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가 망치를 집어들었다. 끌을 두들기는 나무망치가 아니라 어린아이 머리통만큼 육중한 쇠망치였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지난 8년 동안의 땀과 수고, 한숨과 절망이 굵게 팬 이마 주름 사이로 스쳐 지났다. 망치 자루를 붙들고 휘두르자 대리석은 깨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먼저 예수의 왼팔과 어깨가 통째로 떨어져나갔다. 바닥에 나뒹구는 팔을 다시 찍어내렸다. 손목과 팔꿈치가 으스러지면서 파편이 튀었다. 망치를 내려칠 때마다 귀를 찢는 울부짖음과 함께 파란 불똥이 튀었다. 1555년의 일이다.
‘피렌체의 피에타’. 비운의 조각이다. 훗날 조각가 칼카니가 으깨진 대리석 파편을 거두어 일일이 쇠심을 박아 맞추어두지 않았더라면 영구히 먼지 구름으로 사라질 뻔했다. 조각가는 무릇 끌을 두들겨 대리석에 더운 생명을 불어넣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피에타’는 미완의 생명을 피우지도 못한 채 처형당하고 말았다. 집행자는 조각가 미켈란젤로.
그의 제자 콘디비가 쓴 기록을 보면 ‘피렌체의 피에타’는 주문 제작한 조각이 아니라고 한다. ‘혼자 즐기려고 피에타를 만들어서… 자기가 죽고 나면 교회에 바치고… 그 피에타가 놓인 제단 발치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예술가의 무덤을 장식할 묘비 조각이었던 셈이다. 미켈란젤로가 결혼을 하지 않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붙이 하나 없이 대리석과 망치를 벗하여 살았다. 어느 날 성직자가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나는 벌써 아내가 하나 있답니다. 나를 밤낮 괴롭히는 아내지요. 내 아내는 예술이고 내 자식은 대리석이랍니다.” 그렇다면 조각가는 제 손으로 낳은 예술의 자식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의탁하려 한 게 아니었을까?
또 다른 제자 바사리는 이날의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리석 자체에 고약한 결이 숨어 있는데다 어찌나 딱딱한지 망치를 칠 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이래서는 작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게다가 허드렛일을 봐주던 우르비노가 부쩍 조바심을 치며 재촉하는 바람에 심사가 틀어지고 말았단다. 짜증을 누르지 못하고 손대다 만 피에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우선 대리석이 너무 딱딱해서 그랬다는 건 수긍이 간다. 현재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쇳덩이 같은 돌덩이를 순전히 팔힘만 가지고 이만큼 깎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만약 주문 작품이었다면 착수금을 털어 쓸 만한 재료를 조달했을 텐데, 주머니 사정 탓에 싸구려 대리석을 들여온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누가 채근한다고 짜증을 부렸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도 몹시 닦달을 받았지만 눈 한번 깜빡하지 않던 미켈란젤로다. 율리우스 2세의 묘비 조각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 작품이 제대로 안 돼서 그랬다는 것도 이상하다. 미켈란젤로에게 미완성 조각이 유난히 많은 건 사실이다. 평생 깎은 대리석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었다고 실토한 적도 있으니까. 그래도 미완성의 미학 ‘논 피니토’의 이념을 처음 낸 창시자가 아닌가? 그냥 모른 척 내버려두면 그만일 걸 구태여 망치까지 휘둘러야 했을까? 게다가 ‘피렌체의 피에타’는 자신의 묘비 조각으로 생각했다니까 꽤 정성을 들였을 텐데, 그걸 부수기까지 속마음은 또 오죽 탔을까?
