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8일 서울 동대문 서울패션아트홀에서 열린 ‘통 큰 엄마와 언니, 그리고 명랑 딸들의 축제’.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권영길 의원과 경합했던 심상정 의원은 빅사이즈 옷 제작 의무화 공약을 내놓았다.
1. 2020년까지 1인당 국민소득 10만 달러 달성
2. 새 일자리 500만 개 창출
3. AU(아시아연합)로 대륙국가 건설
그는 자칭 경제 구세주요, 대웅변가며 대전략가다. “미꾸라지처럼 군대 빠지더니 부동산 투기로 부정축재, 원정출산에 위장전입, 요리조리 빠지고 ‘개판 정치’로다. 이런 자들에게 속아 사는 여러분과 나, 못 가진 국민이 불쌍하다”나 뭐라나. 어쨌거나 맞는 말 아닌가.
그의 믿거나 말거나 ‘믿음’은 12월 대선에서 1600만 표 넘게 얻어 압도적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된다는 것. 그것도 17대, 18대 연임 대통령이 되겠단다. 상생소득세 1%를 징수하고, 토지공개념을 강화하며, 고리사채업을 폐지하겠다고 그는 으름장을 놓는다.
그의 당선 가능성은? 없다! 그렇거나 말거나 그의 요란한 공약을 보다 보면 키득키득 웃음이 나온다. 슬로건은 거대하나 각론은 맹랑하다. 때로는 속이 시원하기도 하다.
17대 대선에서 처음 도입된 ‘예비후보제’는 선거일 현재 5년 이상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40세 이상으로 ‘큰 꿈’을 품은 국민이면 누구나 등록이 가능하다. 그래선지 올 대선엔 이색후보, 이색공약이 어느 때보다 많다.
9월12일 현재 선관위 등록 대선 예비후보 115명
8월18일 열린우리당의 마지막 전당대회가 열린 경기 고양시 킨텍스. 전당대회장 밖은 쑥대밭이었다. 허경영(60) 씨와 김혁규 전 경남지사 지지자들이 ‘우리당 지킴이’를 자처하면서 대의원들의 행사장 진입을 막은 것. 허씨와 김 전 지사는 악수도 나눴는데, 당원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던 허씨는 이렇게 말했다.
“열린우리당에서 당의장까지 한 사람들이 흡수 합당을 기도한다. 기회주의다. 김혁규 전 지사, 강운태 전 장관 등과 신당을 만들 것이다. 밑그림도 그려져 있다.”
‘허.경.영!’
이날 그의 지지자들은 큰 목소리로 ‘허.경.영!’을 연호했다. 박영선 의원은 이들에게 대회장 입장을 저지당하자 주저앉기도 했다.
허.경.영? 그렇다. ‘그때 그 사람’ 맞다. 1997년 15대 대통령 선거 때 공화당 후보로 TV토론에 나와 “당선 직후 계엄령을 선포해 국회의원 전원을 사법처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던 그 사내. 그는 대선 예비후보 등록도 남들보다 먼저(4월23일) 끝마쳤다.
믿거나 말거나, IQ 430의 천재적 두뇌를 가졌다(물론 본인 주장이다)는 그는 바이칼호, 캄차카반도를 매입하고, 유엔본부를 판문점으로 옮겨 경제와 안보를 동시에 살리겠으며, 암행어사 제도를 봉황패라는 이름으로 부활하고, 한라산 백록담을 인공호수로 만들어 1인당 국민소득 10만 달러 시대를 견인하겠다고 공약한다.
맞다. 블랙코미디다. 그런데 ‘100년 정당’ 운운하더니 멱살잡이 끝에 3년 9개월여 만에 문 닫는 정당의 마지막 날 모습도 블랙코미디 아닌가? 어쨌거나 그는 열린우리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의 합당으로 현재는 대통합민주신당 소속. 제1당 후보인 터라 예비후보 순번은 11번으로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18번)보다 앞선다.
9월12일 현재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된 대선 예비후보는 115명. 1번은 대통합민주신당의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115번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에 사는 박종균(46) 씨다. 무명의 예비후보가 전체의 절반을 훌쩍 넘는다. 무명 후보들의 공약엔 서민들의 고단한 삶을 꺼내든 것이 많다. 그러면서 기성 정치인들의 구태를 질타한다.
