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특보 자격으로 김대중대통령을 수행한 임동원원장은 6월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주최한 오찬석상에서 건배를 제안하면서 ‘답사’의 말미를 이렇게 끝맺음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님, 이번 방문기간 중 무엇보다도 큰 소득은 남과 북의 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두 정상이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신뢰감을 더욱 두텁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두 정상의 인간적 신뢰를 바탕으로 남북관계를 힘차게 열어나가야 할 때입니다…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는 적절한 시기에 꼭 서울에 오셔서 우리의 답례를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임동원원장은 6공화국 시절인 90년대 초반 탈냉전의 흐름을 타고 진행된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남측 대표로 참여했던 인물이다. 그는 이때 북한을 네 차례 다녀왔고, 그의 대북접촉 횟수는 70회 이상이나 된다. 그런 그가 이번 정상회담의 가장 큰 소득이 ‘두 정상의 인간적 이해와 두터운 신뢰감’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순한 수사나 인사치레가 아니었다.
앞서의 의문에 대한 국정원 K연구위원의 해답도 이와 다르지 않다. K연구위원 역시 수십 년 동안 남북대화사무국 판문점 연락관으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북한측 ‘대화 일꾼’들과 접촉한 ‘남북대화의 산증인’이다.
“대통령께서 방북에 앞서 ‘민족을 사랑하는 뜨거운 가슴과 현실을 직시하는 차분한 머리를 가지고 방북길에 오른다’고 피력했지만 남북한의 ‘잠정적 특수관계’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북에 가서 현실을 살펴보고 직시해서 ‘가슴에 담아온 것’이 가장 중요한 성과다. 또 대통령은 북한에 다녀와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서로 하고 싶고 듣고 싶은 얘기를 다 했다고 밝혔지만, 남북정상끼리 직접 그런 속내를 드러내고 깊은 얘기를 나눈 가운데 신뢰감을 쌓은 것이 가장 중요하다. 공동선언은 앞으로 실천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교착상황을 낳을 것이다. 그러나 교착이 되더라도 이제는 두 정상이 물꼬를 틀 수 있는 ‘핫라인’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과거의 남북 공동성명이나 합의문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렇다면 2박3일간의 짧은 방북일정에서 두 정상은 무엇을 계기로 ‘인간적 이해와 두터운 신뢰감’을 쌓은 것일까. 또 김대통령이 ‘가슴에 담아온 것’은 무엇일까.
국정원의 내로라하는 대북 전문가들이든 김대통령을 옆에서 지켜본 수행원들이든,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은 ‘미국제 링컨컨티넨털 리무진 승용차 안에서 나눈 밀담’에 담겨 있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두 사람은 순안비행장에서 백화원 영빈관으로 가는 50분 동안 리무진 안에서 무슨 대화를 나누었을까. 현재까지 ‘차안 대화’ 내용은 일절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대화 내용이 김대통령이 ‘가슴에 담아온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김대통령이 황원탁 외교안보수석을 대통령특사로 파견해 미 클린턴 대통령과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에게 정상회담의 결과를 충분히 설명했음에도 올브라이트 장관이 한국에 들러 김대통령을 직접 면담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차중 대화 내용을 적시해 올브라이트 장관에게 설명해준 징후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지만 방북 이후 일련의 방북보고 과정에서 공개된 김대통령과 수행원들, 그리고 국정원 관계자들의 발언을 면밀히 분석해보면 리무진 밀담의 실마리는 어느 정도 드러난다.
우선 김대통령이 6월15일 서울공항에 도착해서 한 대국민보고에서 정상회담 결과를 상세히 설명하는 가운데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방문을 합의하는데 좀 힘이 들었다”면서 “그러나 결국 김정일 위원장은 우리하고 합의된 시일 중에 택해서 서울을 방문하겠다고 결심했다”고 밝혔다. 이는 두 정상간에 서울 방문날짜를 합의했다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김대통령은 또 “그 외에 여러 가지 좋은 일들이 많이 있지만, 그러나 오늘은 적당한 시간이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줄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여운은 오래 가지 않았다.
김대통령은 6월17일 한나라당 이회창총재와의 회담에서 임동원원장과 박재규 통일부 장관까지 배석시킨 가운데 상세한 브리핑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6월19일 청와대에서 개최한 언론사 사장단 초청 만찬 자리에서도 역시 임동원원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비보도를 전제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하반기에 노동당 대회를 열어 노동당 규약을 고칠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고 밝혔다. 이어 6월20일 국무회의에서 교황의 방북 초청 사실과 상호비방 중지, 임진강 홍수 피해 공동대응, 철도 연결 등 정상회담 이후 바로 이어질 실천적 조처들을 밝혔다. 두 정상의 ‘가슴에는 담겨’ 있지만 공동선언문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김대통령은 ‘가슴에 담아온 것’을 한꺼번에 풀어놓지 않고 조심스럽게 조금씩 풀어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런 방법을 택했을까.
언론에 그 내용이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하면 방북 결과와 관련해 가장 심도 있는 논의가 오간 자리는 6월22일 국회 정보위원회 회의였다. 이날 정보위원회는 오후 3시부터 9시까지 6시간 동안이나 열렸다. ‘국정원 업무현황’과 ‘남북정상회담 결과’ 보고, 그리고 정보위원들의 질의-응답 순으로 진행된 이날 정보위에서 위원들은 무려 100가지가 넘는 질문을 했다. 이날 정보위에서 나온 질의-응답 중에서 주목할 만한 대목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우선 세간의 관심을 증폭시킨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공항 영접 사실을 우리측이 사전에 알았느냐는 대목에 대해서 임원장은 “몰랐지만 예상은 했다”는 애매모호하지만 의미심장한 표현으로 답변을 대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 말은 북측이 공식으로 공항 영접 사실을 알려주지는 않았지만 우리측 관계자들에게 언질은 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국정원은 “김정일 위원장은 북한이 전쟁을 하면 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서 “이번 방북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요지의 보고를 한 것으로 전해진다. 또 국정원은 정보위 보고에서 ‘이번 회담은 북한의 필요에 의해 우리측 제의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규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남북관계는 기본합의서에서 남북이 합의한 대로 ‘잠정적 특수관계’인 만큼 서로 이기는 윈-윈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철학이고, 그런 통치철학을 뒷받침하는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고 지원했다는 논리를 전개했다는 것.
