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롤프가 H&M을 위해 디자인한 옷이 전 세계 250개 H&M 매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H·M은 1947년 창립된 스웨덴의 중저가 패션 브랜드로, 현재 전 세계에 1193개 매장을 거느리고 있다. 유명 패션쇼에 등장하는 최신 디자인을 재빨리 벤치마킹해 실시간으로 제품을 생산해내는 ‘패스트 패션’의 대명사이기도 하다. 물론 가격이 가장 큰 매력 포인트다. 5만원만 있어도 최신 유행 디자인의 옷을 상하의로 갖춰 입을 수 있다.
11월9일, 빅토·롤프 라인의 판매 개시를 앞두고 프랑스의 인터넷 블로그에는 ‘새벽부터 매장 앞에 줄을 서자’ ‘인기 제품은 3일 만에 동이 날 것이다’ 등 각종 정보를 나누는 사람들이 많았다. 심지어 최근 저녁 프라임 시간대에 방영되는 TV 광고나 여섯 쪽 이상을 할애한 잡지 광고만 봐도 “가슴이 뛴다”는 파리지엔들이 적지 않다. 나 역시 인터넷 사이트를 보고 몇몇 아이템을 찍어둔 터라 묘한 경쟁심이 발동했다.
1년 전 이맘때였다. 당시 나는 파리의 ‘H·M’ 매장에 있었다. 한참 찾지 않았던 이 매장에 다시 간 이유는 스텔라 매카트니 라인 때문이었다. 비틀스의 멤버인 폴 매카트니의 딸이자 자신의 이름을 딴 고급 패션 브랜드의 디자이너인 스텔라 매카트니가 지난해 11월 ‘스텔라 매카트니 for H·M’을 선보였던 것이다.
한정판이다 보니 품절을 우려해 대학원 수업을 빼먹은 친구들도 있었다. 캐나다에 있는 친구들이 부탁했다면서 똑같은 티셔츠를 7벌이나 구입한 친구는 “북미 지역에선 첫날부터 동이 날 정도로 인기였다”고 말했다.
럭셔리 디자이너가 중저가 브랜드 ‘H·M’ 옷 만들어
‘H·M’은 2004년에도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와 합작해 재미를 봤다. 유명 디자이너와 중저가 브랜드의 만남은 매년 화제를 불러일으켰고, H·M의 주 소비자층뿐 아니라 이들 유명 디자이너들의 부유한 팬들까지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빅토와 롤프는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에 기반을 둔 자신들의 패션 세계와 대중적 브랜드 ‘H·M’의 만남을 결혼에 비유했다. 그들이 디자인한 라인의 주제는 ‘러브 스토리’. 주제에 걸맞게 298유로짜리 웨딩드레스도 선보일 정도로 이 결혼을 기뻐하는 눈치다.
‘H·M’으로서는 디자이너와의 제휴로 ‘싸구려 브랜드’가 아닌 ‘트렌디한 패션 브랜드’로 이름을 알리는 이미지 상승 효과를 톡톡히 봤다.
‘패스트 패션’으로 유명한 다른 경쟁 브랜드들 역시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해 주력하기는 마찬가지. 스페인의 ‘자라’는 명품 브랜드 못지않게 고급스러운 쇼윈도로 유명하다. 영국의 ‘톱 숍’은 고급 백화점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스타일 어드바이저’ 제도를 최근 도입했다. 이 제도는 전문 스타일리스트가 고객의 체형과 트렌드에 맞는 패션 아이템을 직접 골라주는 서비스다.
이들의 노력은, 패션 비즈니스는 가격에 상관없이 단순히 옷만 파는 것이 아니라 이미지를 파는 것이라는 판단에서 비롯했다. 가격은 싸더라도 매장 분위기만큼은 고급스럽게 유지하는 것이 폭넓은 고객층을 유지하는 비결이라는 의미다.
디자이너 빅토와 롤프는 H·M과의 합작을 ‘패션의 민주화’라고 표현했다. ‘럭셔리’와 ‘패스트 패션’의 가격 차이는 여전히 크지만, 이미지 구축 전략만큼은 ‘상향 평준화’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