토막난 ‘피렌체의 피에타’는 미술사학자들에게도 골칫거리다. 작품 속에서 누가 누군지 종잡기 어려워 해석이 갈팡질팡이다. 피에타 군상 중 가운데 인물이 예수고, 뒤에 고깔 쓴 남자가 니고데모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인데, 미켈란젤로가 제 자화상을 여기에다 새겼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성모는 앞에 반쯤 주저앉아 예수의 겨드랑이를 받쳐 잡았다. 반대편에서 작은 마리아가 두 팔을 길게 뻗고 운구를 돕는다. 그러니까 죽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부축해 내려 입관을 서두르는 장면이라는 건 알겠는데, 작은 마리아의 체구가 왜 다른 인물들하고 어울리지 않게 작은지가 문제였다. 또 시신의 자세도 의문투성이였다.
특히 예수의 왼발이 문제가 됐다. 죽은 예수는 왼발이 없다. 부러져 나가 네모난 구멍만 남아 있다. 성서에는 죽은 예수의 발을 잘라냈다는 기록이 없다. 학자들은 사라진 왼발의 형태를 복원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왼발을 새로 만들어 붙이려니 성모의 허벅지 위에 걸쳐진 것이다. 아니, 아들이 어머니하고 허벅지를 맞붙이다니? 이건 피에타고 뭐고 용인될 수 없는 자세였다.
대리석 피에타의 제작 시기는 16세기 중반. 마침 가톨릭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거세게 불붙기 시작할 시기다. 독일에서 신학자 루터가 나서 성상숭배는 미친 짓이라며 들쑤시는 바람에 이탈리아 역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바티칸에서도 자정운동을 한다며 종교미술에 대한 감시가 전에 없이 엄격해졌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이 성자들이 알몸으로 모여 있다는 이유로 호되게 비난받았던 일은 미술사의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가 제 다리를 성모의 허벅지 위에 보란 듯이 걸쳐놓았다. 미켈란젤로도 보통 배짱이 아니다. 미술사학자 톨노이는 이 자세가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 예수가 총각으로 죽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성서에도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꼭 그렇게만 보지 않았다. 예컨대 성녀 카타리나와 아기 예수의 약혼, 성녀 아그네스와 예수의 혼인, 그리고 천상의 여왕 성모 마리아와 부활한 예수가 반지를 나누면서 가약을 맺는 장면 등을 즐겨 다루었다.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은 ‘스포살리치오’라는 주제로 전성기 중세 이후 이미 관행화돼 있었으니 허벅지쯤 걸친다고 문제될 건 없다.
톨노이는 또 이렇게 보았다. 왼쪽 막달레나의 품에 안긴 예수를 니고데모가 번쩍 들어다 성모의 품에 안겨 주는 자세라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상체 움직임과 시선의 방향을 감안하면 틀린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왜 예수의 시신을 막달레나가 끌어안고 있었던 걸까? 그걸 왜 니고데모는 들어다가 성모에게 옮겨준 걸까? 줄거리의 전후 관계를 해명할 수 없다면 구성을 이렇게 짜야만 했던 논리가 막히고 만다.
1997년 미술사학자 모시 아킨이 놀랄 만한 주장을 내놓았다. 예수하고 뺨을 대고 있는 여인이 성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누가 성모일까? 아킨은 막달레나인 줄 알았던 조그만 여자가 예수의 어머니라고 못박는다.
근거는 이랬다. 조그마한 여인의 머리띠를 보면 한복판에 날개 달린 천사가 붙어 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뜻에서 ‘아모리노’라고 부른 작은 천사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항상 성모의 상징으로만 나타난다. 그게 첫째 이유다. 실제로 그랬다. 미켈란젤로도 천사 장식을 자주 사용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모 말고 다른 성자한테 천사를 붙여준 적은 없었다.
