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1월 전 세계의 관심이 베이징 인민대회당(이 자리에서 후진타오가 중국 공산당 신임 총서기로 선출됐다)에 쏠렸을 무렵 칭화(淸華)대에서는 괴소문이 돌았다. 당 대회 첫날 중국의 차세대 지도자로 내정된 후진타오가 장쩌민 일파에 의해 유폐되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후진타오의 정치적 고향임을 자처하는 칭화대 학생들은 한동안 울분에 휩싸였다.
중국 최고의 엘리트로 자부하는 칭화대생들은 덩샤오핑(鄧小平)에 의해 일찌감치 차세대 지도자로 낙점된 후진타오가 장쩌민 치하에서 굴신에 가까운 행보를 해온 것에 자존심이 상한 상태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낙마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용납하기 어려웠다. 소문은 해프닝으로 끝났으나 당대회 결과는 낙마라는 최악의 상황을 면했을 뿐이었다. 장쩌민은 총서기 자리만 내놓았을 뿐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직은 물론이고 국가주석직의 퇴진도 다음 인민대표자대회로 미루어버렸다.
칭화대·공청단이 든든한 후원자
뿐만 아니라 2명이 증원된 정치국 상무위원회 역시 우방궈(吳邦國) 부총리, 자칭린(賈慶林) 전 베이징시 서기, 쩡칭훙(曾慶紅) 전 당 조직부장, 황쥐(黃菊) 전 상하이시 서기 등 5명의 장쩌민 측근들이 과반수를 차지함으로써 후진타오의 입지는 그만큼 좁아졌다. 6명이 교체된 정치국 위원에도 류치(劉淇) 베이징시 서기 등 장쩌민의 심복 3명이 새로 진입했다. 21명의 정치국원 중 절반 가량이 장쩌민의 사람들로 채워진 셈이다. 이에 반해 후진타오 계열은 왕자오궈(王兆國)를 제외하면 찾아보기 힘들 정도. 장쩌민은 정치국 상무위원 및 정치국원에 측근들을 대거 진출시켜 실리적인 이익을 취했음은 물론이고, 당헌에 자신이 주창한 ‘3개 대표’ 이론을 추가함으로써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을 잇는 지도자라는 명분도 움켜쥐었다.
특히 주목해야 할 점은 장쩌민이 자신의 심복인 쩡칭훙을 정치국 상무위원에 진출시킴으로써 퇴임 후에도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본 통로를 마련했다는 것이다. 덩샤오핑이 자신에게 그랬듯이, 장쩌민은 후진타오의 후견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선 것이다.
하지만 곧 후진타오의 반격이 시작됐다. 후진타오는 자신이 중국 공산당 총서기로서 처음 개최한 정치국 회의에서 “구시대 이념에서 과감히 탈피, 시장경제 관리능력을 높이고 개혁·개방을 가속화하는 데 총력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으로 사상투쟁의 포문을 열었다. 또 지난해 11월26일 총서기 취임 후 접견한 첫 외국 정상인 타르야 할로넨 핀란드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과제 중 하나는 모든 수준에서 민주주의를 강화하는 일”이라고 언급함으로써 사상투쟁을 전면화했다.
장쩌민이 과거 자신의 취약한 입지를 돌파하기 위해 ‘반(反)부패’를 내세웠듯이, 후진타오도 ‘민주주의’를 내세워 자신의 반대파들을 견제하며 은밀히 세 불리기에 들어갔다. 그 결과 후진타오의 정치적 후원그룹인 공산주의청년단 계열 간부들이 지방 성장(省長)급 고위 간부직에 잇따라 진출했다. 특히 공청단 계열인 멍쉐눙(孟學農)이 수도 베이징의 시장으로 선출된 것과, 2월20일 역시 공청단 계열인 한정(韓正) 상하이 부시장이 상하이 역사상 최연소 시장에 당선된 것은 주목할 만한 정치적 승리다.
