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화창한 날씨와 살인적인 물가로 유명한 실리콘밸리.
이런 존의 선택은 곧 현명한 것으로 증명됐다. 최근 미국의 한 커리어컨설팅 업체가 발표한 바에 따르면, 텍사스에서 연봉 10만 달러(약 9400만원)를 받는 것은 실리콘밸리에서 연봉 15만 달러를 받는 것과 같다고 한다. 연봉이 50%나 올라도 실리콘밸리의 높은 물가를 감안하면 실질임금은 똑같은 것이다.
세계 최고의 두뇌, 세계 최고의 부자들이 몰려 있는 실리콘밸리. 사실 실리콘밸리는 공식 지역명이 아니다. 대체로 샌프란시스코에서 남쪽으로 30km 떨어진 산마테오에서 산호세에 이르는 지역을 실리콘밸리라 통칭한다. 스탠퍼드대학이 자리한 팔로알토, 구글 본사가 있는 마운틴뷰, 벤처 캐피털이 밀집한 멘로파크, 애플이 위치한 쿠퍼티노, 인텔 등 반도체 업체들이 주로 자리한 산타클라라와 산호세 등이 대표적인 실리콘밸리 내 도시들이다. 연중 화창하고 따뜻한 날씨를 자랑하는 이 지역은 캘리포니아주에서 생활물가가 가장 비싸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우스갯소리로 “날씨 값을 내고 있다”고 말한다.
필자는 최근 산호세에 자리한 이베이 본사를 방문했다. 사무실 곳곳에는 공학대학원을 졸업하고 정보기술(IT) 업계에서 2~3년 일한 경력을 가진 인재들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그런데 초봉이 무려 9만 달러나 돼 무척 놀랐다. 이 정도라면 한국에서는 대기업 부장 또는 임원이 받는 급여 수준이다.
그런데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좀 달라진다. 9만 달러 연봉에서 소득세가 무려 40%를 차지한다. 소득세를 빼면 실제 받는 월 급여는 4500~5000달러인 셈. 실리콘밸리에서 방 2개짜리 아파트의 평균 월세는 1500~2500달러다. 게다가 이곳은 서울이나 뉴욕 같은 대도시와 달리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아 차가 없으면 사실상 이동이 불가능하다. 차 한 대 굴리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매달 500~1000달러 수준. 자녀가 있거나 맞벌이를 한다면 꼼짝없이 차 두 대는 굴려야 하기 때문에 1000~2000달러로 지출이 늘어난다. 집과 차 문제만 해결하는 데 매달 3000달러가 들어가는 셈이다.
연봉 2억원 넘는 수입에도 여전히 ‘세입자’
실리콘밸리의 대표적 부자인 애플의 스티브 잡스(왼쪽)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빌 게이츠.
다니엘은 우리 돈으로 연봉 2억원이 넘는 수입을 올리고 있지만 여전히 ‘세입자’다. 실리콘밸리의 부동산 값이 미국 내 최고 수준인 까닭이다. 팔로알토에서 방 3~4개짜리 집을 구입하려면 20억원이 넘게 든다. 실리콘밸리 내에서도 부자 동네로 알려진 로스앨토스의 고급 주거단지에는 100억원 이하의 집을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실리콘밸리는 부자들에게 톡톡히 ‘실리콘밸리 프리미엄’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팔로알토에 자리한 스탠퍼드대학, 그중에서도 스탠퍼드 공학대학원 건물에 들어가 돌멩이를 던지면 미래의 노벨상 후보자나 백만장자의 머리에 맞는다는 농담이 있다. 구글이나 야후 등 내로라하는 기업 창업자들이 모두 이곳 출신임을 감안하면 허풍이라고 할 수도 없다. 2~3명의 공동창업자가 회사를 세우고 몇 년 뒤 상장하거나 다른 기업에 인수되는 경우, 이들은 수십억원에서 많게는 수천억원의 자산을 보유하게 된다.
팔로알토 바로 옆 마운틴뷰에 있는 구글 본사 주차장. 여기서는 BMW나 벤츠 같은 차는 고급차 축에도 못 낀다. 포르셰, 마세라티, 페라리, 람보르기니 정도는 돼야 “좋은 차 타는군”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구글에는 3000여 명의 백만장자(이는 한국 최대 인터넷 기업인 NHN의 전체 직원보다 많은 수다)가 근무하고 있다. 이들 중 3분의 1은 구글이 상장되기 전 스톡옵션을 받은 직원들이다. 이후로도 기업 인수, 주식가격 폭등 등으로 몇배 더 많은 백만장자 직원이 탄생했다고 한다.