택시기사 김용수(47) 씨는 “정치인은 서민의 가슴 아픈 곳을 모른다. 국회의원의 면책특권을 제한하겠다”고 했다. 청소부 민말순(60·여) 씨는 “게을리 일하는 공무원을 청소해버리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안광양(63) 씨는 “서민을 위한 정당이 없다”고, 이나경(41·여) 씨는 “정치가 사회문제의 온상”이라고 일갈한다. 누가 이들의 외침을 깎아내릴 수 있을까?
“유력 정당과 그 후보들의 오만과 부패, 지겨운 소모적 대결과 갈등, 원칙도 없는 이합집산, 국민의 마음을 헤아릴 줄 모르는 행태, 거대 정책뿐인 공약, 무정견한 생각과 비전을 바라보면서 오히려 무명 후보들에게서 청량함을 느끼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런 마이너리티에게 관심을 보여보자.”(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8월13일자 ‘한겨레’ 박원순 칼럼 중)
그렇다면 유력 후보들의 공약은 어떤가. 올 대선은 희한하다. 선거가 석 달 남았는데도 대선구도는 구름 속이다. 눈에 띄는 공약도 많지 않다. 범여권 후보가 아직 정해지지 않아 갑론을박이 이뤄진 공약은 이명박 후보의 한반도 대운하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어렵다.
이 후보는 ‘747(연 7% 성장, 국민소득 4만 달러, 7대 경제대국) 공약’을 내세운다. 지난 대선에선 이회창 후보가 경제성장률 목표치를 6%로 내놓자 노무현 후보가 7%로 올렸다. 노무현 정부 4년간 평균 경제성장률은 4.3%.
정운찬 전 서울대 총장은 최근 한 라디오에 출연해 747 공약에 대해 “정치 슬로건으로는 좋겠지만 달성 못했을 때 낭패감도 생각해야 한다”고 훈수했다. 이렇듯 747 공약은 선언적 측면이 강하다는 지적이 많으나, 이 후보는 성장 드라이브로 달성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문국현 전 유한킴벌리 사장은 ‘동북아 CEO론’을 내세우며 일자리 500만 개 창출, 환황해권·환동해권 벨트 구축, 양극화 해소 및 비정규직 문제 해결을 위한 대타협 추진 등을 내세운다. 이해찬 전 총리는 비핵화와 평화협정을 기반으로 환황해·환동해 경제권을 엮은 한반도 경제론을 내세운다.
이들 공약은 슬로건은 거대하나, 각론은 유권자에게 와닿지 않는 ‘숫자놀음’ ‘구호놀음’이라는 지적을 듣는다. 각 후보들은 경쟁적으로 지역개발 공약도 쏟아놓는다. 부산은 유라시아의 관문이요, 충북은 대운하의 심장이다. 후보들이 내놓은 경제개발특구는 전국을 종횡으로 가른다.
그러나 소문난 책사요 선거전략가인 윤여준 전 의원은 “거대담론의 시대는 갔다”면서 후보들에게 쩨쩨한 공약을 내놓으라고 요구한다.
석 달 남았는데 대결구도 없는 희한한 대선
“3명의 민주노동당 대통령 후보들이 내놓은 민생 공약은 일단 신선하다. 권영길 노회찬 심상정 후보는 베이비박스 의무공급, 가계부 혁명 정책 추진, 여성 큰 옷 제작 판매 의무화 같은 생활밀착형 공약을 내걸었다. 과연 그런 공약들이 실현 가능성이 있는가, 혹은 대통령후보가 그런 쩨쩨한 공약까지 내놓아야 하느냐는 시비가 있다. 하지만 민생에서는 정말이지 이런 ‘쩨쩨한 것’들이 더욱 중요하지 않을까. 민생정치라고 하든, 생활정치라고 하든, 삶의 정치라고 하든 이름이야 뭐라면 어떤가? 이 땅의 서민들은 국민생활의 구석구석을 보살펴주는 정치를 간절히 바라는 것 아닌가? 이런 것이 쩨쩨한 정치라면 제발 이제 쩨쩨한 정치 좀 해달라고 외치고 싶다.
