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에 대한 워싱턴의 기본 시각은 겉으로는 ‘환영’이지만 그 속내는 경제제재를 차츰 낮추며 반응을 살피는 것이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남북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운전석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됐다.’
평양에서 연출된 남북한 정상 양 김씨의 건배와 포옹 장면을 지켜본 미국의 한 정보 분석기관이 내놓은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이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북한이 남한을 공식적인 협상 파트너로 인정한 이상 서울은 이제부터 독자적으로 북한과 협상을 벌이게 될 것이니 워싱턴은 뒤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워싱턴은 지금 신중하다. 또한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보인 반응이 ‘기다리자, 지켜보자’는 것이었다면, 정상회담 개최 후 분위기는 아예 침묵이라 할 만큼 관망으로 일관하고 있다. 백악관과 국무부가 보인 반응이라고는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의 공이 크다”는 외교적 수사 외에는 “환영한다”는 말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황원탁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이 뉴욕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했을 때 역시 미국의 반응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국방부인 펜타곤의 목소리는 고함에 가깝다. 때와 장소가 다르고 표현이 다를 뿐 남북정상회담 이후 펜타곤의 전-현직 관리들이 나서서 쏟아내는 말들은 여전히 북한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하다. 한 마디로 아직 북한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되며 주한미군 철수나 국가 미사일 방어망 계획 추진 연기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한 현직 고위 관리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남북정상회담의 거품”이라면서 “안보적인 측면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국방부 출신 관료로 지금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조지 W. 부시의 선거 참모로 일하고 있는 도브 자크하임은 “북한은 미사일 개발 계획을 포기하는 등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북한이 그렇게 되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면서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다.
역시 국방부 출신으로 공화당 하원 정책위원회 위원인 척 다운스도 6월21일 헤리티지 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남북한 합의 사항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코언 국방장관이 처음 펜타곤에 들어갔을 때 국방부 고위 관료들에게 꺼낸 첫마디는 “일반인들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경우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이 가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군부가 굳이 제 목소리를 감추고 있지 않는 반면, 의회를 주도하고 있는 공화당 보수파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경제 제재 완화에 대한 불만, 남북정상회담 성사 과정에 깊숙이 관련돼 한반도 문제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중국에 대한 경계심 등이 이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든, 공화당의 입김이 센 의회든 입을 다물고 있는 미국은 당분간 쉽게 입을 열 입장이 아니다. 우선, 북한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북한의 향후 움직임에 달려 있다. CIA를 비롯한 미 정보계는 북한의 전면적인 개방 가능성을 꽤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CIA 조지 테넷 국장은 지난 3월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자리에서 북한은 개방이 내부 통제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전반적인 체제 유지 전략에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를 들어 북한의 전면적인 개방 가능성을 일축했다.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미국의 발걸음을 신중하게 만들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이라크 쿠바 북한문제 등에 마지막 외교 승부수를 걸고 박차를 가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진행중인 탓에 최소한 향후 5, 6개월 동안은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한발 물러나 사태 추이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이러한 국내 상황을 북한도 모르는 바 아니다. 경제지원이라는 당면 과제를 풀기에는 상황이 불투명한 미국보다는 한국을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게 북한의 판단이었다.
미국이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남북정상회담이 가져온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는 눈길은 날카롭다. 가장 먼저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곳은 역시 군사 분야다. 6월21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남북정상회담이 미 군부의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실었다. 국방 문제 전문가들과 안보 분석가들 사이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으리라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헤리티지 재단의 래리 워츨 연구원은 “아시아 주둔 미군에 대해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이 향후 10년간은 더 주둔할 것 같으나 주둔군의 형태와 배치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국방문제 전문가인 마이클 오핸론은 한반도를 비롯한 미국의 대 아시아 군사정책이 재검토될 경우 “육군의 10개 사단이 7개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방미 예정 등 동북아 정세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중심 축 역할을 했던 베이징과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도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미국의 발빠른 대응책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급격한 정세 변화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의 큰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국무부의 동아태 담당 차관보 스탠리 로스는 지난 3월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타이 방콕에 들러 가진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다.
