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93

..

돈의 유혹 ‘불나방 바지사장’

단순 명의 대여부터 감옥행까지 물불 안 가려…중개 카페엔 구인·구직광고 버젓이

  •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

    입력2011-06-27 10:18: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돈의 유혹 ‘불나방 바지사장’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다양한 용도로 쓸 명의를 대여해주는 바지사장을 구하는 일은 어렵지 않다.

    “공무원 신분으로 친동생을 불법 게임장 바지사장으로 내세우다니….”

    5월 13일 제주지방법원 제302호 법정. 불법 사행성게임장 운영 혐의로 기소된 서귀포시청 공무원 강모(57) 씨가 고개를 숙인 채 피고인석에 앉아 있었다. 그는 2009년 10월부터 2010년 2월까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의 한 게임장에 사행성 오락기 40대를 설치해 손님을 상대로 불법 환전을 하다 경찰 단속에 걸려 2011년 1월 2일 구속됐다. 재판부는 이날 판결문을 통해 “피고인 강씨는 공무원 신분으로 친동생을 일명 바지사장으로 내세워 장기간 게임장을 운영하고, 단속 후에도 다른 바지사장을 내세워 게임장을 운영하는 등 엄중한 처벌이 불가피하다”고 양형 사유를 밝혔다. 법원은 그에게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공무원마저 죄의식 없이 ‘바지사장’을 고용할 만큼 사회 전반에 바지사장이 퍼져 있음을 알려주는 시금석이었다.

    의료·유통 등 여러 업종에 만연

    바지사장은 명의 대여 사업자를 일컫는 말로, 회사 경영에 참여하지는 않고 운영하는 데 필요한 명의만 빌려주는 ‘유령 사장’을 뜻한다. 바지사장의 유래는 분분하다. 민형사상의 책임을 떠넘기려 총알‘받이’처럼 내세운다고 해서 ‘바지’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고 ‘바지까지 벗어주다(자신의 모든 것을 다 넘겨주다)’라는 관용어에서 비롯했다는 말도 있다. 바지사장으로 행세하다 형을 살면 업체 실소유주가 그의 옥중 ‘뒷바라지’를 해준다는 말을 줄여서 ‘바지’사장이라고 부른다는 설도 있다.

    바지사장의 활동 반경은 다양하다. 의료업, 유통업, 건설업, 유흥업 등 여러 업종에 바지사장이 만연했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 사업자등록증 대여 같은 단순 명의 대여부터 실제로 사업장에 나와 일하는 사장, 벌금 대납에 구속되면 형까지 대신 사는 ‘묻지마’ 바지사장까지 종류도 각양각색이다.



    “보는 눈이 많으니 자리를 피하시죠.”

    최근 경기 화성의 한 카페에서 10여 년간 사행성 게임장을 운영하며 바지사장을 여러 번 고용한 전직 업주 A씨를 만나 바지사장의 세계에 대해 알아봤다. 그는 인근 공단에서 사행성 게임장을 운영하다 작년 말 손을 씻었다고 했다. 그는 2000년 초반 호기심에 사행성 게임장에 발을 들이면서 바지사장을 고용했다. 조건은 간단했다. 누범자는 무조건 실형을 받으니 전과가 없는 사람, 경찰서에서 목청 높여 싸울 수 있는 대찬 사람이면 족했다. 여성은 사절. 그가 택한 바지사장은 일정 직업이 없는 40대 남성들이었다.

    A씨처럼 업주가 바지사장을 내세우는 이유는 돈 때문이다. 바지사장에게 주는 월급과 걸렸을 때 내는 벌금은 게임장 하루 운영으로 벌 수 있다. 바지사장을 고용하는 업주는 명의를 빌려주는 사람에게 월급과 더불어 걸리면 낼 벌금조로 몇백만~몇천만 원을 미리 건네기도 한다.

    바지사장을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급전이 필요한 사람이 주로 바지사장의 유혹에 빠진다. 선입금을 조건으로 ‘뭐든 다 하겠다’는 식이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네이버와 다음에서 ‘명의대여’ ‘바지사장’으로 검색하면 업주가 바지사장을 구하는 글을 심심찮게 찾을 수 있다. 대놓고 ‘바지사장 대리명의 대리징역…’이라는 제목을 써놓은 바지사장 중개 카페도 있다. 2004년 1월 21일 개설한 이 카페의 가입자는 800여 명이다.

