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정상에 새가 둥지를 튼 모양새로 자리한 오르비에토의 전경.
오르비에토에는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관심을 모으는 슬로시티 국제본부가 자리하고 있다. 1999년 이 도시는 다른 세 곳의 이탈리아 도시와 함께 슬로시티 운동을 출범했다. 그러나 오르비에토가 느림에서 여유를 찾고 질 높은 삶의 현장을 체험하러 오는 각국 관광객들의 메카가 되기까지는 많은 시련이 있었다. 그 ‘변신’ 과정에 대해 스테파노 모치오(41) 오르비에토 시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오르비에토는 지형적으로 특이한 도시다. 이탈리아에서는 ‘투포(tufo)’라고 하는 돌로 된 지반을 ‘라 루페’라 부른다. 오르비에토의 도심은 바로 라 루페 위의 산 정상에 마치 새가 둥지를 튼 것과 같은 모양새로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1980년대부터 도심으로 밀려드는 대형 관광버스와 자동차 무게 때문에 지반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에 놀란 시 당국은 자동차 홍수로부터 도시를 살려내기 위해 88년 대체교통 시스템을 도입해 차량이 도심으로 진입하지 못하게 하는 대책을 마련했다.
그러나 일부 주민, 특히 관광업계 종사자들이 경제손실을 우려해 거세게 반발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 도시가 죽어가도록 방치할 것이냐, 관광수입이 줄더라도 도시를 살려낼 것이냐, 어려운 선택이었지만 오르비에토는 후자를 택했다.
자동차를 쫓아내기로 한 오르비에토는 대신 케이블카를 선택했다. 19세기 후반 개통한 수력 케이블카는 자동차 붐으로 외면받기 시작해 1970년 이후 방치되다 현대화를 거쳐 90년대부터 재가동됐다. 실제 오르비에토를 찾아오는 관광객들은 관광버스나 기차에 내려 바로 케이블카를 타고 언덕 위 시내로 올라가게 된다. 580m의 거리를 이동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2분. 케이블카에서 내린 뒤에는 앙증맞은 오렌지색 전기버스로 갈아타고 인근 두오모 광장으로 향한다.
차량 도심 진입 통제…시내로 가는 케이블카 ‘명물’
현지에서 만나본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런 시스템이 불편하다기보다 재미있고, 다른 곳에서는 경험할 수 없는 매력으로 느낀다고 입을 모았다. 케이블카를 타니 산 정상의 도시에 가는 기분을 실감한다는 평이다. 가격도 저렴해 0.95유로(약 1300원)에 케이블카와 전기버스 둘 다 이용할 수 있다.
오르비에토의 케이블카는 연간 140만명 이상이 이용할 정도로 명물이 됐다. 두오모 성당 앞에 도착한 관광버스에서 우르르 내려 사진만 찍고 떠났던 예전과 달리 요새 관광객들은 오르비에토의 환경과 문화유산 보호에 참여했다는 자부심을 느낀다. 또한 시 당국은 중세마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도록 두오모 성당 앞부터 주변 골목길을 소음공해에서 해방시켰다. 고성방가 등 모든 종류의 소음이 법으로 제한된 것이다.
편리함을 포기하는 대신 중세마을을 완벽하게 보전하게 된 오르비에토는 로마 도시인들의 주말 나들이 코스에서 이제는 세계적 관광지로 급부상했다. 염려했던 것과 달리 도리어 관광수입이 늘었다. 수천 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지역 유명 화이트 와인 ‘오르비에토 클라시코’는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해외 수출이 급증했다고 한다.
오르비에토에는 그 흔한 패스트푸드점이 한 곳도 없다. 간단히 점심식사를 해결할 수 있는 카페테리아조차 모든 메뉴가 ‘슬로푸드’로 구성돼 있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한 100년 넘는 전통카페 ‘몬타누치’의 주인 파올로 씨는 “모든 식재료는 유기농이며 방부제나 조미료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자랑했다. 몬타누치는 가문 대대로 전수돼온 레시피 그대로 수제 초콜릿과 케이크를 만드는데, 특히 인기 있는 밀레폴리라는 케이크는 사전에 고객이 몇 시에 먹을 예정인지 확인한 뒤 그 시간에 맞춰 구워낸다고 한다.
오르비에토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재래시장이다. 대형 할인마트도, 심지어 슈퍼마켓도 없는 이곳 사람들은 어떻게 장을 보는지 궁금했다. 매주 목요일과 토요일에 장이 열리는 재래시장에서 그 궁금증을 풀었다. 계절 채소, 과일, 이 지방 특산 치즈와 올리브유, 그리고 먹음직스러운 햄과 소시지가 가득한 장터는 보기만 해도 사람 사는 기분이 들게 했다. 과일과 채소를 파는 도메니코 씨는 “바나나를 제외하고 모두 직접 재배한 과일과 채소”라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대형 할인마트·슈퍼마켓 대신 주2회 재래시장 열려
산 정상에 자리한 오르비에토에 석양이 물들었다. 이곳의 네온사인은 딱 한 군데, 응급약을 파는 약국에만 있다. 저녁식사 전, 시내 중심가에 갑자기 활기가 돈다. 산책하며 이웃사람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파세자타(이탈리아어로 산책이라는 뜻)’가 시작된 것이다. 한때 모든 이탈리아인들의 일상 습관이었던 파세자타는 바쁜 생활에 밀려 대도시에서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러나 오르비에토에서는 매일 저녁 벌어진다고 한다.
한발 늦게 가는 것이 사실은 뛰는 사람보다도 앞서가는 것이라는 철학이 몸에 밴 오르비에토 시민들. 전 시민의 의식개혁과 자발적인 노력으로 지금은 세계가 부러워하는 슬로시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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