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생명’이라는 ‘선한 대상’ 이 ‘볼모’와 연결되는 순간, 또는 ‘시민의 발’ 이 인질로 잡혔다고 언명되는 순간 그것을 행한 집단은 곧 ‘부도덕하고 악질적’으로 규정되고, 급기야는 ‘죽일 놈’으로 전락한다. 이 레토릭은 이런 점에서 대단히 강력하다. 그러나 이 레토릭은 시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사람들이 왜 어떻게 그런 행위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의료분쟁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며 아직도 이런 지경인지 등등의 본질적 질문을 봉쇄한다.》
파업과 폐업은 사회적 희생을 요구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파업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느끼는 것은 한국의 언론과 방송은 한번도 파업을 감행한 당사자 편을 결코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은 시민들도 마찬가지이다. 왜 그럴까
프랑스와 독일사람들은 이런 일이 발생하면 일단 파업당사자들의 사정을 이해하려 한다. 파업집단의 논리가 혹시 뜻하지 않게 설득력을 얻는다면 그것은 전국적 쟁점으로 번져 일파만파의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파일럿이 파업하면 기차를 타고, 기관사가 파업하면 자동차를 타고, 택시기사가 파업하면 자전거를 탄다. ‘오죽하면 그러하랴‘는 마음과 ‘우리도 언젠가 그들처럼 될는지도 모른다‘는 임금생활자로서의 동규의식이 강한 탓일 것이다.
그런데, 의사라고 다를 바 없다. 의사는 이른바 ‘사‘ 자로 끝나는 전문직종의 대표적으로 고소득과 높은 지위를 동시에 누려왔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의사집단에 대한 일반인의 눈초리는 그다지 곱지 않은 것으로 변모하였다. 의사와 병원에 지불하는 비용에 비하여 의료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다거나, 의사들의 행위가 이기적이어서 높은 지위를 누릴 자격을 상실했다는 부정적 평가가 누적된 탓이리라. 뾰족한 수가 없는 정부도 시민들의 이런 심정이 여론을 일으켜 의료 대란을 조기에 종결해줄 것을 은근히 기대했던 모양이다. 그래서인지 정부, 언론, 방송 할 것 없이 의사파업을 비난하는 원색적 용어들을 경쟁적으로 동원했으며, 여기에 의료분쟁의 해결사로 자처해온 경실련과 YMCA시민연대도 가세하여 의사들을 코너에 몰아세웠다. 그래서 의료대란은 ”생명을 볼모로 한 폐업” 으로 낙인찍혔다.
파업이 있을 때마다 마치 도끼날처럼 내리찍는 듯한 이 레토릭은 과연 현상의 본질을 옳게 담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현상을 왜곡하는 것인가. 생명을 다루는 집단이 생명을 볼모로 하지 않으면 정부와 대면하여 어떤 교섭력이 있을까.
교육자는 교육을, 연예인은 연기를, 방송인은 방송을, 전력공사는 에너지를 각각 볼모로 직업집단의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논리다.
그런데 ‘생명‘이라는 ‘선한 대상‘ 이 ‘볼모‘ 와 연결되는 순간, 또는 ‘시민의 발‘이 인질로 잡혔다고 언명되는 순간 그것을 행한 집단은 곧 ‘부도덕하고 악질적‘으로 규정되고, 급기야는 ‘죽일 놈‘으로 전락한다. 그 말 뒤에 ‘좌시하지 않겠다.‘거나 ‘용납할 수 없다‘는 서술어가 붙기도 전에 벌써 시민들은 정의감에 불타고 언론과 방송사는 시민들의 그 일방적 정의감을 부추기기에 나선다. 이 레토릭은 시민들의 건강을 지켜온 사람들이 왜, 어떻게 그런 행위를 선택하게 되었는지, 의료분쟁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지속되었으며 아직도 이런 지경인지 등등의 본질적 질문을 봉쇄한다
그것은 생명을 지켜온 사람들을 집단적으로 매도하기에 폭력이며, 우리들의 건강만을 소중하게 생각하기에 이기적 인식에 불과하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 그들의 주장은 묵살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역으로 시민 개개인들에게 적용되는 또다른 사태가 발생한다면, 시민들은 묵묵히 그 논리를 받아들일 것인가. 파업이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지만, 한국사회에서 파업을 규탄하는 대부분의 레토릭은 이렇게 폭력의 칼날을 숨겨 왔다. 본질을 호도하는 이런 레토릭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모든 분쟁 해결의 첫 단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