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허영 교수는 경희대 법학과를 졸업하고,독일 뮌헨대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독일 교수자격시험을 통과, 본대와 바이로이트 대학에서 7년여간 교수로 재직한 그는 82년 연세대 교수로 부임한 이후 국민적 합의를 중시하는 유럽의 통합론적 헌법관을 국내에 전파했다.
이런 상황에서 헌재 자문위원인 허영 명지대 초빙교수(67)는 4월7일 헌재와 정치권이 모두 ‘윈-윈(win-win)’할 수 있다는 타개책을 발표해 관심을 끌었다. 그는 “헌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심판 사건에 대해 기각결정을 내리되, 헌법과 법률을 위반한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서는 경고를 내리라”고 주문했다. 대한민국 헌법학의 대가이자 탄핵정국 초기 “탄핵 사유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던 원로학자가 왜 이런 ‘절충안’을 냈는지 알아봤다.
“국민소환제 등 직접민주주의 도입 땐 나라 혼란”
-국회법 위반 여부에 논란이 일면서 일부에서는 ‘각하(却下)’를 제기했는데 절충안에서는 ‘기각(棄却)’을 권유했다.
“각하란 탄핵소추안이 형식 요건에 미흡하다고 판단할 경우에 해당하지만, 국회가 국회법에 따라 탄핵소추를 발의, 투표를 통해 정식으로 의결한 사안이기 때문에 각하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본다. 국회 쿠데타가 절대 아니다.”
-탄핵소추안 발의 직후 그 정당성을 옹호하는 발언을 했는데, 갑자기 생각이 달라진 이유는 무엇인가.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탄핵소추는 정당했다고 본다. 다만 국회가 처음 제기한 세 가지 탄핵 사유(경제파탄, 측근비리, 선거중립 위배) 이외에 추가 사유를 보충하리라 기대했지만 그 가능성이 사라져 기각으로 결론 내린 것뿐이다.”
-그 세 가지 이유로는 충분하지 않은가.
“우선 경제파탄 문제는 탄핵 사유로 적절치 못하고, 측근비리는 대통령과의 연관성에 대한 입증이 불확실하다. 오로지 선거중립의 의무를 위반한 것만이 심판대상인데, 그것만으로는 대통령직 파면 사유에 미흡할 것이다. 따라서 헌재가 기각결정을 내리되, 대통령에게 엄중 경고하는 수순이 서로가 ‘윈-윈’할 수 있는 해결책이다.”
-단순히 기자의 질문에 답변한 것을 선거법 위반으로 보는 것은 가혹하다는 평도 있다.
“그 발언뿐만 아니라 그 이전의 노사모에게 말한 시민혁명론, ‘민주당을 찍으면 한나라당을 돕는 것’이라는 발언, 개헌저지선 확보 발언 등으로 미뤄볼 때 대통령의 의식구조나 총선에 임하는 자세가 선거법 위반의 세 가지 요건인 ‘능동적’ ‘계획적’ ‘적극적’인 것에 해당한다.”
-선거법 위반의 경미함을 근거로 헌법 제65조 ‘그 직무집행에 있어서 헌법이나 법률을 위배한 때’에 ‘중대한’을 넣어 해석한다면 탄핵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의견도 있다.
“‘중대한’이라는 명문이 헌법에 없는데 어떻게 만들어넣을 수 있겠는가. 미국 역시 가벼운 형사범죄(misdemeanor)가 탄핵사유에 해당하며, 독일의 경우에도 ‘의도적’인지 여부가 문제이지 위반사안의 중대성 여부는 논란거리가 아니다. 탄핵심판이란 범죄를 추궁하는 게 아니라 헌법질서의 보호수단이기 때문이다.”(현대영어로 가벼운 형사범죄를 뜻하는 ‘misdemeanor’에 대해서는 이 원뜻이 형법상의 범죄가 아닌 ‘정치적 범죄(political crimes)’를 지칭해왔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허교수는 ‘misdemeanor’가 미국의 모든 헌법 교과서에서 경범죄로 쓰였으며, 이는 대통령 재직 중에 형사상 특권을 누리는 대통령에 대한 국회의 견제권한이라고 설명했다.)