또 하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성모와 예수는 언제나 서먹한 관계다. 미술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대로, 어머니는 아들을 외면하거나 엉뚱한 데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바티칸의 피에타’가 그렇고, ‘계단의 마돈나’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에서도 마돈나는 전통 도상 형식을 따르지 않은 채 고개를 모로 젖히고 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조각가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피렌체의 피에타’에서처럼 살갑게 뺨을 맞댄 성모는 미켈란젤로의 조형에서만큼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것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래저래 문제는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니고데모를 빼고 두 여인 가운데 누가 진짜 성모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킨이 옳다면 니고데모는 예수의 시신을 성모의 품에서 빼앗아 막달레나에게 건네주는 게 된다. 더구나 예수는 어머니도 아닌 외간여인의 허벅지에 다리를 걸친 셈이다. 톨노이보다 한술 더 뜬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뒤엉킨 실타래도 잘 보면 푸는 방법이 있다. 작품의 탄생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놓고 보면 의외로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혹시 미켈란젤로는 작업 도중에 구상을 바꾸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뺨을 댄 여인을 성모로 생각했다가, 변덕이 나서 다른 여인하고 역할을 교체했다면? 만약에 먼젓번 구상을 고쳐 대리석을 다시 깎았다면, 왼쪽 마리아의 체구가 기형적으로 축소된 것, 예수의 하체가 상체에 비해 지나치게 여윈 게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또 예수의 왼발을 떼어낸 시점도 1555년 작품을 완전히 때려부술 때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구상을 바꾸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왜 갑자기 이 작품에서 손을 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변덕스런 영혼의 창조적 갈등이 제 묘비 조각에 파멸의 망치를 휘두르게 했는지도 알 수 없다. 1552년에 미켈란젤로가 쓴 미완의 시 한 편이 전해질 뿐이다.
“구상이 틀어졌다. 그르칠 게 뻔하다.
예속과 권태에 질질 끌려다니는 이 따위 영혼으로
신성한 대리석을 깎아 보겠다고?”
‘피렌체의 피에타’. 비운의 조각이다. 훗날 조각가 칼카니가 으깨진 대리석 파편을 거두어 일일이 쇠심을 박아 맞추어두지 않았더라면 영구히 먼지 구름으로 사라질 뻔했다. 조각가는 무릇 끌을 두들겨 대리석에 더운 생명을 불어넣게 마련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피에타’는 미완의 생명을 피우지도 못한 채 처형당하고 말았다. 집행자는 조각가 미켈란젤로.
그의 제자 콘디비가 쓴 기록을 보면 ‘피렌체의 피에타’는 주문 제작한 조각이 아니라고 한다. ‘혼자 즐기려고 피에타를 만들어서… 자기가 죽고 나면 교회에 바치고… 그 피에타가 놓인 제단 발치에 묻히고 싶다고 밝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예술가의 무덤을 장식할 묘비 조각이었던 셈이다. 미켈란젤로가 결혼을 하지 않은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피붙이 하나 없이 대리석과 망치를 벗하여 살았다. 어느 날 성직자가 왜 결혼을 하지 않느냐고 묻자 이렇게 응수했다고 한다. “나는 벌써 아내가 하나 있답니다. 나를 밤낮 괴롭히는 아내지요. 내 아내는 예술이고 내 자식은 대리석이랍니다.” 그렇다면 조각가는 제 손으로 낳은 예술의 자식들에게 영혼의 안식을 의탁하려 한 게 아니었을까?
또 다른 제자 바사리는 이날의 일을 이렇게 설명한다. 대리석 자체에 고약한 결이 숨어 있는데다 어찌나 딱딱한지 망치를 칠 때마다 불똥이 튀었다. 이래서는 작업이 제대로 될 리 없었다. 게다가 허드렛일을 봐주던 우르비노가 부쩍 조바심을 치며 재촉하는 바람에 심사가 틀어지고 말았단다. 짜증을 누르지 못하고 손대다 만 피에타를 산산조각 내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말 이런 이유들 때문이었을까? 우선 대리석이 너무 딱딱해서 그랬다는 건 수긍이 간다. 현재 피렌체 두오모 박물관에 전시된 작품을 살펴보아도 알 수 있다. 쇳덩이 같은 돌덩이를 순전히 팔힘만 가지고 이만큼 깎았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만약 주문 작품이었다면 착수금을 털어 쓸 만한 재료를 조달했을 텐데, 주머니 사정 탓에 싸구려 대리석을 들여온 게 화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옆에서 누가 채근한다고 짜증을 부렸다는 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를 그릴 때도 몹시 닦달을 받았지만 눈 한번 깜빡하지 않던 미켈란젤로다. 율리우스 2세의 묘비 조각을 만들 때도 마찬가지였다.
