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2일 자이툰 부대 소속 군인들이 행진을 하고 있다.
3월16일 한미 양국이 한국군의 이라크 추가 파병지를 변경하기로 합의했을 때만 해도 국방부, 외교부 등 정부의 파병관련 부처 관계자들은 “한국의 파병 원칙에는 전혀 변함이 없다”고 한목소리를 냈다. 하지만 4월2일 우리 군의 새 파병 후보지가 전쟁의 피해가 거의 없는 북부 쿠르드족 자치구인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야로 결정되자 정부 내에서도 파병의 득실을 둘러싼 논란이 서서히 일기 시작했다.
파병 일정 연기 따라 국내외 상황 계속 꼬여
이런 상황에서 4일부터 이라크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시아파와 연합군 간의 유혈충돌은 정부 내 파병담당자들을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급기야 4일과 8일에는 시아파 무장단체들이 한국인 인권운동가와 종교인들을 납치해 각각 5~14시간 동안 억류하는 사건까지 일어나자 정부는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고건 대통령권한대행은 최근 “이라크 파병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다”라고 말해 파병을 둘러싼 정부 내 논의가 ‘원점 재검토’까지 포함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추측마저 자아내고 있다.
정부의 가장 큰 걱정은 계속 늦어지고 있는 파병 일정이다. 파병이 늦어질수록 이라크 상황의 악화, 정치권의 파병 찬반 대결, 거세지는 국내 파병 반대여론 등으로 정책 결정이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4월 초로 예정됐던 이라크평화재건사단(자이툰 부대)의 선발대 파견은 파병지 변경으로 인해 6월 초로 연기된 상태다.
국방부는 새 파병 후보지 두 곳을 돌아보기 위해 4월9일 현지조사단을 이라크로 보냈다. 이들이 귀국하는 19일 이후 최종 파병지를 결정하고 45일 안팎의 물자·장비 수송기간을 고려하면 선발대는 6월 초에나 출발이 가능하다. 본대 파견은 선발대가 주둔지를 정비하는 6월 중순이나 말에 이뤄진다.
문제는 이라크로 들어가려는 한국과 달리 기존 파병국가들은 매일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이라크에서 발을 빼려고 한다는 것이다.
1300여명을 파병한 스페인은 지난달 마드리드 열차 폭탄테러사건 직후 ‘6월 말 철군’을 공식 선언했고, 이탈리아(파병 규모 2900여명) 폴란드(2300여명) 온두라스(300여명), 도미니카(300여명) 카자흐스탄(20여명) 등도 철군을 내부적으로 결정했거나 검토 중이다.
이런 상황에 이라크 저항세력은 8일 바그다드 인근에서 일본인 기자와 여성 등 3명을 납치해 ‘일본 파병부대의 철수’를 요구하는 등 각 파병국에 직접적인 압력까지 넣고 있다. 또 일부 저항세력은 인터넷을 통해 한국 총선(4월15일), 일본 참의원 선거(7월), 미국 대통령선거(11월2일) 등의 일정을 체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미 국내 일부 정치권과 시민단체들은 연일 파병 반대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8일 한국인 납치 사건이 알려진 직후 민주당 추미애 선거대책위원장은 밤 10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을 직접 찾아가 ‘파병 원점 재검토’를 요청했다. 351개 시민단체로 이뤄진 ‘이라크 파병반대 비상국민행동’은 지난해 이라크 추가파병동의안에 찬성했던 의원들을 낙선운동 대상으로 선정했다.
정부는 지난해 국회에 제출한 이라크 추가파병동의안에서 파병시한을 올해 12월31일까지로 명시했다. 6개월로 짧아진 파병기간을 고려해 정부가 17대 국회에 제출하려는 파병기간 연장동의안은 통과 가능성이 점차 낮아지고 있다.
