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5일 저녁 개표방송을 보는 민주당사가 썰렁하다. 추미애 의원도 패배가 확인된 뒤 심각한 표정으로 TV 화면을 보고 있다(오른쪽).
2004년 총선에서 이 징크스가 재연됐다. 지역구 5석에 비례대표 정당지지도는 7.1%, 비례대표 당선자를 합쳐 9석에 그친 ‘미니정당’. 4·15 총선에서 민주당이 받은 성적표는 너무나 참담하다. 정통 야당의 계승자,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을 배출한 민주당의 몰락은 ‘권력무상’을 보여주는 대하드라마 그 자체다.
총선 결과가 민주당에겐 대재앙이었지만 민주당 사람들이 특히 충격받은 것은 선거대책위원장을 맡아 당의 얼굴로 활약한 추미애 의원의 낙선이었다.
추의원의 한 측근은 “개표 초반 잠깐 얼굴이 보이더니 1, 2위 중심으로 보도를 하면서 아예 추의원의 이름조차 나오지 않았다. 무릎 깨져가며 3보1배를 할 때 현지 분위기는 대단히 좋았다. 분위기로만 보면 호남은 물론 수도권에서도 당선자를 냈어야 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 하나, 민주당 관계자들에게 충격으로 와닿은 것은 전체 의석수에서 민주노동당에도 뒤지면서 4당으로 밀려난 점이다. 민주당 당직자 가운데 ‘기호3번’보다 뒷번호 정당에서 활동한 이는 거의 없다. 1987년 대통령선거와 1988년 13대 총선 때 김대중 총재가 이끈 평화민주당이 잠깐 기호3번을 쓴 적이 있지만, 그 뒤로는 ‘기호2번’을 트레이드마크처럼 사용해왔다. 이번에 ‘기호2번 민주당’을 강조한 것도 기호2번에 익숙한 호남 민심에 기대보자는 전략에서였다.
하지만 총선 결과 4당으로 밀려나면서 민주당은 다가올 재·보궐선거부터 ‘기호4번’으로 후보를 내야 한다. 민주당 한 관계자는 “우리 머릿속에 ‘기호4번’은 자민련이다. 열린우리당이 민주당을 ‘호남 자민련’이라고 부를 때만 해도 울화가 치밀었는데 결과는 그리 돼버렸다”고 말했다.
다가올 재·보선부터 ‘기호4번’ 호남 자민련
총선 참패 이후 민주당사는 흉가로 변했다. 우리당이 떠난 이후 그렇지 않아도 넓어 보이던 당사는 텅텅 비어버렸고, 전화를 걸어도 받는 당직자가 거의 없었다.
3월16일 오전 추미애 의원과 손봉숙 김종인 공동선대위원장, 박준영 선대본부장, 장성민 선거기획단장, 그리고 당권파를 대표한 최명헌 사무총장 등이 참석해 민주당의 이후 진로를 논의하는 간략한 회의만 있었을 뿐 이후 당사는 적막에 휩싸였다.
이날 회의에서 총선 참패의 책임을 지고 3월16일 새벽 대표직 사퇴의사를 밝힌 조순형 전 대표 등 지도부가 일괄 물러나고, 선거사령탑이던 추미애 의원도 배제한 채 당선자 9명으로 비상대책위원회(이하 비대위)를 꾸리기로 했다. 듣고 보면 별것도 없는 대응책이지만 이 정도 수습안이 만들어지기까지도 적지 않은 진통이 있었다.
당초 조 전 대표는 대표직 사퇴를 선언하면서 상임고문, 전당대회 의장, 당선자 등으로 구성하는 비대위를 제안했다. 그러나 이 제안에 추의원 중심의 선대위가 반기를 들고 나섰다. 사실상 당권파가 다시 당을 접수하려는 꼼수라는 것이다. 양측이 비대위 구성을 놓고 다시 이견을 보임에 따라 3월16일 오전 회의가 열렸고 결국 조 전 대표는 물론 추의원 역시 비대위에 불참하는 것을 조건으로 당선자들만으로 비대위를 구성하기로 한 것이다.
4·15 총선 이후 한적한 서울 여의도 민주당사.
