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마찬가지로 중국 사람들 역시 최고 지도자를 별명으로 부르기를 즐긴다. 장쩌민(江澤民)의 별명은 ‘광대’다. 외국 방문 등 중요한 자리에서 곧잘 노래를 부르거나 악기를 연주한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공허한 문구를 진지한 태도로 떠들어댄다는 비아냥거림일 수도 있다. 주룽지(朱鎔基) 총리의 별명은 ‘미치광이’. 그가 중국인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지도자였다는 점에서 보면 쉽게 이해가 안 가는 별명이지만, 당의 부패문제 등에 대해 마음속에 있는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불 같은 성격을 가리키는 애정 어린 별명이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4세대 지도자로 화려하게 등장한 후, 드디어 11월15일 제16기 중앙위원회에서 공산당 최고의 자리인 당 총서기에 오른 후진타오(胡錦濤)의 별명은 ‘쑨쯔(孫子)’, 즉 ‘손자’다. 윗사람 말을 잘 듣는 애송이라는 뜻인 동시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서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별명은 후진타오가 중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사람됨을 잘 표현해준다.
순탄한 권력 쟁취 … 신중한 행보 별명은 ‘쑨쯔(孫子)’
후진타오는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안후이성(安徽省)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에 중국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 잇따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쟁은 그저 풍문이었다.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후진타오는 학업에서도 우등생이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공산당 청년단에 가입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적극적이고 건전한 학생이었다. 중·고교를 모범생으로 졸업한 후진타오는 베이징(北京)으로 올라와 명문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진학했다. 모범적인 학교생활로 공산당의 주목을 받았던 그가 정식으로 당원이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5년이다.
중국 전체를 뒤흔든 문화혁명은 칭화대학에서 공산당 간부로 성장하고 있던 후진타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도파적인 처신으로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후에도 정치 바람에 휘말리지 않고 68년 간쑤성(甘肅省)의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 자원함으로써 베이징의 피바람을 피하는 한편, 수리공정 전공자이자 당 간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특유의 유능함과 성실함, 그리고 칭화대학 출신이라는 학맥 덕분으로 당시 간쑤성 당서기로 있던 쑹핑(宋平) 등 현지 고위층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젊은 간부의 발탁이 유행처럼 번지자 마침 베이징의 국가계획위원회로 전근한 쑹핑의 배려로 중앙 당학교에서 청년 간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당시 공청단(共靑團) 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눈에 들어 82년의 당대회에서 단숨에 최연소 당 중앙위원(후보위원)으로 발탁된다.
이후 공청단, 구이저우성(貴州省), 시장자치구 등에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특히 89년 티벳지역에서 민족 소요가 일어났을 때, 강경 진압을 지휘하면서 중앙의 확고한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남순강화(南巡講話·남쪽 지방을 시찰하며 발표한 담화)에서 강조한 신세대 지도자 양성 방침 덕분에 49세의 나이에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도약하면서 일약 중국의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후진타오의 은인자중한 행보가 시작된다. 그의 탁월한 점은 후야오방, 자오쯔양(趙紫陽) 등 공인된 후계자들의 연이은 실각이 준 교훈을 잘 새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마오쩌뚱이나 덩샤오핑 같은 영웅호걸형 지도자보다는 공산당 집단지도체제가 부여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것을 잘 감지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중국 대중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차기 지도자로 스스로를 부각하기보다는 당과 장쩌민의 방침에 충실한 ‘조직인’의 역할에 몰두했다. 이를 통해 입지를 강화했고 마침내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후진타오가 얻은 ‘쑨쯔’라는 별명 역시 이 같은 은인자중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그는 대중에게 장쩌민의 노선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애송이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손자병법의 쑨쯔와 같은 지혜를 발휘하여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가 고난을 모르는 애송이 쑨쯔인지 은인자중하는 병법의 지혜를 깨친 쑨쯔인지는 앞으로 13억 중국인과 전 세계가 지켜볼 것이다.
