 있었는데, 의장에게 아프리카 소액금융펀드를 창설할 것을 요구했다. 아프리카는 여성들이 대외활동에 적극적이기 때문에 이런 제도를 통해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라민은 은행 외에도 빈곤과 개발 등 다양한 문제 해결을 위해 그라민폰(휴대폰 회사), 그라민 요거트회사, 그라민 안과병원, 그라민 재생에너지회사 등도 운영하고 있다. 이윤추구가 목표가 아닌, 공공 선(善)을 위한 사회기업들이다. 세계화 시대에도 이런 사회기업체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는 세계화를 지지한다. 중요한 것은 올바른 세계화여야 한다는 점이다. 세계화는 100차선 고속도로가 전 세계로 뻗어나가는 것과 같다. 모든 사람이 무료로 통행할 수 있는 고속도로라면 경제강국의 대형 트럭들이 장악하고, 방글라데시의 작은 인력거들은 모두 튕겨나갈 것이다.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세계화를 위해서는 교통법규가 있어야 하고 경찰, 당국이 감시도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강력한 다국적 사회기업이 만들어져 가난한 사람과 가난한 국가에 큰 혜택을 줄 것이다.”
그는 물리학과 교수인 아내 아프로지, 경영학을 전공하는 둘째 딸과 함께 수도 다카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다. 세계적인 은행가들처럼 부유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는 엉뚱한 질문에 그는 “가난을 구제하려는 은행에서 일하는 사람이 잘살기를 바랄 순 없다”고 잘라 말했다. 큰딸 모니카 유누스는 뉴욕 메트로폴리탄에서 활약하는 오페라 가수로,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아 ‘희망을 위해 노래하라’라는 음악인 NGO를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