당선자 중심의 비대위 구성안에 대해 당사자인 지역구 당선자들도 썩 내켜 하지 않는 분위기다. 비대위 구성을 위해 4월19일까지 서울로 올라오라는 연락에 한 지역구 당선자는 “지역구 당선자들이 다 여기(전남)에 있는데 여기서 하면 되지 오라 가라 하느냐”며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당선자 가운데 몇몇은 조만간 우리당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소문도 무성하다. 한 당직자는 “영광·함평에서 당선된 이낙연 의원은 선거 기간 내내 민주세력 통합의 주역이 되겠다고 했다. 통합에 나서겠다는 얘기는 곧 당선되면 우리당으로 옮기겠다는 얘기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이적설과 관련해 기자들의 질문이 꼬리를 물자 당사자인 이의원은 “지금은 시간이 넉넉한 상황인 만큼 개별 입당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의원도 총선 공약이 ‘민주세력 통합론’이었다는 점은 부인하지 않는다.
해남·진도에서 당선된 이정일 의원도 이적설에 시달리고 있다. 그는 지난 대선 때 자금사정이 좋지 않은 선거캠프에 선뜻 50억원을 빌려줬던 재력가. 노무현 대통령과의 인연을 따져볼 때 그의 우리당행이 그렇게 이상할 것도 없다는 게 민주당 주변의 반응이다. 하지만 당사자는 “180만 민주당원을 봐서라도 당을 바로 세워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다.
목포의 이상열 당선자는 지역구를 물려준 김홍일 의원과 각별한 사이. 따라서 그는 상당 기간 김의원과 정치적 선택을 함께할 것으로 예상된다. 담양·곡성·장성에서 당선된 김효석 의원은 권노갑 전 의원과 가까운 인사. 권 전 의원의 민주당에 대한 애착에 비춰 김의원도 당분간 민주당을 떠나는 모험을 할 것 같지는 않다.
생각 다른 지역구 당선자들 이적설 ‘솔솔’
이처럼 지역구 당선자들조차 생각이 제각각인 까닭에 비대위가 구성되더라도 민주당의 혼란은 쉽게 수습되지 않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과거 당 대표를 지낸 경륜 탓에 비대위 대표를 맡게 된 한화갑 의원 진영의 한 인사는 “솔직히 어디서부터 풀어나가야 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인사는 “현재의 인적 구성하에선 아무리 경험이 풍부한 한의원이라도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 인사는 “이제라도 설훈 의원이 제기했던 ‘결자해지론’을 전개하는 것도 방법”이라는 주장을 내놓기도 했다. 민주당이 탄핵의 주역이었던 만큼 민주당이 앞장서 탄핵 철회를 하자는 것이 그 줄거리. 아이디어 차원의 제안이지만 당 안팎의 반응은 싸늘하다. “이제 와서 무슨 이득이 있느냐”는 것이다. ‘결자해지론’이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민주당의 솟아날 구멍이 없다는 현실의 방증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하지만 민주당으로선 ‘불가피한 선택’인 한의원조차 불법자금 수수혐의로 검찰 수사를 앞두고 있어 정상적 활동이 어렵다는 점이 부담이다. 한의원이 사법처리될 경우 민주당은 구심점을 잃을 것으로 보인다. 30억원이 넘는 당사 임대료 체납금 등 파산 직전의 재정 상황도 민주당의 부담거리가 될 전망이다. 교섭단체 구성에 실패해 ‘가뭄의 비’ 같던 국고지원금마저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다. 10월 이후 있을 재·보궐선거에서 민주당 공천으로 출마를 노리는 후보들이 있는 한 당을 꾸려가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지만 그리 호응을 얻지는 못하고 있다.
이처럼 민주당을 둘러싼 정치적, 물리적 환경 탓에 특별한 전기가 없는 한 민주당은 해체의 길로 들어설 것이란 관측이 우세하다. 당에 발이 묶인 비례대표 당선자들을 제외한 지역구 당선자들은 제각각 살길을 찾아 당을 떠날 것이라는 예상이다.
이름에 걸린 저주의 주술을 풀지 못한 채 민주당은 1990년대의 꼬마 민주당들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말 것인가. 민주당의 행보는 총선 이후 정국의 또 다른 볼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