1992년 14차 당대회에서 4세대 지도자로 화려하게 등장한 후, 드디어 11월15일 제16기 중앙위원회에서 공산당 최고의 자리인 당 총서기에 오른 후진타오(胡錦濤)의 별명은 ‘쑨쯔(孫子)’, 즉 ‘손자’다. 윗사람 말을 잘 듣는 애송이라는 뜻인 동시에, 알면서도 모르는 척 나서지 않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이 별명은 후진타오가 중국 정치에서 차지하는 위치나 사람됨을 잘 표현해준다.
순탄한 권력 쟁취 … 신중한 행보 별명은 ‘쑨쯔(孫子)’
후진타오는 일본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1942년 안후이성(安徽省)에서 태어났다. 그의 성장기에 중국은 중일전쟁, 국공내전, 한국전쟁 등 잇따른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전쟁은 그저 풍문이었다. 순탄한 성장기를 보낸 후진타오는 학업에서도 우등생이었지만 고등학교 시절 공산당 청년단에 가입하는 등 정치적으로도 적극적이고 건전한 학생이었다. 중·고교를 모범생으로 졸업한 후진타오는 베이징(北京)으로 올라와 명문 칭화대학 수리공정과에 진학했다. 모범적인 학교생활로 공산당의 주목을 받았던 그가 정식으로 당원이 된 것은 대학을 졸업하던 해인 1965년이다.
중국 전체를 뒤흔든 문화혁명은 칭화대학에서 공산당 간부로 성장하고 있던 후진타오에게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러나 그는 중도파적인 처신으로 큰 상처를 입지 않았다. 이후에도 정치 바람에 휘말리지 않고 68년 간쑤성(甘肅省)의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 자원함으로써 베이징의 피바람을 피하는 한편, 수리공정 전공자이자 당 간부로서의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후진타오는 특유의 유능함과 성실함, 그리고 칭화대학 출신이라는 학맥 덕분으로 당시 간쑤성 당서기로 있던 쑹핑(宋平) 등 현지 고위층의 관심을 끌었다. 특히 개혁개방이 시작되고 젊은 간부의 발탁이 유행처럼 번지자 마침 베이징의 국가계획위원회로 전근한 쑹핑의 배려로 중앙 당학교에서 청년 간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서 당시 공청단(共靑團) 서기였던 후야오방(胡耀邦)의 눈에 들어 82년의 당대회에서 단숨에 최연소 당 중앙위원(후보위원)으로 발탁된다.
이후 공청단, 구이저우성(貴州省), 시장자치구 등에서 지도자로서의 경력을 쌓아갔다. 특히 89년 티벳지역에서 민족 소요가 일어났을 때, 강경 진압을 지휘하면서 중앙의 확고한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결국 그는 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남순강화(南巡講話·남쪽 지방을 시찰하며 발표한 담화)에서 강조한 신세대 지도자 양성 방침 덕분에 49세의 나이에 최연소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도약하면서 일약 중국의 유력한 차기 지도자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후진타오의 은인자중한 행보가 시작된다. 그의 탁월한 점은 후야오방, 자오쯔양(趙紫陽) 등 공인된 후계자들의 연이은 실각이 준 교훈을 잘 새기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은 마오쩌뚱이나 덩샤오핑 같은 영웅호걸형 지도자보다는 공산당 집단지도체제가 부여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지도자를 요구한다는 것을 잘 감지한 것이다.
때문에 그는 중국 대중에게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차기 지도자로 스스로를 부각하기보다는 당과 장쩌민의 방침에 충실한 ‘조직인’의 역할에 몰두했다. 이를 통해 입지를 강화했고 마침내 최고 지도자의 자리를 계승하는 데 성공했다.
후진타오가 얻은 ‘쑨쯔’라는 별명 역시 이 같은 은인자중에서 나온 것이다. 비록 그는 대중에게 장쩌민의 노선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애송이로 비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보면 손자병법의 쑨쯔와 같은 지혜를 발휘하여 최고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그가 고난을 모르는 애송이 쑨쯔인지 은인자중하는 병법의 지혜를 깨친 쑨쯔인지는 앞으로 13억 중국인과 전 세계가 지켜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