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국어(상) 5단원은 ‘능동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주제로 전개된다. 이 단원의 학습 목표는 듣기와 말하기처럼 읽기와 쓰기도 중요한 의사소통임을 이해하고 읽기와 쓰기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단원에 18년 동안 유배지에 갇혔던 다산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글이 제재로 등장한다. 아들 학연, 학유에게 보내는 편지들 중에서 교과서에 나온 두 편의 편지는 당당한 어조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한다.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는 등 농사에 힘쓸 것, 근(勤)과 검(儉)을 명심하여 지킬 것이 그 편지들의 주제이다.
편지에서 정약용은 남새밭 가꾸는 요령을 가르치면서 한여름 농사로는 참외만한 것이 없다고 농사 품목까지 추천해준다. 심지어 당대 선비들이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읊으며 바라본 국화조차도 잘 가꿔 팔면 가난한 선비의 몇 달 식량을 마련해줄 수 있으니 한낱 꽃구경만으로 대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아무리 조선 후기라지만 선비의 통념과는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 정약용, 우리는 이 단원에서 ‘의사소통’을 배우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시대와 소통하지 못한 불우한 지식인을 만나게 된다.
2. 불우한 시대의 지식인
정약용의 생애는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불행과 고통 자체였다. 정약용은 타고난 총명함으로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일찍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다방면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노력으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정약용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환난을 겪는다. 천주교 신자인 셋째 형 정약종과 조카들 모두 참수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고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의 죽음 또한 지켜봐야 했다.
그 자신은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돼 18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유배당할 때 세 살이었던 막내아들이 이듬해 요절했고, 의지했던 형 약전 또한 유배 16년 만에 흑산도에서 명을 달리하는 등 유배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편지로밖에 왕래할 수 없었던 20년 가까운 유배생활, 정약용 자신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가난한 유배생활이었지만 가족도 생계의 위협에 처해 있어 가족 걱정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암담한 세월이었다.
정약용이 그런 시련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바로 그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를 지향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려는 열정에서 당시 금하던 천주교와 서학을 접했고, 현실에 도움이 되는 여러 기술들을 익히고 연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3. 열린 사회를 꿈꾸며
그런데 정약용은 오히려 유배 이후에 더 큰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형제들이 죽고 가문이 절멸했으며 가족과 떨어져 가장과 남편, 아버지로서의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18년 동안 정약용은 조선의 어떤 학자보다도 많은 저작을 남겼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포함해 다방면에 걸쳐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는 한 개인이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은 족히 걸릴 방대한 내용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절망적 상황에서 복사뼈에 구멍이 날 정도로 공부하고 몇백 권의 책을 저술한 그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식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위임받지 않으며 어떤 권위로부터 지위를 배당받지 않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지식인 자체는 어떤 결정의 산물이 아니라 기괴한 사회가 만들어낸 기괴한 산물일 뿐이다. 아무도 그를 요구하거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인은 기성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보편성을 항상 만들어가야 함을 알고 노력하는 보편적 기술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속한 역사적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끊임없는 자기비판으로 자신의 소시민적 안위를 거부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지배계급의 권력주의를 거부하고 대중의 기회주의를 배척하면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가 진정한 지식인이다.”
정약용은 온갖 시련 속에서 개인의 고통에만 머무르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를 성찰하고 지식인으로서 보편적 임무에 성실했으며, 열린 사회를 지향하면서 스스로의 인간성을 실천한 지성인이었다. 우리는 그런 정약용의 모습에서 이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
국어(상) 5단원은 ‘능동적인 의사소통’이라는 주제로 전개된다. 이 단원의 학습 목표는 듣기와 말하기처럼 읽기와 쓰기도 중요한 의사소통임을 이해하고 읽기와 쓰기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단원에 18년 동안 유배지에 갇혔던 다산 정약용이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 글이 제재로 등장한다. 아들 학연, 학유에게 보내는 편지들 중에서 교과서에 나온 두 편의 편지는 당당한 어조로 아버지의 가르침을 전한다. 나무를 심고 채소를 가꾸는 등 농사에 힘쓸 것, 근(勤)과 검(儉)을 명심하여 지킬 것이 그 편지들의 주제이다.
