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2

..

블로그형 에세이로 담은 ‘LA 10년’

  •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장 khhan21@hanmail.net

    입력2007-11-21 16:36: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블로그형 에세이로 담은 ‘LA 10년’

    <b>길에서 영화를<br>만나다</b> 이철승 지음/ 쿠오레 펴냄/ 336쪽/ <br>1만5000원

    연말이 되면 나는 출판시장의 한 해를 정리해 발표한다. 올해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눈에 띄는 흐름 중 하나는 연예인인 배두나의 ‘두나’s 런던놀이’ ‘두나’s 도쿄놀이’(이상 테이스트팩토리)를 비롯해 ‘클로즈업 홍콩’(김형일 외), ‘두 번째 파리’(티파샤, 이상 에디터), ‘카페 도쿄’(임윤정, 황소자리), ‘동경오감’(박성윤, 삼성출판사), ‘열흘짜리 배낭여행’(김유경, 예담) 등 여행에세이의 출간이다. 나는 이것을 ‘아트에세이’라는 키워드로 정리해 예술서 기획자인 아트북스 정민영 대표에게 이 흐름을 분석하는 글을 부탁했다.

    그런데 정 대표는 ‘블로그형 에세이’라고 문패를 바꿔 단 글을 보내왔다. 나는 순간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제목 하나로 현상을 분석하고 있어서다. 아닌 게 아니라 최근 관광지나 문화유산 등을 소개하는 책보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곳과 느낌을 솔직하게 털어놓는 블로그를 닮은 책의 출간이 늘고 있다. 위험을 무릅쓰고 좀 견강부회하자면, 그런 책들만 쏟아져 나온다.

    블로그는 1인 미디어의 대표선수다. 그곳에서는 책 형태로 완성되기 이전의 모든 단계가 자유롭게 유통되면서 읽힌다. 유동성이 높은 짧은 글이 나날이 쌓여가고 있다. 또 매체에서 매체로의 이동이 자유롭고 매체에 주어지는 각종 제약에서도 자유로우며 ‘읽는’다는 행위에 ‘편집’ 행위마저 개입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일내겠다 싶었는데 그게 어느새 출판시장의 한 축이 돼버렸다. 블로그에 담긴 내용을 책으로 펴낸 것을 우리는 ‘블룩(Blook)’이라고 한다. 베스트셀러 블룩도 속출하고 있다. 편집자들은 알파블로거를 찾아 인터넷을 헤맨다. 정 대표는 블로그형 에세이는 “호흡이 길지 않은 글, 생동감 넘치는 사진, 1인칭 주어를 앞세운 글쓰기, 적극적인 자기 노출, 마니아적 취향, 댓글 같은 블로그의 특징을 반영한다”고 말한다. 물론 블로그를 그대로 옮겨놓은 책도 있지만 대부분은 책의 꼴에 맞게 변형되게 마련이다.

    ‘길에서 영화를 만나다’는 영화를 소재로 한 블로그형 여행에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여행 기간이 좀 길다. 거의 10년 동안 LA에 머물며 LA에서 촬영했거나 그곳이 배경이 된 영화들의 행적을 찾고 있으니 말이다.



    지은이는 영화에 미친 마니아다. 1990년대 초반에는 그때 범람하기 시작한 비디오방에 취직까지 했다. 당시 비디오방만큼 영화를 자유롭게 볼 수 있는 환경은 없었다. 처음에는 손님으로 드나들었지만 돈이 떨어지자 취직해서 일하고 돈 벌고 영화까지 공짜로 봤다. 이후 디지털 기술이 발달하자 DVD가 일상화됐다. 정성을 다해 필름의 화질과 음질을 복구하고, 감독이나 제작에 관계한 사람들의 설명을 넣고 평론가의 평을 올린 DVD 덕분에 영화광은 살 만한 세상을 맞이했다. 영화를 보면 볼수록 무수한 질문이 생기는 영화 마니아에게 감독의 설명을 직접 들을 기회를 제공하는 DVD가 넘치니 말이다.

    저자는 단순한 영화 마니아가 아니라 영화 관계 일을 하면서 대학에서 영화 공부도 하고 있다. 따라서 책에는 전문가의 시선이 오롯이 담겨 있다. 그는 영화 속 공간을 찾아나서는 듯하지만, 결국 영화가 다룬 인간의 삶을 추적하고 있다. 나아가 인간의 삶 자체를 다양한 시각으로 응시한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개인적인 체험이다. 개봉한 해에 미국 와인 판매량을 20%나 올려놓을 정도로 미국에서 인기를 끌었지만 한국에서는 흥행에 참패한 영화 ‘사이드웨이’를 보고 “아무도 그다지 번쩍거리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데 저렇게들 인생을 즐길 수 있다니, 저 정도면 실패한 중년의 삶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감상이다. 블로그형 에세이는 보통 너무 튄다 싶을 만큼 개인적 체험에 따른 주관적 감상이 넘친다. 따라서 애초부터 절대로 남을 가르치려 들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온라인 일기장’ 같은 이런 유형의 책을 읽으며 남의 사생활을 엿보는 쾌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일종의 관음증이 작동하는 것이다.

    관음증의 쾌감은 매순간 마주하는 현실을 짧게 정리한 글에 ‘디카’와 ‘폰카’로 찍은 컬러풀한 사진이 붙으면서 배가된다. 왜 사진은 ‘현전(現傳)하는 매체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매체’라지 않는가? 영화나 뮤지컬, 비디오 등은 뇌·축척·인상의 한계로 인해 한 장의 사진이 던져주는 강력한 임팩트를 따라잡을 수 없다. 당연히 이 책에도 비주얼 시대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사진이 넘친다.

    댓글이 많아야 블로그는 화제가 될 수 있다. 책에도 댓글의 구실을 하는 팁이 넘친다. LA를 무대로 한 영화지만 다른 지역에서 찍은 영화, 앰버서더 호텔이나 사막, 라스베이거스 같은 특별한 무대와 관련된 영화, 영화상, 영화제 등을 사진과 함께 설명한 글은 팁처럼 수시로 제공된다.

    책은 시대 환경에 따라 변한다. 검색 같은 읽기 습관, 엄지손가락으로 눌러서 쓰는 새로운 글쓰기 습관과 함께 블로그의 일상화는 책의 개념 자체를 크게 바꾸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인터넷에 매혹된 독자를 종이매체로 불러내기 위한 처방이자, 1인 미디어의 대중화가 빚은 우리 시대의 출판스타일”인 블로그형 에세이가 몇 년 내에 베스트셀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지도 모를 일이다.



    • 많이 본 기사
    •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