또 하나. 작품이 제대로 안 돼서 그랬다는 것도 이상하다. 미켈란젤로에게 미완성 조각이 유난히 많은 건 사실이다. 평생 깎은 대리석 가운데 마음에 드는 게 거의 없었다고 실토한 적도 있으니까. 그래도 미완성의 미학 ‘논 피니토’의 이념을 처음 낸 창시자가 아닌가? 그냥 모른 척 내버려두면 그만일 걸 구태여 망치까지 휘둘러야 했을까? 게다가 ‘피렌체의 피에타’는 자신의 묘비 조각으로 생각했다니까 꽤 정성을 들였을 텐데, 그걸 부수기까지 속마음은 또 오죽 탔을까?
토막난 ‘피렌체의 피에타’는 미술사학자들에게도 골칫거리다. 작품 속에서 누가 누군지 종잡기 어려워 해석이 갈팡질팡이다. 피에타 군상 중 가운데 인물이 예수고, 뒤에 고깔 쓴 남자가 니고데모다. 니고데모는 ‘요한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인데, 미켈란젤로가 제 자화상을 여기에다 새겼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성모는 앞에 반쯤 주저앉아 예수의 겨드랑이를 받쳐 잡았다. 반대편에서 작은 마리아가 두 팔을 길게 뻗고 운구를 돕는다. 그러니까 죽은 예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부축해 내려 입관을 서두르는 장면이라는 건 알겠는데, 작은 마리아의 체구가 왜 다른 인물들하고 어울리지 않게 작은지가 문제였다. 또 시신의 자세도 의문투성이였다.
특히 예수의 왼발이 문제가 됐다. 죽은 예수는 왼발이 없다. 부러져 나가 네모난 구멍만 남아 있다. 성서에는 죽은 예수의 발을 잘라냈다는 기록이 없다. 학자들은 사라진 왼발의 형태를 복원하다가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왼발을 새로 만들어 붙이려니 성모의 허벅지 위에 걸쳐진 것이다. 아니, 아들이 어머니하고 허벅지를 맞붙이다니? 이건 피에타고 뭐고 용인될 수 없는 자세였다.
대리석 피에타의 제작 시기는 16세기 중반. 마침 가톨릭에서 반종교개혁 운동이 거세게 불붙기 시작할 시기다. 독일에서 신학자 루터가 나서 성상숭배는 미친 짓이라며 들쑤시는 바람에 이탈리아 역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바티칸에서도 자정운동을 한다며 종교미술에 대한 감시가 전에 없이 엄격해졌다.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에 그린 ‘최후의 심판’이 성자들이 알몸으로 모여 있다는 이유로 호되게 비난받았던 일은 미술사의 유명한 사건이다.
그런데 예수가 제 다리를 성모의 허벅지 위에 보란 듯이 걸쳐놓았다. 미켈란젤로도 보통 배짱이 아니다. 미술사학자 톨노이는 이 자세가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을 암시한다고 설명했다.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 예수가 총각으로 죽은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성서에도 결혼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미술에서는 꼭 그렇게만 보지 않았다. 예컨대 성녀 카타리나와 아기 예수의 약혼, 성녀 아그네스와 예수의 혼인, 그리고 천상의 여왕 성모 마리아와 부활한 예수가 반지를 나누면서 가약을 맺는 장면 등을 즐겨 다루었다. 예수와 마리아의 결혼은 ‘스포살리치오’라는 주제로 전성기 중세 이후 이미 관행화돼 있었으니 허벅지쯤 걸친다고 문제될 건 없다.
