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박근혜 대표와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이 4월8일 오후 서울 송파구 향군회관에서 열린 재향군인회 정기총회에 참석, 취재진의 요청으로 악수하고 있다.
정의장의 총선행보는 ‘롤러코스터’처럼 비상과 추락을 반복했다. 한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입에 올린 노인 폄하발언이 4월1일 보도되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관전자들로서는 짜릿한 선거전의 묘미를 경험하는 순간이지만 정의장 측근은 “핏발 선 정의장의 눈을 마주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했다”고 그때를 회상했다. 정의장은 노인 폄하발언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정동영식 위기관리 능력을 선보였다. 그는 선거를 사흘 앞둔 12일 선거대책위원장직과 비례대표 후보를 사퇴했다. 표를 의식한 쇼라는 야당의 반박도 있었지만 과감한 결단은 그를 큰 정치인으로 부각시킨 배경이자 진정성을 대외적으로 확인시킨 촉매였다. 그의 결단을 지켜본 우리당 한 관계자의 설명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로, 총선에서 이긴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입각 등을 통해 행정경험을 쌓을 수도 있고, 내년 4월로 예정된 재선거를 노릴 수도 있다.”
鄭, 老風 극복 ‘1당 등극’ … 탄핵 정치적 해결 ‘과제’
정의장의 결단에는 보이지 않는 손도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 내 고위층이 정의장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유도했다는 것. 또 당내에는 ‘친정(親鄭 정동영)세력’과 ‘친김(親金 김근태)세력’, ‘노무현 직계세력’, ‘개혁세력’ 등 4대 세력이 한 지붕 생활을 하며 서로 불편함을 조금씩 키우고 있었다. 발화 버튼만 누르면 상황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휩쓸려 갈 가능성이 충분했고 여권 핵심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우려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의장의 결단은 기대 이상의 성과를 우리당에 가져다주었고 과반의 원내 1당이라는 총선 결과에 대해 만족하는 분위기다. 당내에서는 정의장의 총선 대차대조표를 매우 후하게 매긴다. 정의장에게 과거와 다른 힘이 실리고 사람이 모이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한다. 그를 전담 취재했던 기자들도 총선 직후 ‘정동영 부활’을 예고했다. 노인 폄하발언도 정치적 매듭을 지었고 무한책임론에서 빠져나와 의장직을 유지할 수 있는 발판도 마련했다. 4월15일 당사에 마련된 총선 개표장에 나타나 눈물을 흘리는 모습에는 승자의 여유와 생환에 대한 환희가 동시에 묻어 있었다.
그러나 정의장을 감싸고 있는 정치 환경은 매우 불안정하다. 정의장은 우선 국민 불안을 해소하는 차기 주자로서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 가장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문제를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표에게 조건 없는 대화 제의를 했지만 야당의 반응은 신통치 않다.
주요 외신들은 이번 선거결과를 놓고 한국 정치가 전체적으로 ‘왼쪽으로 이동했다’고 평가했다. 이것이 불러올 파장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의장은 이를 해소해야 한다. 우리당의 이념 스펙트럼은 생각보다 폭넓다. 당내 세력들의 정치적 뿌리와 이념적 정체성은 벌써부터 관심사로 떠오른다. 당내 4대 세력은 ‘보수에서 진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념적 스펙트럼을 갖고 있다. 이는 향후 거여의 주도권을 둘러싼 치열한 경쟁을 의미한다. 정의장의 지도력과 카리스마는 이 과정에 다시 한번 검증의 터널을 통과해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계파별로 분화될 것인지, 아니면 상호견제와 선의의 경쟁을 통한 새로운 리더십을 창출할지가 결정된다.
정동영 의장(왼쪽). 박근혜 대표
총선을 끝낸 박대표의 행보는 이제 6월 중순으로 예정된 한나라당 정기전당대회와 결부돼 관심을 모은다. 당대표 경선에 출마할 것인가가 첫 번째 관심. 만약 그가 출마할 경우 재신임은 확실해 보인다. 총선 때 보여준 그의 카리스마를 넘을 만한 ‘경쟁자’가 아직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의 대통령선거 패배로 사기가 꺾인 당내외의 기대도 남다르다. 박대표측도 자연스럽게 당권 장악을 통해 외연을 확대해야 할 시기라는 전략적 판단에 기인한 분석이다. 만약 그가 재신임을 받는다면 총선공약을 중심으로 한 박근혜식 개혁이 현실화할 가능성이 높다. 박대표는 총선 후 북한 방문 등 유연한 대북정책뿐만 아니라 국민소환제 도입과 국회의원 불체포특권 폐지 등 상당히 파격적인 정치개혁안을 내놓았다. “박근혜의 한나라당이 과거의 한나라당보다 좀더 왼쪽(left)으로 이동할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그만큼 박근혜 개혁이 파격적일 것임을 예상케 한다.
그러나 박대표 캠프는 대표 경선 출마에 대해 조심스럽다. “오로지 총선만 생각해 그 이후에 대해서는 입장이 없다”는 게 한 측근의 전언이다. 그는 “잘나갈 때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박풍 경쟁력을 확인한 것으로 만족하고 일단 2선으로 빠지자는 게 그의 생각이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론이다. 4년간의 긴 대선 레이스를 놓고 볼 때 조기에 주자로 부상할 경우 여권은 물론 당내 경쟁자로부터 무한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점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기대 이상을 거둔 박대표지만 그에게도 산적한 난제들은 뒤따른다. 우리당에 과반수를 내준 것이 1차적 부담이다. 과거처럼 국회를 통해 대여견제를 하기란 이젠 대단히 어렵다. 총선 결과 지지계층이 영남권, 보수층, 중·장년층으로 국한된 것도 좋은 소식이 아니다. 그 속에 한나라당의 한계와 문제점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지역구도와 세대간 대결구도가 정착될 경우 차기 대선에서도 한나라당이 고전할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젊고 건강한 보수로 거듭나기 위해 뼈를 깎는 자기혁신을 감행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변화에 둔감한 한나라당이 박대표의 변신 요구에 응할지는 알 수 없다. 두 번의 대선에서 패배했음에도 진로 수정을 하지 않은 한나라당이다.
한나라당 당선자 121명 가운데 초선은 62명으로 반이 넘는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박풍’의 도움으로 원내 입성이 가능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테크노크라트 위주인 이들은 박대표의 합리적 보수 노선에 동의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이념적 편차가 적지 않은 점은 박대표에게 부담이다. 개혁과 진보 논리로 무장한 소장파 가운데 ‘박정희와 박근혜’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도 없지 않다. ‘박정희의 딸’은 아직 그에게 지울 수 없는 멍에이자 극복해야 할 정치적 부채임이 드러나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