-결국 모든 것을 고려할 때 ‘탄핵소추는 합당하지만 파면 요건으로는 부족하다’는 뜻인가.
“그렇다.”
-다른 사유를 추가한다면 파면할 수도 있다고 했는데, 추가적인 탄핵 사유가 궁금하다.
“국회는 노대통령이 취임 이후 헌법과 법률을 어긴 모든 사안을 지적해야 했다. 첫째, 대통령은 헌법이 지향하는 정당 민주적 대의제의 기본정신을 어겼다. 자신을 공천한 민주당을 탈당한 것 역시 민주당이 탄핵할 근거를 제공한 셈이다. 둘째, 재신임 발언으로 우리 헌법이 정한 대통령제의 기본 골격을 훼손했다. 셋째, 거부권을 남용했다. 특히 측근비리에 대한 특검법안을 거부한 점은 권한 남용에 해당한다. 넷째, 파업사태 등 노동쟁의에 대처하면서 법치주의의 기본정신을 위태롭게 했다.”
-그렇다고 뒤늦게 탄핵 사유를 추가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
“이견이 없지 않다. 다시 국회의 의결을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지만, 탄핵소추 절차가 형사소송법을 준용하기 때문에 공소추가가 가능할 수도 있다. 가능 여부를 떠나 추진하는 것이 옳았다. 사실 소추위원이라는 사람(김기춘 법사위원장)이 재판에 불참하는 것 자체가 난센스다. 이런 상태에서 헌재가 ‘기각’ 결정밖에 다른 선택이 있겠나?”
-일부 국민들은 촛불집회를 열어 탄핵 반대를 외쳤는데, 평소 헌법에서 강조한 국민들의 합의(consensus)정신에 비춰보면….
“헌법학자로서 참여정부가 대의민주주의를 무시하고 직접민주주의 메커니즘에 의존하려는 태도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 야당이 국민에게 탄핵을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촛불집회 등으로 표출되는 민의가 토론과정을 거쳐 형성된 국민적 합의인지 의문스럽다. 거리에 모인 사람들 수에 가치를 둬서는 안 된다. 인기영합주의로는 국가 정체성을 잃게 만들 뿐이다.”
-우리 헌법에 직접민주주의 요소가 부족하다는 불만도 있고,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정치 환경이 변화했는데….
“국민소환제 등 직접민주주의 요소를 도입하면 나라가 더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민중과 국민이란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개념이다. 민주주의적인 의식이 확립되지 않는 사회에서는 정치선동가들에 의해 악용될 소지가 있다.”
-헌재의 대통령 탄핵심판권에 대해 민주적 정당성의 문제를 들어 의문을 제기했는데, 어떤 맥락인가.
“대통령 탄핵심판이란 헌재의 위헌심판이나 권한쟁의심판과는 성질이 다르다. 특히 국민의 직접선거를 통해 선출한 대통령을 막상 탄핵심판의 대상으로 놓고 보니, 대통령이 확보한 민주적 정당성의 크기가 헌재가 확보한 크기보다 압도적으로 크다는 점이 그것이다. 하원이 발의한 뒤 상원이 심판하는 미국의 제도나, 의원내각제 아래의 상징적 대통령을 심판하는 독일 헌재와는 전혀 다르다. 국민이 직선제로 뽑은 대통령을 탄핵심판하는 절차는 다시 고민해야 한다.”
-우리 헌법의 탄핵제도가 제대로 연구되지 않은 셈인가.
“그렇다. 대통령 탄핵을 처음 접하면서 문제점을 새삼 인식하게 됐다. 대통령이 탄핵심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헌법학 교과서를 써본 나조차도 심각하게 고민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