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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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서양적’ vs ‘중국의 상징’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7-12-26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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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장 서양적’ vs ‘중국의 상징’

    ‘정무문’

    중국의 수도는 두 곳이다. 정치적 수도가 베이징이라면 경제적인 수도는 상하이다. 그만큼 상하이는 현재 중국의 개방과 성장을 대변하는 도시다.

    중국 중앙정치에서 이른바 ‘상하이방(상하이를 정치적 고향으로 삼은 이들)’이 득세하고 있는 것도 막대한 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지만 지금 중국의 권력은 총구가 아닌 지갑에서 나오고 있는 셈이다.

    상하이의 번영은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상하이의 경제적 융성은 1842년 아편전쟁 이후 시작됐다. 상하이는 양쯔강 하구에 자리해 수상교통이 발달한 데다 삼각주 지역 주변의 원자재와 풍부한 노동력, 온화한 기후를 가지고 있었다.

    상하이가 번영의 절정에 이르렀던 때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직전인 1940년대였다. 국제적인 무역항 상하이는 ‘동방의 파리’ ‘동방의 진주’로 불리며 많은 외국인을 불러들였다. 화제의 영화 ‘색, 계’의 배경도 바로 1940년대 상하이다. 영어와 중국어로 뒤섞인 간판이 당시 상하이의 풍경을 한눈에 보여준다.

    그런데 상하이를 등장시키지 않으면서 상하이를 내세운 기묘한 영화가 있다. 1947년 작 ‘상하이에서 온 여인’은 천재 감독 오손 웰스가 만든 하드보일드풍 영화다. 이 영화에는 엘사라는 팜므파탈의 여인이 등장하는데, 사실 이 여인에게 ‘상하이에서 온’이라는 수식이 붙을 이유는 없었다. 상하이가 극의 전개상 중요한 소재나 단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원작소설 제목도 다르다.



    그런데 왜 상하이인가. 1940년대 당시 서구인에게 중국은 곧 상하이였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가장 서양적인 곳이지만 서구인에게는 중국의 상징으로 비친 셈인데, 그런 점에서 상하이의 이미지는 모순적이다. 더불어 중국인에게도 상하이는 모순된 공간이었다. 근대화의 최선진 지역이면서 동시에 서구의 침탈 현장이었다.

    이곳의 주인은 외국 자본가와 중국인 매판 자본가였다. 이 도시에서 중국인은 2류 인간, 열등 인간이었다. 당시 영국인 조계지 부근의 황푸공원 입구에는 ‘개와 중국인은 출입금지’라는 푯말이 버젓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푯말을 발차기로 박살내는 통쾌한 장면이 바로 영화 ‘정무문’의 압권이었다. 그 푯말 대신 이제 하늘 높이 솟은 동방명주탑이 상하이, 그리고 중국의 현재를 보여준다.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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