편지에서 정약용은 남새밭 가꾸는 요령을 가르치면서 한여름 농사로는 참외만한 것이 없다고 농사 품목까지 추천해준다. 심지어 당대 선비들이 ‘오상고절(傲霜孤節)’을 읊으며 바라본 국화조차도 잘 가꿔 팔면 가난한 선비의 몇 달 식량을 마련해줄 수 있으니 한낱 꽃구경만으로 대하지 말라고 진지하게 말한다. 아무리 조선 후기라지만 선비의 통념과는 다른 가치관을 보여준 정약용, 우리는 이 단원에서 ‘의사소통’을 배우지만 역설적으로 자신의 시대와 소통하지 못한 불우한 지식인을 만나게 된다.
2. 불우한 시대의 지식인
정약용의 생애는 한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온갖 불행과 고통 자체였다. 정약용은 타고난 총명함으로 22세에 성균관에 들어가 일찍부터 정조의 총애를 받는다. 다방면에 대한 지적 호기심과 노력으로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정약용은 정조의 죽음과 함께 집안이 풍비박산되는 환난을 겪는다. 천주교 신자인 셋째 형 정약종과 조카들 모두 참수되는 고통을 당해야 했고 이승훈, 조카사위 황사영의 죽음 또한 지켜봐야 했다.
그 자신은 모진 고문 끝에 목숨을 부지했지만 둘째 형 정약전과 함께 유배돼 18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유배당할 때 세 살이었던 막내아들이 이듬해 요절했고, 의지했던 형 약전 또한 유배 16년 만에 흑산도에서 명을 달리하는 등 유배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가족들과 멀리 떨어져 편지로밖에 왕래할 수 없었던 20년 가까운 유배생활, 정약용 자신도 제대로 먹지 못했던 가난한 유배생활이었지만 가족도 생계의 위협에 처해 있어 가족 걱정에 노심초사할 수밖에 없었던 암담한 세월이었다.
정약용이 그런 시련을 받아야 했던 이유는 바로 그가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를 지향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새로운 시대를 개척하려는 열정에서 당시 금하던 천주교와 서학을 접했고, 현실에 도움이 되는 여러 기술들을 익히고 연구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3. 열린 사회를 꿈꾸며
그런데 정약용은 오히려 유배 이후에 더 큰 업적을 쌓을 수 있었다. 형제들이 죽고 가문이 절멸했으며 가족과 떨어져 가장과 남편, 아버지로서의 자괴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18년 동안 정약용은 조선의 어떤 학자보다도 많은 저작을 남겼다.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 등을 포함해 다방면에 걸쳐 500여 권에 이르는 저서는 한 개인이 베껴 쓰는 데만도 10년은 족히 걸릴 방대한 내용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절망적 상황에서 복사뼈에 구멍이 날 정도로 공부하고 몇백 권의 책을 저술한 그에게서 우리는 진정한 지식인의 모습을 본다.
프랑스의 철학자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식인은 어느 누구에게도 위임받지 않으며 어떤 권위로부터 지위를 배당받지 않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지식인 자체는 어떤 결정의 산물이 아니라 기괴한 사회가 만들어낸 기괴한 산물일 뿐이다. 아무도 그를 요구하거나 존재를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러나 지식인은 기성의 보편성을 거부하고 스스로 보편성을 항상 만들어가야 함을 알고 노력하는 보편적 기술자들이다. 그리고 그것은 자신이 속한 역사적 특수성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끊임없는 자기비판으로 자신의 소시민적 안위를 거부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지배계급의 권력주의를 거부하고 대중의 기회주의를 배척하면서 인간성 회복을 위해 실천하는 자가 진정한 지식인이다.”
정약용은 온갖 시련 속에서 개인의 고통에만 머무르거나 절망하지 않았다. 자신의 시대를 성찰하고 지식인으로서 보편적 임무에 성실했으며, 열린 사회를 지향하면서 스스로의 인간성을 실천한 지성인이었다. 우리는 그런 정약용의 모습에서 이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