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위대한 여름이었다
노래방에서
모르는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다 들은
모르는 노래
반주가 끝나고도 한 번 더
불렸다
우리 방에 들어와
한 번 불러보았으나
(오래전에 들은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는 노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노래냐고 물었지만
나도 모르는 노래
모르는 여자가
혼자 부르던 노래
노래방에서
모르는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
반주도 없이
심심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부르던
(언제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모르는 여자의 노래
(나하에서 온나로 가는
류쿠의 버스 안에서도 들었던)
정말 위대한 여름이었다
(운다)
― 함성호 ‘키르티무카’(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그날 밤 들려온 모르는 여자 노래
학창 시절 통영에 간 적이 있다. 이름부터가 낯선 곳이었다. 영혼을 실은 통통배가 사방에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 같았다. 공식 일정이 다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도시 구석구석을 배회하고 싶었다. 왠지 앞으로 다시는 통영에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동시에 몹시 절박해졌다.
통영의 밤은 맵싸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짭조름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내는 발자국 소리는 꼭 한 박자씩 늦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발길이 닿는 곳마다 길이 나 있었다. 보물찾기 시간에 끝까지 보물을 찾지 못한 아이처럼, 나는 필사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나는 동네 산책을 하는 짐짓 여유로운 아이가 돼 있었다. 보물은 찾지 못해도 좋았다. 이 현장에 있는 모든 것이 살갑게 느껴졌다. 이 벤치는 몹시 낯익었다. 저 바위는 분명 내가 매일 걸터앉는 그 바위였다. 저기 저 가로등의 불빛도 너무나 선명했다. 이 마을은 내가 어릴 적 뛰놀던 바로 그 동네인 듯싶었다. 나는 기시감에 도취돼 한껏 흐느적거렸다. “언제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섣불리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이 풍경이 죄다 사라질 것 같았다.
가로등 옆에서 “모르는 여자”가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만 부르는 노래 같았다. 엉겁결에 나는 이중으로 모르는 상태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필시 모르는 노래임에 틀림없는데, 분명코 귀에 익었다. 노래의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았던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고 있었다. “정말 위대한” 겨울을 스쳐 지나가는, 정말 위태로운 영혼이었다. “왠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게 분명한 날이었다.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날이었다.
가없이 절박해져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을 때, 으레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날이었다.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내 심정처럼, 완벽히 해독할 수 없는 네 속마음처럼,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끝을 몰랐기에, 나아갈 방향을 몰랐기에 걷고 또 걸었다. 그럼에도 보물이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을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만 같아서, 꺼이꺼이 기꺼이 “운다”. 한바탕 울음이 ‘끝나고도 한 번 더’ 운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
노래방에서
모르는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
화장실에 갔다 오다 들은
모르는 노래
반주가 끝나고도 한 번 더
불렸다
우리 방에 들어와
한 번 불러보았으나
(오래전에 들은 것 같았지만)
왠지
모르는 노래
사람들은 그게
무슨 노래냐고 물었지만
나도 모르는 노래
모르는 여자가
혼자 부르던 노래
노래방에서
모르는 여자의 노래를 들었다
반주도 없이
심심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부르던
(언제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모르는 여자의 노래
(나하에서 온나로 가는
류쿠의 버스 안에서도 들었던)
정말 위대한 여름이었다
(운다)
― 함성호 ‘키르티무카’(문학과지성사, 2011)에서
그날 밤 들려온 모르는 여자 노래
학창 시절 통영에 간 적이 있다. 이름부터가 낯선 곳이었다. 영혼을 실은 통통배가 사방에 둥둥 떠다니고 있을 것 같았다. 공식 일정이 다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도시 구석구석을 배회하고 싶었다. 왠지 앞으로 다시는 통영에 오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문득, 동시에 몹시 절박해졌다.
통영의 밤은 맵싸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짭조름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최대한 몸을 움츠리고 하염없이 걷기 시작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내는 발자국 소리는 꼭 한 박자씩 늦었다. 뒤에서 누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다행히 발길이 닿는 곳마다 길이 나 있었다. 보물찾기 시간에 끝까지 보물을 찾지 못한 아이처럼, 나는 필사적으로 걷고 또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덧 나는 동네 산책을 하는 짐짓 여유로운 아이가 돼 있었다. 보물은 찾지 못해도 좋았다. 이 현장에 있는 모든 것이 살갑게 느껴졌다. 이 벤치는 몹시 낯익었다. 저 바위는 분명 내가 매일 걸터앉는 그 바위였다. 저기 저 가로등의 불빛도 너무나 선명했다. 이 마을은 내가 어릴 적 뛰놀던 바로 그 동네인 듯싶었다. 나는 기시감에 도취돼 한껏 흐느적거렸다. “언제 어디서 본 것 같았지만”, 그 사실을 섣불리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그럼 이 풍경이 죄다 사라질 것 같았다.
가로등 옆에서 “모르는 여자”가 “모르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지역에서만 부르는 노래 같았다. 엉겁결에 나는 이중으로 모르는 상태에 접어들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필시 모르는 노래임에 틀림없는데, 분명코 귀에 익었다. 노래의 다음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았던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며 걷고 있었다. “정말 위대한” 겨울을 스쳐 지나가는, 정말 위태로운 영혼이었다. “왠지” 알 것 같으면서도 모르는 게 분명한 날이었다. 도통 갈피를 잡을 수 없던 날이었다.
가없이 절박해져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을 때, 으레 나는 그날을 떠올린다. 그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상한 날이었다.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내 심정처럼, 완벽히 해독할 수 없는 네 속마음처럼, 모르는 것투성이였다. 끝을 몰랐기에, 나아갈 방향을 몰랐기에 걷고 또 걸었다. 그럼에도 보물이 끝끝내 발견되지 않았을 때, 나는 무엇을 하는가.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어서, 하지 않으면 속이 터질 것만 같아서, 꺼이꺼이 기꺼이 “운다”. 한바탕 울음이 ‘끝나고도 한 번 더’ 운다.
*오은 1982년 출생. 서울대 사회학과와 카이스트 문화기술대학원 졸업. 2002년 ‘현대시’로 등단. 시집으로 ‘호텔 타셀의 돼지들’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