파병을 직접 담당하는 국방부는 당장 눈앞에 닥친 파병지 변경 문제로 정신이 없다. 미국이 제시한 한국군의 새 파병 후보지는 북부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야. 국방부는 지난달 말 군수·보급 차원에서 연합군 병참기지인 쿠웨이트와 가까운 남부 디카르, 카디시아, 나자프, 메이산 등 4곳을 새 파병 후보지로 제시했다. 그러나 미국은 이들 지역이 폴란드 및 영국군의 관할지역이기 때문에 부대 조정에 어려움이 있다며 거부했다.
일부에선 최근 시아파의 무장봉기가 주로 중·남부에서 일어나고 있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지만 북부 지역도 국방부 파병담당자들을 안심시키진 못한다. 파병 후보지 두 곳은 과거 후세인 정권의 탄압을 받은 쿠르드족의 자치구다. 미국에 매우 호의적인 곳이라서 미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맥도날드’가 이라크에서 가장 먼저 진출한 지역 중 하나다.
당초 파병 예정지였던 키르쿠크를 △테러단체 증가 △미군의 공동주둔 요청 등의 이유로 포기한 만큼 치안이 안정되고 독자 지역에서 단독 작전권을 발휘할 수 있는 두 곳은 언뜻 새 파병지로 적절해 보인다.
하지만 시아파와 미군 간의 충돌이 이라크 내 친미·반미 세력 간의 내전 성격으로 확대되고 있어 친미 성향의 쿠르드족에 대한 테러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다.
실제 2월1일 쿠르드족 양대 정당인 쿠르드민주당(KDP)과 쿠르드애국동맹(PUK) 당사에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아르빌과 술라이마니야에 주둔 중인 미군 병력은 각각 170여명과 100여명. 3700명의 자이툰 부대는 두 곳 중 새 파병지로 결정된 한 곳에만 파병된다.
파병 예정지는 친미지역 … 시아파 테러 가능성 높아져
이들 지역은 전쟁의 피해가 거의 없어 ‘자이툰 부대가 태권도나 가르치다 돌아올 것’이라는 비아냥거리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자이툰 부대가 쿠르드족의 재건을 돕더라도 이라크 정부 수뇌부의 친한화(親韓化)에는 도움이 되지 않을 뿐더러 자칫 이곳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이 한국을 외교적 ‘늪’에 빠뜨릴 것이라는 우려도 나오고 있다.
지난해 10월 정부는 이라크 추가파병을 결정하며 한미관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의 경제적 실익은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최근 파병의 유일한 이익이라던 ‘굳건한 한미관계’에도 미묘한 긴장이 감지되고 있다. ‘독자적인 지역에서 단독 작전권을 확보해 평화재건지원 활동을 벌인다’는 우리 정부의 파병 원칙에 미국이 섭섭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
2002년 7월 매복공격으로 인한 스페인 정보장교 7명 사망, 같은 해 11월 폭탄테러로 인한 이탈리아군 18명 사망 등 다른 연합군의 피해를 고려할 때 “한국군이 파병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는 불만이다. 자이툰 부대가 이라크 내 각종 정보를 미군에 의지하고, 헬기와 수송기 등 미군의 각종 지원을 받는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미국은 영국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인 한국군의 파병에 큰 기대를 걸었지만 이제 그 기대가 사라진 지 오래”라며 “한국군의 파병 후보지로 ‘한가한’ 북부를 제시한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주한미군에 대한 우리 정부의 집착도 한미관계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이달 들어 이라크 사태가 최악으로 치달으면서 주한미군은 이라크에 추가 병력파견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우리 정부가 한반도 안보 불안을 이유로 주한미군 감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어 주한미군의 이라크 투입은 불가능하다.
파병 이후 자이툰 부대의 작전에 대해서도 한미 양국은 적지 않은 시각 차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 파병지에서 활동하는 반미 테러단체에 대한 한국군의 공세작전 여부, 한국군이 인질로 잡힐 경우 테러단체와의 협상 여부, 쿠르드족의 독립운동에 대한 한국군의 태도 등은 한미관계에 보이지 않는 걸림돌이 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