이후 후진타오에 대한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먼저 후진타오 측근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베이징 시장에 선출된 멍쉐눙은 기자회견을 통해 자신의 공청단 경력을 공개적으로 자랑하며 공청단 서기 시절의 후진타오에 대해 “공정하고 정의로우며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지 않은 지도자”라고 극찬했다.
이는 1980년대 후야오방(胡耀邦)의 몰락 이후 공청단 멤버들이 정치적 의사 표현을 자제해온 것에 비추어 매우 이례적인 발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 전문가는 “후진타오의 역할에 따라 퇀파이(團派·공청단 출신)가 더욱 활발히 움직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후진타오의 행보에 힘을 실어주고 있는 것은 공청단과 칭화대다. 공청단이 후진타오의 정치적 전위부대라면 칭화대는 후진타오의 정신적 고향이다. 이는 작년 부시의 중국 방문시 공식적인 면담 일정이 잡히지 않았던 후진타오가 칭화대 안내를 명분으로 만난 것에서도 잘 나타난다. 주룽지(朱鎔基) 총리와 후진타오를 배출한 칭화대는 중국 고등교육 평가 등 교육 관련 매체에 의해 7년 연속 중국 최고의 명문대로 꼽힐 만큼 명실상부한 중국 최고의 대학이다. 특히 경제발전 과정에서 이공계 출신의 사회적 진출이 광범위해지는 중국의 상황은 칭화대의 급속한 성장을 가능케 했다. 이런 명성을 반영하듯 중국의 최고 지도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상무위원 9명 가운데 4명이 이 대학 출신이다. 칭화대는 장기적으로 후진타오에게 비상의 날개를 달아줄 기반이 되고 있다. 하지만 장쩌민 계열 역시 후진타오의 공격을 가만히 당하고 있을 만큼 허약하지 않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세 불리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다. 특히 장쩌민의 분신과도 같은 쩡칭훙을 중심으로 한 태자당(중국 혁명 원로들의 자제들을 일컫는 말)의 약진은 후진타오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장쩌민과 후진타오 간 정치투쟁이 일단락되는 중요한 회의가 2월26일 폐막된 제16기 중앙위 제2차 전체회의(16기 2중전회)였다. 이 회의에서 중국 공산당은 장쩌민 국가주석의 후견 아래 후진타오 당총서기를 정점으로 하는 국가지도체제를 최종 결정했다. 또 차기 지도부는 쩡칭훙 부주석, 원자바오 총리, 우방궈 전인대상무위원장 체제를 갖췄다. 정협 주석에는 자칭린 정치국 상무위원이 오를 것으로 확정됐다. 이 회의는 사실상 장쩌민계의 우위가 지속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쩡칭훙의 부주석 취임은 이후 권력 향배에서 중요한 변수가 되고 있다.
하지만 이 회의에서 장쩌민 계열이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제3차 정부 조직개편 작업이 당초 계획에 비해 규모가 크게 축소돼 그 배경에 의혹이 일고 있다. 이를 장쩌민과 후진타오의 권력투쟁과 직접 연결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지금 중국의 권력 흐름이 일방적이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후진타오에게는 과거의 장쩌민이 그랬듯이 시대가 요구하는 사상적 우위라는 명분이 있다. 그는 적어도 장쩌민 계열의 사람들보다는 개방적이고 민주적이며 온화하다는 평을 받고 있다. 이것은 중국 외의 시각일 뿐 아니라 중국 인민들의 시각이기도 하다. 그는 지금 조심스러운 행보를 계속하고 있다. 장쩌민의 ‘3개 대표’를 강조하면서도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 특유의 시각을 앞세우며 ‘인민 속으로’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친민노선(親民路線)’을 강조하는 것으로 자신의 정적들에 대한 칼날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3월5일 출범한 후진타오 총서기-국가주석 체제는 후견인을 자처한 장쩌민의 잔영들과의 싸움을 어떻게 벌여 나가느냐에 따라 그 앞날이 결정될 것이다. 굴신의 달인이라 불리는 그에게 굴신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