톨노이는 또 이렇게 보았다. 왼쪽 막달레나의 품에 안긴 예수를 니고데모가 번쩍 들어다 성모의 품에 안겨 주는 자세라는 것이다. 니고데모의 상체 움직임과 시선의 방향을 감안하면 틀린 주장이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설명이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왜 예수의 시신을 막달레나가 끌어안고 있었던 걸까? 그걸 왜 니고데모는 들어다가 성모에게 옮겨준 걸까? 줄거리의 전후 관계를 해명할 수 없다면 구성을 이렇게 짜야만 했던 논리가 막히고 만다.
1997년 미술사학자 모시 아킨이 놀랄 만한 주장을 내놓았다. 예수하고 뺨을 대고 있는 여인이 성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 누가 성모일까? 아킨은 막달레나인 줄 알았던 조그만 여자가 예수의 어머니라고 못박는다.
근거는 이랬다. 조그마한 여인의 머리띠를 보면 한복판에 날개 달린 천사가 붙어 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사랑스러운 존재’라는 뜻에서 ‘아모리노’라고 부른 작은 천사는 르네상스 미술에서 항상 성모의 상징으로만 나타난다. 그게 첫째 이유다. 실제로 그랬다. 미켈란젤로도 천사 장식을 자주 사용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성모 말고 다른 성자한테 천사를 붙여준 적은 없었다.
또 하나. 미켈란젤로의 작품에서 성모와 예수는 언제나 서먹한 관계다. 미술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한결같이 지적한 대로, 어머니는 아들을 외면하거나 엉뚱한 데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 ‘바티칸의 피에타’가 그렇고, ‘계단의 마돈나’도 마찬가지다. ‘최후의 심판’ 프레스코에서도 마돈나는 전통 도상 형식을 따르지 않은 채 고개를 모로 젖히고 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읜 조각가의 아픈 기억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피렌체의 피에타’에서처럼 살갑게 뺨을 맞댄 성모는 미켈란젤로의 조형에서만큼은 있을 수 없다는 논리다. 이것도 사실로 확인되었다.
이래저래 문제는 미궁 속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니고데모를 빼고 두 여인 가운데 누가 진짜 성모인지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아킨이 옳다면 니고데모는 예수의 시신을 성모의 품에서 빼앗아 막달레나에게 건네주는 게 된다. 더구나 예수는 어머니도 아닌 외간여인의 허벅지에 다리를 걸친 셈이다. 톨노이보다 한술 더 뜬 셈이다.
하지만 이렇게 뒤엉킨 실타래도 잘 보면 푸는 방법이 있다. 작품의 탄생 과정을 시간 순서에 따라 놓고 보면 의외로 해답을 쉽게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혹시 미켈란젤로는 작업 도중에 구상을 바꾸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뺨을 댄 여인을 성모로 생각했다가, 변덕이 나서 다른 여인하고 역할을 교체했다면? 만약에 먼젓번 구상을 고쳐 대리석을 다시 깎았다면, 왼쪽 마리아의 체구가 기형적으로 축소된 것, 예수의 하체가 상체에 비해 지나치게 여윈 게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또 예수의 왼발을 떼어낸 시점도 1555년 작품을 완전히 때려부술 때가 아니라 그보다 앞서 구상을 바꾸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하지만 미켈란젤로가 왜 갑자기 이 작품에서 손을 떼었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변덕스런 영혼의 창조적 갈등이 제 묘비 조각에 파멸의 망치를 휘두르게 했는지도 알 수 없다. 1552년에 미켈란젤로가 쓴 미완의 시 한 편이 전해질 뿐이다.
“구상이 틀어졌다. 그르칠 게 뻔하다.
예속과 권태에 질질 끌려다니는 이 따위 영혼으로
신성한 대리석을 깎아 보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