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29

2008.04.01

‘미술은 이런 것’ 선입견 깨고 동시대적 공감대 찾아라

  • 최광진 미술평론가·理美知연구소장

    입력2008-03-26 16: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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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은 이런 것’ 선입견 깨고 동시대적 공감대 찾아라

    데미언 허스트의 ‘찬가’(2000).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특히 난해한 현대미술의 경우 이 말이 더욱 설득력 있게 들린다. 사실 배경지식 없이 작품을 감상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지식이 새로움을 인식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해버리기도 한다. 감상자들이 현대미술을 어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의 지식으로 작품을 이해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래서는 올바른 감상이 이뤄질 수 없다.

    감상자는 먼저 작가가 그리는 대상이 시각적인 것에서부터 심리적, 정신적, 무의식적인 형상 등 다차원적인 세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작가가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대상을 생각하고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단지 존재의 차원이 다를 뿐이다. 또 다른 중요한 점이 있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어떤 대상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아들인 이미지를 그린다는 것이다. 작품의 대상은 작가의 뇌이지 자연이나 사물이 아니다. 사람들은 우리 뇌가 다차원적인 기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다차원적 작품에 대해 인색한 이유는 그림의 대상이 뇌가 아니라 어떤 객관적 사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사물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없다. 반면 꿈에서와 마찬가지로, 우리 뇌에서는 서로 이질적인 이미지들이나 과거와 현재 등이 결합하고 전개될 수 있다. 이런 점만 이해해도 현대미술에 대한 인식의 폭은 커질 것이다. 인간의 뇌는 환경에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해 작동한다. 때문에 같은 시대, 같은 환경에 처한 사람들은 비슷한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과거 미술보다 동시대 미술이 훨씬 공감대가 큰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컨템포러리 아트가 과거 작품보다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미술은 이런 것’이라는 지식적 선입견 때문이다.

    삼류 작가들은 지식에 의존해 그림을 그리지만, 위대한 작가들은 당대의 편견을 깨고 새로운 환경에 의해 형성된 뇌 속의 이미지를 반영한다. 그렇다면 감상자가 가져야 할 태도 역시 미술에 대한 선입견을 버리고 동시대적 공감대를 찾는 데 있을 것이다. 나의 알량한 지식을 신뢰하고 그 잣대로 재단하지 않고, 나의 지식 너머 미지의 것을 동경할 때 작품은 비로소 무언가를 속삭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작품이 발하는 새로운 정보와 언어를 수신할 수 있다면 우리는 한 차원 넓은 세계를 보고 누리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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