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29일 경제5단체 부회장들이 합동으로 ‘경제 위기 타개를 위한 경제계 의견’을 발표하고 있다.
2월7일 손길승 회장 체제가 들어선 이후 전국경제인연합회(이하 전경련) 고위 관계자가 일부 간부들에게 한 말이다. 이 관계자가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온 것을 잘 아는 간부들은 귀를 쫑긋 세워 이 관계자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 관계자의 입에서 나온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노당선자 사람들은 확실히 과거 정권 실세들과는 다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기업에도 신세를 지지 않으려 한다. 전경련으로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일이어서 큰일 났다는 얘기다.”
손회장 취임 이후 전경련 내 강경파 물갈이
참여정부와 전경련의 ‘밀월’ 관계는 손길승 회장 체제가 들어선 게 결정적인 계기였다. 손회장은 취임하자마자 노당선자를 예방하는 등 참여정부와의 관계 정립에 신경을 썼다. 그러나 전경련 주변에서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이하 인수위) 시절 인수위측과 갈등을 빚었던 전경련의 태도 변화에는, 참여정부에서는 과거와 같은 방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것도 일부 작용하지 않았겠느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손회장은 취임 이후 전경련 내 ‘강경파’들을 물갈이했다.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 대해 강하게 비판해왔던 손병두 전 부회장이 상임고문으로 물러났고, 인수위 시절 외국 언론에 “인수위 목표는 사회주의”라고 말해 물의를 빚은 김석중 상무도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으로 파견됐다. 이 과정에 손 전 부회장은 한때 현직에 그대로 남아 있기를 원했으나 정부와의 원만한 관계를 바란 원로들의 뜻에 따라 이선으로 후퇴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참여정부와 전경련의 ‘밀월’은 인수위와 전경련이 정면충돌 조짐까지 보였던 인수위 시절과 비교하면 “언제 그랬느냐”는 반문이 나올 법하다. 인수위 시절 노대통령이 재벌개혁을 강조했고, 전경련 관계자들이 이에 맞서 출자총액 제한제, 집단소송제, 상속·증여세 완전 포괄주의 등 새 정부의 3대 재벌개혁 과제를 정면 비판하는 등 양측 사이에는 냉기류가 흘렀다.
재계가 노대통령과의 ‘밀월’ 관계를 과시한 것은 노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였다. 전경련은 청와대보다도 먼저 노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준비했다. 3월 초 이미 한미협력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손회장의 주한미군 방문을 추진하는 등 사전 정지작업을 벌였을 정도. 노대통령도 “이번 방미 성공의 절반은 여러분의 몫”이라고 감사를 표시할 정도였다.
재계에서는 특히 이건희 삼성 회장의 방미 수행이 두고두고 화제가 됐다. 이회장은 방미 기간중 한 만찬에서 노대통령을 “21세기 한국의 비전이자 희망”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재계 관계자는 “이회장 선친인 고 이병철 창업주는 박정희 유신정권 시절 한 번도 청와대를 방문한 적이 없을 정도로 권력과는 ‘불가근 불가원’ 관계를 유지해왔다”면서 이회장의 방미 수행에 놀라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참여정부와 재계의 ‘협조적 관계’에는 노대통령의 ‘실용주의적’ 태도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인수위에 참여한 청와대 관계자는 “노대통령은 후보 시절 재벌개혁을 강조했지만 한편으로는 재벌이 국정의 주요한 파트너일 수 있다는 점도 아울러 충분히 인식했다”고 말했다. 특히 노대통령은 주요 국정과제인 동북아 경제중심 국가 건설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재계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는 것.
전경련 회장단이 3월13일 서울 인터컨티넨털 호텔에서 손길승 회장(맨 왼쪽) 주재로 회의를 열고 경제난 타개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위).노무현 대통령(오른쪽)이 당선자 시절이던 2월10일 인수위 사무실을 방문한 전경련 손길승 신임회장과 악수하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참여정부와 재계의 밀월을 주도한 것은 삼성그룹이라는 평가다. 이건희 삼성 회장은 손길승 전경련 회장에게 ‘전폭적 지원’을 약속한 이후 현명관 삼성저팬 회장을 전경련 부회장으로 ‘파견’, 손회장을 측면지원하고 있다. 현부회장은 또 삼성경제연구소를 거쳐 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 부원장으로 재직중이던 이규황씨를 전경련 전무로 발탁했다.
현재 전경련 내에서 현부회장의 역할은 손병두 전 부회장과 대비된다는 얘기를 듣는다. 손 전 부회장은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 대한 반대논리 개발을 직접 챙겼다. 경우에 따라서는 언론을 이용해 정부정책을 직설적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손 전 부회장은 이런 활동이 회원사에 대한 서비스라고 본 것이다. 반면 현부회장은 정부의 대기업 정책에는 맞대응을 자제하고 있다.
이 때문에 전경련 일각에서는 “현부회장이 정부의 대기업정책 가운데 삼성과 관련 있는 것만 신경 쓰려는 것 아닌가” 라는 뒷말이 나오고 있다. 현재 삼성의 최우선 관심사는 이회장 외아들 재용씨의 경영권 승계를 ‘소프트 랜딩’시키는 것이다. 삼성으로선 정부와 재계의 밀월 관계가 이런 환경 조성에 가장 유리하다고 판단했을 법하다는 관측이다.
그러나 삼성그룹 관계자들은 이회장이 정부에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이회장의 평소 철학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회장은 평소 “삼성은 어디까지나 대한민국 안에 존재한다. 대한민국이 잘돼야 삼성이 잘된다”는 뜻을 자주 피력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정부의 ‘소프트 랜딩’을 돕는 것은 기업인들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라는 것.
청와대 관계자들은 참여정부와 재계가 ‘밀월’을 구가한다고 해서 재벌개혁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오랫동안 노대통령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한 청와대 비서관은 “노대통령은 한번 한다고 하면 반드시 하는 스타일”이라면서 “재벌개혁도 결코 포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참여정부와 재계의 밀월이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는 얘기다.
재계에서는 참여정부와 재계의 밀월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정부가 증권 관련 집단소송제를 시행하려고 할 때라고 말한다. 전경련 관계자는 “집단소송제 도입이 옳은지 여부를 떠나 집단소송제는 한국기업들 입장에서는 감당하기 힘든 ‘레드 라인’이다. 재계 서열 3위의 SK그룹도 SK글로벌 분식회계가 밝혀지지 않았는가”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