높은 물가, 수많은 부자 같은 실리콘밸리의 독특한 환경은 그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부자에 대한 차별화된 인식을 갖게 만든다. 첫째는 ‘나도 열심히 일하고 운만 좀 따르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함께 학교를 다녔던 친구 녀석이 어느 날 상장을 통해 수백억원대 부자가 됐다는 말을 자주 듣고 산다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둘째는 ‘몇십억원 정도 가진 사람들을 딱히 부자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또한 실리콘밸리의 높은 생활비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백만장자들을 생각한다면 고개가 끄덕여지는 부분이다.
실리콘밸리의 젊은 부자들이 가진 부에 관한 관점을 엿볼 수 있는 이야기를 소개하겠다. 구글의 초기 직원들 중 몇몇은 분기마다 한 번씩 별도 모임을 갖는다. 이들이 모이는 이유는 자신들이 엔젤투자(유망 벤처기업에 초기 자금을 지원하는 투자)한 회사의 경영 상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구글 주식의 상장을 통해 상당한 부를 축적한 이 젊은 엔지니어들 가운데 일부는 아직 자기 소유의 집도 없다. 부동산이 아닌, 자기 후배들에게 투자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엔젤투자가 명분도 지니지만, 실리 또한 가져다주리라 믿는다. 자신들이 성공한 것처럼 후배들도 성공하지 못하리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엔젤투자가 성공할 경우 구글의 젊은 직원들은 또다시 수천 배의 이익을 챙기게도 또한 될 것이다. 간혹 투자가 실패로 끝난다 해도 크게 상관없다. 이들은 여전히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기회가 된다면 언제든 창업을 통해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기존 부자와 차별 ‘사회적 기업가 정신’ 애용
실리콘밸리 부자들이 즐겨 찾는 팔로알토의 한 레스토랑 .
실리콘밸리에서 특히 애용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Social Entrepreneurship(사회적 기업가 정신)’이다. 이는 시민단체와 기업의 중간적 성격을 띠는 것으로, 조직은 일반기업과 똑같이 운영되지만 명분과 목적은 공익에 기반을 둔다. ‘룸 투 리드(Room to Read)’라는 조직이 대표적인데, 이 조직은 방글라데시와 네팔 등 문맹률이 높은 국가에 도서관을 짓는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런 단체에 투자하는 사람들도 일명 ‘실리콘밸리 부자’인 경우가 많다. 실리콘밸리의 대표 벤처캐피털인 DFJ도 Room to Read에 투자했다. 이들은 부를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서도 기존 부자들과는 차별화된 방법으로 좀더 큰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한다.
이런 투자를 하려면 실리콘밸리의 물가와 생활수준 등을 감안할 때 최소 수백억원대 자산은 있어야 한다. 실리콘밸리 부자들이 젊은 나이에 일군 수억, 수십억원의 자산에 만족하지 않고 열심히 사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렇게 한 단계 높은 부의 재생산, 또는 환원에 참여하고 싶은 욕구가 강하기 때문이다. 투자자나 인큐베이터로서의 제2의 삶을 실현해 부, 명예, 보람을 모두 달성하려는 욕구. 이 욕구가 실리콘밸리 부자들이 오늘도 내일도 열심히 일하는 동기다.
실리콘밸리 부자들의 이러한 부에 대한 관념을 발견한 것은, 필자가 처음 실리콘밸리에 와서 사람들을 만나는 동안 알게 된 가장 큰 기쁨이었다. 큰 부를 이뤘음에도 결코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부의 재생산과 환원을 하는 그들에게서 일종의 역할 모델을 발견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그들의 지극히 개인적인 욕망이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까 싶다. 경제학자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말한 바처럼 말이다.
※권도혁 씨는 베인앤컴퍼니 컨설턴트 출신으로, 실리콘밸리의 벤처캐피털 ‘알토스벤처스’에서 초빙연구원으로 근무했다. 현재는 실리콘밸리에 인터넷 기업을 세우고 사업가로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