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성 지음/ 삼우반/ 311쪽/ 1만800원
역시나 익숙한 동부터 눈길이 간다. 첫 번째 작품인 ‘덕동 화백 활약기-상수동’. 최근 트렌디한 카페와 숍이 줄줄이 들어서 뜨고 있는 홍대 근처 그 상수동이다. 이 물을 마시면 병석에서 벌떡 일어난다 해 모여들기 시작한 ‘상숫골’ ‘삼수꼴’이 ‘상수동(上水洞)’으로 바뀌었다. 계곡이 있던 야산은 날로 번창해 하나의 존(zone)으로 변했다. 외국 음식점, 갤러리, 클럽 등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야기 주인공은 25년째 이곳에 살면서 동네 터줏대감이 된 55세 화가 덕동 선생이다.
40대까지만 해도 덕동 선생은 ‘잘나갔다’. 머리 좋고 유머 있고 우수 어린 분위기 때문에 술집에서 담배 꼬나물고 있으면 여자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하지만 50대에 접어든 뒤 덕동 선생의 명성은 예전만 못했다. 나무 그림도 팔리지 않고, 여자도 꼬이지 않았다. 번창하는 상수동과 달리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덕동 선생의 인생. 노모가 신분을 숨기고 아들의 그림을 몽땅 사주는 이야기 뒷맛이 ‘화려하지만 쓸쓸한’ 서울과 꼭 닮았다.
표제작인 ‘이채영은 잘 있다-흑석동’은 저자의 자전적 이야기다. 25년 전 서른 살 무렵, 저자는 광고장이와 대학원생 생활을 병행했다. 소설가로 띄엄띄엄 단편을 발표할 때이기도 하다. 그러다 ‘한국 현대소설사’ 수업을 신청했는데, 노교수의 몸이 불편한지라 집에 가서 수강했다. 모두 3명이 수업을 들었는데 이채영은 그중 한 명. 백석을 사랑하고 목소리가 기막히게 아름다우며 몸이 불편해 휠체어를 타는 여학생이었다.
저자는 자분자분 백석 시를 읽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만 반하고 말았다. 일이 있어 이채영이 발표하는 날 수업에 빠지면 눈물로 아쉬움을 삼켰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사고를 치고 만다. 학우들이 수업을 하는 2층에서 1층으로 이채영의 휠체어를 안고 내려오다 넘어져 휠체어를 놓친 것. 언뜻 눈물 한 방울이 그녀의 뺨에 흘러내렸을 때, 그는 이미 속으로 울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중년이 된 저자는 오랜만에 시를 끼적이다 검색창에 ‘이채영’을 두드린다. “백석 연구자, 이채영 교수 골수암으로 별세.” 창밖을 보며 그는 “이채영은 잘 있다”라고 홀로 중얼거린다.
서울 구석구석은 거쳐간 사람들의 온기와 그들이 놓고 간 이야기가 뒤섞여 동네마다 특유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소설가이자 카피라이터로 활동한 저자는 이 책의 출간 직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1980년대 중반부터 2010년까지 추억으로 남은 그의 서울 이야기가 유작이 됐다. 감칠맛 나는 문체와 이야기가 웃기면서도 슬프게 마음을 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