“북한 문제를 다루면서 일해 온 지난 20년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흥미로운 때다. 정확한 시간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지난해에 우리는 북한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를 목격했다. 이른바 은둔국은 더 이상 은둔국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변신을 자신 있게 예고한 스탠리 로스 차관보의 이 발언은 북한의 변화 가능성 여부로 의견이 분분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더욱이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뚜렷하게 감지되지 않아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스탠리 로스의 이 발언이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미 국무부가 북한의 변화를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미국은 한-미-일의 3각 협조체제(TCOG)와 4자회담을 이끌어가고 있다. 전자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경제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후자는 안보와 외교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북미 고위급 회담의 진전 여하에 따라 TCOG와 4자회담의 성격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대북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완화시키면서 북한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그러나 미사일, 핵 확산 등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으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이며 북한으로서도 쉽게 포기하기 힘든 것인 만큼 북미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여전히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
‘미국은 이제 더 이상 남북관계를 좌지우지하는 운전석에 앉아 있을 수 없게 됐다.’
평양에서 연출된 남북한 정상 양 김씨의 건배와 포옹 장면을 지켜본 미국의 한 정보 분석기관이 내놓은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이 보고서에는 이런 내용도 있다.
‘북한이 남한을 공식적인 협상 파트너로 인정한 이상 서울은 이제부터 독자적으로 북한과 협상을 벌이게 될 것이니 워싱턴은 뒤따라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 되었다.’
워싱턴은 지금 신중하다. 또한 말을 아끼고 있다. 지난 4월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는 발표가 있었을 때 보인 반응이 ‘기다리자, 지켜보자’는 것이었다면, 정상회담 개최 후 분위기는 아예 침묵이라 할 만큼 관망으로 일관하고 있다. 백악관과 국무부가 보인 반응이라고는 “김대중대통령의 햇볕정책의 공이 크다”는 외교적 수사 외에는 “환영한다”는 말 한 마디가 고작이었다. 황원탁 대통령 외교안보 수석이 뉴욕에서 클린턴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 결과를 설명했을 때 역시 미국의 반응은 ‘근본적으로 변한 것은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비하면 국방부인 펜타곤의 목소리는 고함에 가깝다. 때와 장소가 다르고 표현이 다를 뿐 남북정상회담 이후 펜타곤의 전-현직 관리들이 나서서 쏟아내는 말들은 여전히 북한에 대한 의구심으로 가득하다. 한 마디로 아직 북한을 믿을 수 없고 믿어서도 안되며 주한미군 철수나 국가 미사일 방어망 계획 추진 연기는 불가하다는 것이다.
국방부의 한 현직 고위 관리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남북정상회담의 거품”이라면서 “안보적인 측면에는 전혀 변화가 없다”고 말한다. 국방부 출신 관료로 지금은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조지 W. 부시의 선거 참모로 일하고 있는 도브 자크하임은 “북한은 미사일 개발 계획을 포기하는 등 실질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 북한이 그렇게 되려면 수십 년이 걸릴 것”이라면서 경계의 눈초리를 풀지 않는다.
역시 국방부 출신으로 공화당 하원 정책위원회 위원인 척 다운스도 6월21일 헤리티지 재단이 주최한 세미나에서 남북한 합의 사항에 대한 불신을 토로했다. 코언 국방장관이 처음 펜타곤에 들어갔을 때 국방부 고위 관료들에게 꺼낸 첫마디는 “일반인들은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될 경우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고 가정하고 있는데 이 가정을 어떻게 바꿀 것인지가 문제”라는 것이었다.
군부가 굳이 제 목소리를 감추고 있지 않는 반면, 의회를 주도하고 있는 공화당 보수파는 거의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 경제 제재 완화에 대한 불만, 남북정상회담 성사 과정에 깊숙이 관련돼 한반도 문제에서 보다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중국에 대한 경계심 등이 이들을 침묵하게 만드는 요인들이다.