    경찰과 국세청 단속도 한계

    돈의 유혹 ‘불나방 바지사장’

    업주에게 돈을 받고 명의를 빌려주는 바지사장이 불법오락실, 유흥업소 등은 물론 의료업, 유통업, 건설업까지 만연했지만 이를 근절하기란 쉽지가 않다.

    “바지사장이든 뭐든 다 합니다. 당장 돈이 필요해서 그럽니다. 통신불량자고, 말소돼 있음. e메일 주세요.”

    최근 기자가 카페에 들어갔을 때도 ‘바지사장을 하겠다’는 내용의 글이 올라와 있었다. e메일을 보내자 서울에 사는 49세 남성이라고 밝힌 그는 “휴대전화 요금이 밀려서 통신불량자가 됐다. 무직이고 전과는 깨끗하다. 급전이 필요해 글을 올렸다”며 “당장 1000만 원이 필요한데 입금해줄 수 있다면 뭐라도 하겠다”고 답변했다.

    반대로 업주들은 솔깃한 조건을 내걸고 바지사장을 모집한다. 신촌과 홍대 등지에서 보도방을 운영한다는 한 업주는 3~4월에 네이버 아르바이트 관련 카페에 바지사장을 구하는 글을 올렸다. 그는 “차명계좌가 필요하다. 차명계좌는 아가씨 관리에 쓸 예정이며 자세한 것은 유선 상담하겠다”고 적었다. 글 아래에 남긴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20세 이상 성인이면 가능하다.”

    그는 “사무실에 출근하는 일이 아니어서 직장인이라도 전혀 상관없다”고 말했다. 기자가 명의를 빌려주면 한 달에 얼마까지 받을 수 있느냐고 하자 “160만 원에서 200만 원까지”라고 말했다. 혹시나 걸리면 어떻게 되는지 묻자 “성매매를 하는 것도 아니고 민짜(19세 미만 여성) 여성은 없으니 (명의를 빌려준 사람에게) 피해는 안 간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업주의 말은 사실이 아니다. 다른 범죄와 달리 명의를 빌려주고 나면 내 이름으로 어떤 일을 벌이는지 알기 어렵다. 단속에 걸렸다가 실사장이 도주하면 자신이 실사장이 아님을 증명하기도 어려워 죄를 고스란히 뒤집어쓴다. 조세범 처벌법 제11조(명의대여행위 등)에 따르면, 조세 회피 등의 목적으로 타인 명의로 사업자등록을 한 자는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명의를 빌려준 사람도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상황이 이렇지만 경찰이 먼저 바지사장 구인광고를 단속하기란 어려운 실정이다. 경찰 관계자는 “명의를 대여해주는 사람을 단속할 권한은 국세청에 있고, 그냥 글을 올린 것만으로는 단속할 수 있는 기준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세청도 단속에 어려움을 겪기는 마찬가지다. 국세청 부가가치세과 관계자는 “‘명의 대여자를 구한다’는 글을 올린 것만으로는 세법상 문제가 안 된다. 그런 사람이 사업자등록을 한 뒤에야 단속할 수 있다”며 어려움을 토로했다.

    현재 국세청은 여러 업종에 만연한 바지사장을 근절하기 위해 3월부터 명의위장사업자 신고 방법과 처리 절차, 포상금 지급 요건을 구체적으로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우편이나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관할 세무서장에게 명의위장사업자를 신고하면 되는 것. 국세청 관계자는 “포상금 100만 원을 받으려면 타인 명의로 사업을 한다는 사실을 입증할 계약서, 통장 사본, 영수증 등 객관적 증거 자료를 함께 제출하면 된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바지사장이 근절될 수 있을까. A씨는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는 업주와 급전이 필요한 바지사장 희망자가 존재하는 한 바지사장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바지사장을 구하면서 월 300만 원, 벌금으로 500만 원 정도를 선지급했습니다. 바지사장이 걸려서 구속되면 변호사 선임비로 2000만 원까지 대주고, 징역을 살면 월급식으로 생활비를 댔습니다. 바지사장을 이용해 큰돈을 벌 수 있는 업주와 한 푼이 아쉬운 바지사장 대기자가 존재하는 한 바지사장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