지난 4년간 우리 정치가 소모적인 이념논쟁으로 세월을 보내는 사이 가난만 늘어났다.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대상인 극빈층이 지난해 말 기준으로 14만여 가구, 18만4000여 명이 늘어나 모두 83만1692가구, 153만4950명에 이른다(보건복지부 통계). 빈곤의 확대라는 말이 실감난다. 우리 정치권이 성장이냐 분배냐, 민족이냐 동맹이냐, 과거냐 미래냐 하며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결국 서민만 더 죽어난 셈이다. 어차피 거대담론의 시대는 갔다. 자, 이제 누가 더 쩨쩨한 공약을 내거는지 살펴보자. 누가 진정 더 민생을 챙길 사람인지 따져보자. 그래서 이제부터는 쩨쩨한 사람들이 잘 사는 세상을 꿈꿔보자.”(윤여준의 정치카페 www.yooncafe.com ‘쩨쩨한’ 공약, ‘쩨쩨한’ 정치 중)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권영길 의원과 경쟁했던 심상정 의원의 빅사이즈 제작 의무화는 66사이즈를 넘는 옷은 찾기가 쉽지 않은 세태를 반영한 것이다. 그는 “옷에 몸을 맞추자는 말인가?”라고 되묻는다. 큰 옷 제작을 의무화함으로써 모든 여성이 자신의 체형에 맞는 옷을 골라 입을 권리를 누리게 하겠다는 것.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 지방정부가 청소년과 젊은이들 사이에 번진 폭식증과 거식증을 억제하기 위해 빅사이즈법을 만든 바 있다. 그는 ‘수영장 생리할인제’, 모든 신생아에게 책꾸러미를 선물하는 ‘북스타트(bookstart)’ 공약도 발표했다. 북스타트는 미국의 ‘아기들에게 책을(ROR-Reach Out and Read)’을 일부 벤치마킹한 것이다.
거대담론 시대 가고 쩨쩨한 공약 시대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특전사를 이용한 멧돼지 소탕 공약도 대표적인 쩨쩨한 공약이다. 이 공약은 그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멧돼지를 쫓느라 잠을 못 잔다”는 한 할머니의 호소를 듣고 만든 것이다. 일본 자민당도 최근 멧돼지 소탕을 위해 자위대 출동을 검토하는 법안을 가을 임시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유 전 장관의 멧돼지 공약은 특전사 동지회가 장병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발언이라면서 발끈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대통합민주신당 예비경선 때 김두관 전 행정자치부 장관은 “진해의 ‘깔따구’ 피해를 막기 위해 해군이나 해병대를 투입할 생각이 있느냐”고 유 전 장관을 향해 비아냥댔다. 특정부대를 언급한 건 부적절했다고 밝힌 유 전 장관은 시골 읍면의 목욕탕 없는 지역에 “어르신들을 위한 목욕탕을 건설하겠다”는 등 쩨쩨한 공약을 잇따라 내놓고 있다.
한반도에서 땅 파는 대신 달나라(2025년까지 한국 우주인을 달로 보내는 ‘2025 드림스페이스 프로젝트)로 가겠다면서 꿈 얘기를 꺼내놓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도 자영업자, 소상공인을 위한 카드수수료 50% 인하, 유류세 20% 감면 등을 쩨쩨한 공약(선심성 공약이라는 지적도 받는다)으로 내걸었다. 다른 대선주자들은 쩨쩨해서 눈에 확 들어오는 공약이 아직은 별로 없다.
17대 대선을 달군 이슈는 노무현 당시 후보의 행정수도 이전 공약. 충청표를 의식한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노 대통령의 말대로 ‘재미 좀 봤다’.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선거공학 면에서 당시 노 후보 측의 상상력의 승리였다. 충청민에게 행정수도 건설은 거대담론인 동시에 먹고사는 문제와도 연결된 생활밀착형 공약이었던 것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의 청계천 복원은 상상력의 산물이었다.
요즘 주목받는 정치 지도자는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이다. 그는 폭발적인 에너지로 프랑스를 바꿔나가고 있다. 그는 개인, 기업의 자유를 강조하는 자유주의자면서 때로는 국가 개입을 중시하는 반(反)자유주의자다. 요컨대 이념에 구애받지 않고 국민에게 득이 되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그의 리더십이 지구촌에 가져올 변화가 주목되는 이유다.
그러나 한국 대선은 ‘친북좌파와 보수우파의 대결’(이명박)이라거나 ‘용공세력의 음해’(이해찬)라는 철 지난 이념타령이 넘쳐난다. 후보들이 내놓는 정책의 줄기가 되는 굵직한 담론은 물론 중요하고, 이념적 프로파간다는 선거에서 여전히 유효하지만, 그 속에 유권자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상상력 넘치는 창의적 공약도 넘쳐흘러야 하지 않을까?
“21세기는 상상력의 시대다. 누가 먼저 남들보다 창의적인 생각으로 더 깊이 있고 더 재미있게 상상해서 결실을 만드느냐가 중요하며, 그것이 바로 경쟁력과 연결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