국정원은 또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선언을 6·15 공동선언문에 포함하지 않은 이유를 추궁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이미 남북한이 합의한 내용을 공동선언의 기저에 깔고 북측과 합의한 것이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김명섭 정보위원장은, 공동선언에서 민족문제를 자주적으로 해결하자고 표현한 것과 관련해서 “여기서 말한 자주란 외세배격하의 자주가 아니라 주변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필요하면 이들의 협조와 지원을 받으면서 민족문제를 당사자 스스로 해결해 나간다는 의미의 ‘열린 자주’임을 두 정상이 이해했고, 김정일 위원장도 수긍했다”고 임원장이 답변했다고 밝혔다. 두 정상이 ‘자주’라는 표현을 ‘열린 자주’라는 의미로 이해한 대목이 이채롭다.
미국측이 가장 궁금해하는 리무진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뜻밖에도 정보위 회의에서 물어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임원장도 “두 분의 대화 내용은 대통령께서 얘기해 주지 않아 모른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누구보다도 신임하는 국정원장에게조차 ‘차중 대화’ 내용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 대목이다. 결국 공개하지 못할 뭔가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시기에 대해서도 한 정보위원은 “내가 그렇게 머리 좋은 사람이 아니다”는 식으로 말해 묘한 여운을 남겼다.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김대통령은 6월14일 목란관 만찬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께서 김일성 주석이 서거한 이래 우리 민족 전래의 윤리에 따라 3년상을 치른 그 지극한 효성에 감동했습니다’고 예민한 조문 문제를 기술적으로 처리하고 넘어가는 슬기를 보였다”고 강조했다. 이 관계자는 그에 비춰 두 정상이 차안에서 맨먼저 나눈 대화는 김주석에 대한 조문 및 위로와 김위원장이 김주석 사후 ‘고난의 행군’을 해온 노고에 대한 치하가 아니겠느냐고 유추했다. 반면에 김위원장은 김대통령의 파란만장한 정치역정에 존경심을 표했다는 전언이다. 또 공개적인 자리에서 김대통령이 이 정도의 조문을 한 것에 비춰 차안에서는 훨씬 더 심심한 조의를 표했을 것이고, 그 대목에서부터 화해와 신뢰의 물꼬가 터졌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편 청와대 공동기자단의 일원으로 정상회담을 취재하고 온 한 기자는 “DJ(김대통령)는 역시 정치 9단이었다”며 “일반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대통령은 차안에서 하고 싶었던 말을 다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이 기자의 전문에 따르면, 김대통령은 햇볕정책의 진의를 몰라주고 북측이 잠수함을 보낸데 대한 서운한 감정까지 토로했고 이에 질세라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99년 6월 서해교전의 예를 들며 서운함을 표출했다는 것이다.
정보위에서는 좀더 진전된 힌트가 나왔다. 정보위 참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얘기는 “국정원장은 주한미군 문제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너무 민감한 내용이어서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야당의 입’인 정형근의원도 “국정원은 주한미군 존재 전반에 걸쳐 소상히 답변했다. 그러나 공개하기에는 너무 민감한 문제다”고 말했다. 다만 한 참석자는 “공개할 경우 북한과 미국 모두에 민감한 문제”라고 토를 달았다. 북한과 미국 모두에 민감한 문제란 과연 무엇일까.
리무진 대화를 포함해 두 김씨가 단독회담을 한 시간은 총 9시간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두 김씨의 단독회담 내용 중에서 미국측이 가장 민감해하는 대목은 주한미군 문제다. 주한미군 문제의 해법으로는 철수와 감군, 그리고 지위 변경 등을 고려할 수 있다.
6·25 50주년 기념사에서 김대통령은 ‘가슴에 담아온 것’을 또 하나 풀어놓았다. 남북 군사공동위 제안이 그것이다. 두 정상은 평양회담에서 이미 전쟁 방지에 대한 합의를 이뤄놓은 상태다. 따라서 김대통령의 제안은 두 정상간 약속 이행에 상당한 교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남북 군사공동위가 가동하면 북한과 유엔사 사이의 판문점 장성급 회담을 통해 처리해 온 남북간 군사문제는 ‘당사자간 논의’로 바뀔 전망이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군사공동위를 통한 군사 신뢰구축의 구체적 성과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때 ‘서울 공동선언’의 형태로 드러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것은 주한미군 지위 변경 논의를 의미한다. 미국이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민감한 문제’다. 김대통령은 지난해 이미 주한미군 지위변경 논의도 가능하다는 발언을 했다가 거두어들인 바 있다. 이같은 예상이 정확하다면 김대통령은 현재 ‘차중 대화 내용’을 함구하면서 김위원장의 서울 답방 분위기가 무르익을 때까지 ‘시간 벌기’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김위원장과의 신뢰를 바탕으로 ‘가슴에 담아온 것’을 조금씩 풀어 가는 김대통령의 우보(牛步)는 바로 이런 계산에서 나온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