민주당의 클린턴 행정부든, 공화당의 입김이 센 의회든 입을 다물고 있는 미국은 당분간 쉽게 입을 열 입장이 아니다. 우선, 북한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할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북한의 향후 움직임에 달려 있다. CIA를 비롯한 미 정보계는 북한의 전면적인 개방 가능성을 꽤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CIA 조지 테넷 국장은 지난 3월 상원 외교관계위원회에 출석해 증언하는 자리에서 북한은 개방이 내부 통제에 위협이 된다는 인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고 전반적인 체제 유지 전략에 모순이 내재되어 있다는 두 가지 결정적인 이유를 들어 북한의 전면적인 개방 가능성을 일축했다.
미국의 국내 정치 상황도 미국의 발걸음을 신중하게 만들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가 이라크 쿠바 북한문제 등에 마지막 외교 승부수를 걸고 박차를 가하지만 대통령 선거가 진행중인 탓에 최소한 향후 5, 6개월 동안은 한반도 문제에 관한 한 한발 물러나 사태 추이를 주시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이러한 국내 상황을 북한도 모르는 바 아니다. 경제지원이라는 당면 과제를 풀기에는 상황이 불투명한 미국보다는 한국을 상대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게 북한의 판단이었다.
미국이 말을 아끼고는 있지만 남북정상회담이 가져온 한반도 및 동북아 정세의 변화를 주시하는 눈길은 날카롭다. 가장 먼저 변화의 조짐이 보이는 곳은 역시 군사 분야다. 6월21일자 워싱턴 포스트는 남북정상회담이 미 군부의 변화를 유도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내용의 분석 기사를 실었다. 국방 문제 전문가들과 안보 분석가들 사이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커다란 변화가 있으리라는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헤리티지 재단의 래리 워츨 연구원은 “아시아 주둔 미군에 대해 재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주한 미군과 주일 미군이 향후 10년간은 더 주둔할 것 같으나 주둔군의 형태와 배치는 크게 달라질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국방문제 전문가인 마이클 오핸론은 한반도를 비롯한 미국의 대 아시아 군사정책이 재검토될 경우 “육군의 10개 사단이 7개로 줄어들게 될 것”이라는 분석을 내놓았다.
미국의 동북아 정책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베이징 방문,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평양 방문,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의장의 방미 예정 등 동북아 정세는 급물살을 타고 있다.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중심 축 역할을 했던 베이징과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도 급변하는 동북아 정세에 대한 미국의 발빠른 대응책을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남북한의 급격한 정세 변화가 미국의 대 한반도 정책의 큰 틀에서 벗어나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국무부의 동아태 담당 차관보 스탠리 로스는 지난 3월 중국을 다녀오는 길에 타이 방콕에 들러 가진 기자회견에서 의미심장한 말을 한 바 있다.
“북한 문제를 다루면서 일해 온 지난 20년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흥미로운 때다. 정확한 시간을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지난해에 우리는 북한의 실질적인 태도 변화를 목격했다. 이른바 은둔국은 더 이상 은둔국이 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 분명하다.”
북한의 변신을 자신 있게 예고한 스탠리 로스 차관보의 이 발언은 북한의 변화 가능성 여부로 의견이 분분했던 당시 상황에서는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었다. 더욱이 이른바 페리 프로세스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뚜렷하게 감지되지 않아 북한의 변화 가능성에 대한 의구심이 증폭되고 있던 때이기도 했다. 스탠리 로스의 이 발언이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할지는 아직 미지수이나 미 국무부가 북한의 변화를 ‘분명히’ 감지하고 있었다는 것만은 틀림없다.
미국은 한-미-일의 3각 협조체제(TCOG)와 4자회담을 이끌어가고 있다. 전자가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경제적인 측면에 무게를 두고 있다면 후자는 안보와 외교라는 민감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하지만 북미 고위급 회담의 진전 여하에 따라 TCOG와 4자회담의 성격이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클린턴 행정부는 제한적이긴 하지만 대북 경제제재를 단계적으로 완화시키면서 북한의 반응을 살피고 있다. 그러나 미사일, 핵 확산 등 안보 관련 문제에 대해서는 양보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미국으로서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이며 북한으로서도 쉽게 포기하기 힘든 것인 만큼 북미 고위급 회담이 성사되더라도 여전히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