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히트’의 주인공 고현정(차수경 역).
반항적이고 열혈남아 같은 재벌 2세들이 드라마에서 자취를 감췄다. 화려한 스포츠카, 넓은 원룸 오피스텔에 온갖 호화로운 집기를 갖춰놓고 폼을 잡는, 그러나 별다른 직업도 없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은 더는 드라마에서 보기 힘들다. 번듯한 의사, 변호사, 인기스타 같은 역할도 주인공보다는 조연 캐릭터로 많이 등장한다. 여성 캐릭터도 마찬가지다. 청순가련형, 남성의 보호를 받아야 살 수 있는 가녀린 멜로의 주인공, 눈물의 여왕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뻔한 캐릭터를 세우기에는 시청자의 눈이 너무 높아졌다. 또 상투적이고 스테레오 타입의 한 여자나 한 남자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와 신데렐라 콤플렉스에만 집중했던 트렌디 드라마의 약발도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과거 한국 드라마에서 가장 흔한 직업은 형사, 깡패, 법조인, 재벌 2세 등이었다. 주인공의 직업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등장인물의 배경을 설명하는 도입부만 지나면 주인공 열 중 아홉은 ‘연애에 올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국적인 삶 시청자 호응 … 멜로와 어색한 결합은 숙제
이정재 최지우 이미연 고소영 세븐 비 등 톱스타를 얼굴마담 격으로 내세워 시청자의 관심을 끌던 전략도 이젠 통하지 않는다. 잘 먹힌다는 ‘불륜’ 설정도 가족 시청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는 비판을 받으며 갈수록 ‘약발’이 떨어지고 있다.
소재의 빈곤, 톱스타 마케팅이 위세를 잃어가는 가운데 작가와 PD들은 캐릭터에 강력한 숨을 불어넣는 작업에 집중한다. 참신한 소재를 찾기 위한 노력은 캐릭터의 전문 직업에 대한 탐구에서 출발한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시청자들이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 창조에 주력한다는 말이다. 2005년 큰 인기를 끌며 파티셰(제과제빵 전문가)라는 직업명을 널리 소개한 ‘내 이름은 김삼순’이 좋은 예다.
이 드라마의 성공 이후 전문직 캐릭터는 꾸준히 개발됐다. 여기에 ‘CSI(과학수사대)’ ‘프리즌 브레이크’ ‘그레이 아나토미’ 등의 미국 드라마와 ‘히어로’ ‘하얀 거탑’ ‘노다메’ ‘칸타빌레’ 같은 일본 드라마에 등장하는 오밀조밀하고 짜임새 있는 캐릭터들은 마치 현실에서 살아 숨쉬는 듯한 완성도를 제공하며 시청자의 눈높이를 높여놓았다.
이제 전문직 드라마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구조는 전문직업군 주인공들이 현업에서 겪는 치열한 삶과 성공, 좌절로 채워진다. 있는 그대로의 삶의 모습 말이다. 그 과정에서 사랑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은 양념이 된다.
‘에어시티’의 주인공 최지우(한도경 역).
‘쩐의 전쟁’에서 금나라 역을 완벽하게 소화한 박신양은 자신의 연기 코치와 대역배우, 분장사, 체력 트레이너 등 군단을 이끌고 다닌 것으로 화제를 낳았다. ‘오버’로 보일지 모르지만 박신양의 방식은 옳았다. 그는 자기 드라마에 책임을 지고 캐릭터를 치밀하게 분석하는 등 시청자들에게 빈틈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그만큼 성공을 거뒀다.
최근 전문직 드라마에서 중요하게 꼽히는 것은 단순한 미국 드라마와 일본 드라마 모방이 아닌 ‘한국적인 재창조’다. 전문직 드라마를 흉내내지만 멜로와의 ‘어색한 결합’ 같은 문제점을 ‘여전히’ 드러내고 있는 한국형 전문직 드라마의 숙제가 바로 이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