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단체들이 앞 다투어 이라크 구호활동에 참여하면서 일부 단체들의 ‘생색내기식’ 활동이 물의를 빚고 있다.(사진은 기사내용과 직접 관련 없음.)
대한의사협회(이하 의협)는 5월21일 ‘한국보건의료단체 이라크 의료봉사단’ 발대식 관련 자료에서 현재의 이라크 의료구호 활동을 이같이 비판했다.
전쟁 후 이라크의 참상이 전해지자 우리나라의 각 언론사와 시민·사회단체들은 앞 다투어 긴급 지원팀을 꾸려 이라크에 파견했다. 의협의 보고서는 이 구호활동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인 셈이다.
현재 이라크에 들어가 있는 국내 구호팀은 동아일보사와 ‘이라크 난민 돕기를 위한 시민네트워크’가 함께 파견한 의료진을 비롯해 수십여개. 정확한 수를 파악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수가 이미 들어가 있고, 현재 파견을 준비하고 있는 단체도 적지 않다. 이라크 현지에서 “미군을 제외하고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외국인은 한국인”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문제는 이들이 펼치는 구호사업 중 상당부분이 제자리를 찾지 못한 채 삐걱대고 있다는 점이다. 현지에 있는 구호단체 중 일부는 준비 부족과 현지 부적응, 그리고 ‘생색내기’식 봉사로 빈축을 사고 있다.
“한국인 미국인 다음으로 많아”
의협의 이라크 의료봉사단 선발대로 5월23일부터 6월1일까지 현지에 다녀온 한 관계자는 “원래 계획은 2000만원어치의 의약품을 가지고 현지에 도착해 3일간 실태조사와 의료봉사(민간병원 협조 환자 진료)를 하는 것이었지만 실제 의료봉사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의약품도 보관을 잘못해 폐기되는 바람에 현지 병원에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고 털어놓았다.
“선발대 6명이 처음 만난 것이 출발 이틀 전이었는데 이 자리에서조차 의료봉사에 쓰일 의약품 리스트가 준비되지 않았을 만큼 극단적으로 준비가 미흡한 상황이었다. 냉장보관해야 하는 의약품을 아이스박스에 넣어 가는 바람에 두바이 공항에서 열어보니 비닐 포장조차 하지 않은 종이 포장 약품들이 얼음물 위에 떠 있었다. 출발 전부터 봉사는 포기한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게 그의 고백이다.
현지에 들어가 활동하고 있는 한국 구호단의 행동에 대한 비판도 적지 않다. 이라크 반전평화팀의 최혁 팀장은 “바그다드를 찾는 구호단체 사이에서 정보교환과 역할분담 같은 협조가 이루어지기보다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인 일들이 더 많이 벌어지고 있다”며 “단체 이름을 알리기 위한 구호활동이 너무 많다. 구호단체들이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이들을 위해 고통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라고 개탄했다.
최근 이라크에 다녀온 또 다른 활동가도 “한국에서 요르단 암만을 통해 이라크 바그다드에 들어가는 데는 아무리 서둘러도 꼬박 3일이 걸린다”며 “과연 일주일씩 이라크에 다녀오는 이들이 오고 가는 데 걸린 6일을 제외한 시간 동안 봉사를 제대로 했을지 의문”이라고 꼬집었다. 10일 미만의 단기봉사를 위해 이라크로 떠나는 상당수 단체들의 구호활동이 ‘생색내기’에 그칠 수 있다는 비판이다.
실제로 일부 단체들은 이라크 건물 벽에 단체의 이름이 적힌 스티커를 붙이거나, 이라크 사람들에게는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 쌀을 건네준 후 기념사진을 찍어 귀국하는 등 현지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할 수 있는 행동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라크전 반대 인간방패를 지원해 바그다드에 들어간 후 아직까지 현지에 머무르며 구호활동을 벌이고 있는 류은하씨는 최근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미국한테 덤벼서 이 꼴을 당한 거야. 우리가 너희를 도와주는 거니까, 고분고분해지라구. 안 그러면 안 도와준다’는 식의 정서가 있다”며 “지금과 같은 식의 자원봉사가 진행된다면 이라크에서 한국인에 대한 인상은 오히려 더 나빠질 것이 분명하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라크에 대한 구호활동이 너무 과잉돼 있다”거나 “이제 의료진 파견을 중단해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오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현재 이라크에서의 긴급구호가 모두 무의미하거나 불필요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의견도 적지 않다. 특히 각계의 구호가 집중되고 있는 바그다드 지역을 벗어난 곳에는 여전히 도움의 손길이 필요하며, 이곳에서 상당수 한국인들이 최선을 다해 봉사하고 있다는 것이 현지를 다녀온 이들의 공통된 증언이다.
이라크 현지에서 의료봉사 활동을 벌이고 6월1일 귀국한 한 자원봉사자는 “빈민 지역의 경우 상하수도가 섞이면서 더러워진 물 때문에 배탈, 설사병 환자가 하루 1000명씩 발생하지만 정작 그런 곳에는 우리나라 보건소 수준의 의료기관도 없다”며 “이라크에 대한 지원과 구호사업은 여전히 절실한 과제”라고 말했다.
고통 함께할 구호대 파견을
이라크 반전 평화팀의 오수연씨도 “트럭에 실려온 구호약품 대부분은 큰 종합병원에 들어가기 때문에 병원에 갈 돈이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약 구경하기가 어렵다. 종합병원에는 일반적인 의약품이 최소한 두 달치 이상 비축돼 있지만 동네 진료소에는 비타민조차 부족한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한국인 구호대가 이라크의 빈민가인 뉴바그다드 지역에 임시 진료소를 만들자 설사병과 류머티스 등으로 고통받던 환자들이 하루에 수백명씩 몰려들었다.
이라크 현지 구호단들은 의료구호 외에도 현재 이라크에는 도움이 필요한 부분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전쟁중에 부상한 장애 어린이와 어머니의 영양 실조로 기형아로 태어나고 있는 수많은 신생아들을 위한 보호시설 건설과 절대적으로 부족한 각종 생필품, 생리대 등 여성 용품과 의족 보내기 등은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할 구호사업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쓰레기 치우는 작업도 현재의 이라크에서는 굉장히 중요한 구호활동이라고 한다. 한 활동가는 “전쟁 후 행정기관이 마비되면서 이라크의 보건 위생 환경은 최악의 상황을 맞았다”며 “주택가 골목마다 쓰레기 냄새가 진동하지만 수거 장비와 인력이 부족해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다. 아이들이 그 위에서 놀고, 일부 사람들은 쓰레기 더미를 헤쳐 음식물 등 필요한 것을 줍기도 한다”고 전했다.
결국 현재 이라크에 절실한 것은 한국 구호대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인력과 기금, 정보, 시간 등을 효율적으로 재배치해줄 수 있는 시스템의 구축과 이 시스템을 제대로 이용할 수 있는 ‘진정한 봉사정신’을 가진 구호대의 파견이라는 지적이다.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루 종일, 적어도 2주일 이상의 시간을 이곳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목욕시키고, 밥을 먹이고, 상처난 곳에 약을 발라주고, 놀아주고, 안아주고, 말상대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만 이라크에 오십시오. 제발 단체의 이름을 걸고 경쟁적으로 오지 마십시오. 제발 시설에 들어가 ‘무슨 무슨 팀’ 하며 자기 단체 이름을 드러내지 마십시오.” 긴급구호를 펼치는 모든 이들이 귀담아들어야 할 류은하씨의 조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