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4월 23일 오전 북핵 해결을 위한 미국, 북한, 중국의 3자회담이 열리는 중국 베이징 댜오위타이 영빈관으로 북한 대표단의 승용차가 들어서고 있다. 2002년 말 이른바 ‘2차 북핵 위기’가 불거진 후 처음 열린 외교무대였지만 한국은 참여하지 못했다.
국책연구기관인 통일연구원이 1월 말 발간한 보고서의 한 대목이다. 언뜻 심상해 보이는 이 문장은 그러나 이후 안보당국과 전문가 사이에서 미처 예상치 못했던 큰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할 수 없다”는 정부의 공식입장과 배치된다는 비판이 쏟아져 나왔기 때문. 북핵 협상 주무부서인 외교통상부 당국자들은 언론을 통해 “정부기관으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자칫 북한에 이용당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강도 높게 반박하고 나섰다.
보고서를 작성한 통일연구원 관계자들 역시 “국제사회에서도 인정하지 않는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우리 정부가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라며 서둘러 진화에 나섰다. 현실적 문제인 북핵 위험을 낮추려면 전략적인 대응책 마련이 시급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뿐이라는 설명이다. 한 통일연구원 관계자는 “보고서에 쓰인 ‘사실상’이라는 단어에 주목해달라”고 덧붙였다.
사실 이 주제에 관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임기 초인 2008년 4월 정상회담을 위해 미국 워싱턴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북한이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남겼다가 급히 거둬들이는 해프닝을 겪어야 했다. 2008년 12월에는 미군 합동군사령부가 북한을 ‘핵보유국(Nuclear Power)’으로 명기한 보고서를 공개해 논란을 빚었고, 이는 “미국의 공식입장을 대변하는 게 아니다”라는 국무부의 설명이 나온 이후에야 마무리됐다.
‘핵 폐기’에서 ‘핵 군축’으로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의 핵실험, 2010년 영변 우라늄 농축시설 공개. 평범한 일반인의 눈으로 보자면 북한의 핵 능력은 이제 의심하기 어려운 영역에 들어섰다. 2011년 2월 정몽준 한나라당 의원실이 공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2.2%가 북한의 핵무기 보유 가능성에 대해 “동의한다”(보유하고 있을 것)고 답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럼에도 여전히 보고서의 문장 한 대목이 논란을 일으킬 만큼 뜨거운 감자로 남은 것이다. 북한을 핵보유국이라고 부르면 어떤 일이 벌어지기에 논란과 해프닝이 거듭되는 것일까. 일반적인 인식과 달리 각국 정부가 “북한의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정책을 유지하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한 안보당국 고위관계자의 답이다.
“간단하다. 지위(Status) 문제가 게임의 룰을 근본적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핵보유국’이라는 말에 담긴 국제정치적 의미가 워낙 남다르기 때문에 벌어지는 논란이라는 의미다.”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비롯한 비확산 국제체제는 이미 핵을 보유한 국가와 그렇지 않은 국가를 엄격히 분리해 전혀 다른 의무를 부과한다. 미국, 소련, 중국, 영국, 프랑스 등 다섯 나라에는 ‘핵군축을 위해 노력하라’는 의무만을 지우고, 그 외 모든 나라는 아예 핵무기 개발을 시도조차 못하게 막아놓은 ‘차별 대우’가 모든 논란의 출발점인 셈이다. 이후 인도와 파키스탄, 이스라엘 등이 기존의 NPT 체제를 뛰어넘어 핵무장을 강행해 이른바 ‘비공식 핵보유국’으로 불리는데, 북한이 현재 추구하는 외교적 목표 역시 이러한 ‘비공식 지위’를 인정받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제는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북한이 핵보유국 지위를 얻게 되면 북한의 의무 또한 ‘핵 폐기’가 아니라 ‘핵 군축’이 된다는 사실. 현재 상황에서는 북한의 핵개발 자체가 NPT를 포함한 국제체제를 위반한 것이라는 논리로 핵시설 폐기를 압박할 수 있지만, 보유국으로 인정하고 나면 국제법상 핵무기 수량을 줄이라는 요구가 최대치가 된다. 2010년 이후 북한이 미국을 향해 줄기차게 “핵군축 협상을 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이러한 논리적 맥락에서다.
더욱 현실적인 문제는 이 경우 6자회담 자체가 완전히 무력해진다는 점이다. 핵 폐기를 최종목표로 하는 9·19 공동성명 등 이전의 합의 또한 휴지조각이 되는 것. 특히 만에 하나 북핵 관련 회담이 핵 군축 협상으로 전환할 경우 핵이 없는 한국과 일본은 논의에 참가할 수조차 없다. 미국과 러시아가 2009년 개정한 새 전략무기감축협정(New START)처럼 핵보유국끼리 보조를 맞춰가며 서로의 핵무기 수량을 줄여나가는 게 군축협상의 기본 논리인 까닭이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의 설명이다.
“북한의 핵보유 여부를 둘러싸고 논란이 이어질 경우 이는 자칫하면 현상유지론(論)으로 귀착할 위험성이 있다. 북한의 핵보유는 기정사실이므로 원점으로 돌리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고, 그 대신 중동 등 다른 국가로 확산되는 것을 막는 데 주력해야 한다는 인식이 주요국 사이에 퍼져나갈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미국 역시 암묵적으로 이러한 노선을 택할 수 있다는 우려가 꾸준히 제기됐다.”
“북핵 해결 한미 이해관계 달라”
그러나 이러한 ‘어정쩡한 타협’은 한국의 이해와는 어긋날 수 있다는 게 가장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그간 워싱턴 주변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북한의 기존 핵무기를 용인하고 미사일 능력만 제거하거나 추가 생산능력만 해체할 경우, 미국은 본토에 대한 핵 공격 위험 등 안보 우려를 상당 부분 덜 수 있지만 한국은 이미 완성된 북한 핵무기의 ‘유일한 인질’로 고스란히 남기 때문. 이 같은 시나리오가 한창 떠돌던 2009년 여름, 한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기자에게 “미국과 한국 사이에는 북핵 해결의 최종 목표와 관련해 이해관계가 다를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인도, 파키스탄, 이스라엘의 ‘비공식 핵보유국 지위’와 관련해 국제정치학계에서 ‘미국 외교정책의 실패’라는 비판이 끊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인도나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자국에 대한 직접적인 위협이 아니라는 점에서 총력을 기울여 저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후 대(對)테러 전쟁이나 중국과의 대결구도 형성 과정에서 이들 국가의 지원을 얻으려고 사후 추인하는 우를 범했다는 것. 이스라엘 역시 아랍국가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와 미국 정계의 강력한 유태계 파워 때문에 암묵적으로 용인했지만, 이렇게 시작된 균열이 북한을 포함한 전 세계 곳곳의 핵개발 도미노로 이어지는 게 오늘날의 현실인 까닭이다.
물론 공식이든 비공식이든 핵보유국 지위를 인정받겠다는 북한의 의도가 관철될 가능성은 현재로선 제로에 가깝다. 무엇보다 워싱턴이 이스라엘이나 인도와 달리 북한의 핵 확산 행보에 대해서는 ‘확신에 가까운 의심’을 거듭 천명하기 때문. 그럼에도 북한의 핵 관련 ‘지위’에 대한 논의가 국제사회에서 확대될 경우 평양의 외교행보에 휘말릴 우려를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게 전문가 대부분의 견해다. ‘실제로는 누구나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말을 절대로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는’ 국제정치 방정식의 골치 아픈 복잡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