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46

2008.07.29

지친 영혼 달래주는 도심의 푸른 메아리

대성당 종루만 보고도 참회하고픈 마음 생기지 않을까

  • 정윤수 문화평론가 prague@naver.com

    입력2008-07-21 16:5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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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친 영혼 달래주는 도심의 푸른 메아리

    전북 전주시 전동성당.

    옥천성당의 종소리가 소박하면서도 거룩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그 소리 한번 들으려고 대청호 굽잇길을 따라 옥천-충북 옥천군 옥천읍-까지 갔지만 시간이 맞지 않아 끝내 듣지 못하고 올라왔다. 더구나 옥천성당은 보수공사 중이었다. 분지 형태의 옥천에서는 어디서나 성당 종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그 거룩한 소리는 하루에 세 번씩 울려퍼지지만 정지용이 시 ‘향수’에서 몇 번이고 ‘꿈엔들 잊히리야’라고 읊었던 옥천도 점점 더 광역화되어 도심의 길들은 차량의 소음으로 가득 차고 대전과의 물리적 거리도 짧아졌으며 옛 읍 지역과 새로 개발되는 지역이 점점 더 벌어져, 옥천성당의 종소리는 인근에만 가만히 번지는 소리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물러섰다.

    성당의 종소리. 하루에 세 번씩 울리던 그 소리, 시계가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아침저녁의 6시와 점심때의 12시에 울리는 그 소리를 듣고 하루의 흐름을 가늠하였고, 더러는 새벽에 은은히 번지는 종소리에 의하여 하루의 일과를 좀더 진지하게 대면하기도 하였다. 아주 오래전에 모더니스트인 시인 김광균은 외인촌에서 이렇게 썼다.

    외인묘지(外人墓地)의 어두운 수풀 뒤엔/ 밤새도록 가느다란 별빛이 내리고,/ 공백(空白)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村落)의 시계(時計)가/ 여윈 손길을 저어 열 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古塔)같이 언덕 위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聖敎堂)의 지붕 위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100여 년 역사의 성당들 … 그 검박한 역사 앞에 저절로 머리 숙어져



    물론 문학평론가 김우창은 김광균의 매끄러운 시에 대하여 약간의 공허함을 발견한 적도 있지만, 오늘의 도시 세태에서는 이 같은 주지주의적 묘사마저도 불가능한 것이 사실이다. 소음 덩어리에 파묻혀버린 종소리. 평일에는 인근으로 왕래하는 차량에 의하여, 그리고 주말에는 미사를 드리러 온 신자들의 차량에 의하여 도심의 오래된 성당은 저마다 100년 안팎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그 소박한 위용조차 점점 더 ‘퇴색한 성교당’이 되는 듯싶다.

    그러나 종교의 성격이나 개인적인 신앙심의 차이와 상관없이 도심이나 산야에 성당이 있고, 잊어버린 듯하였으나 어디선가 희미하게나마 종소리가 들려와 고개를 돌리면, 그곳에 의연히 서 있는 적벽돌 성당이 눈에 띄어 그 덕분으로 문득 마음이 가지런히 정돈되는 것이 사실이다.

    쾰른에서의 일이다. 여행책자나 관광엽서에서 늘 보았던 쾰른 대성당. 위치가 어디냐고 물어볼 것도 없이, 쾰른 대성당은 시내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의연한 풍모로 확연히 눈에 들어온다. 대도시 쾰른에 마천루가 왜 없겠느냐마는 대성당만큼 거룩하고 근엄한 자태로 이방인을 맞이하는 공간은 따로 없었다. 오늘의 21세기에도 그러한데, 완만한 구릉과 넓은 평원을 끼고 있는 쾰른이라고 하면, 수세기의 역사 속에서 사람들이 멀리서 순례길을 걸어오다가 저 멀리 높이 솟은 대성당의 종루만 보고도 엎드려 기도하고 참회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마저도 드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곳곳에도 이러한 역사가 틀림없이 100여 년의 일로 자리잡고 있다. 서울 명동의 명동성당이나 중구 정동의 성공회대성당, 그리고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아현동의 그리스정교회 성당에 가면 그 검박한 역사 앞에서 저절로 머리가 숙어지지 않을 수 없다.

    성당 안에 들어가 10분만 있어도 마음의 먼지 사라지는 듯

    지친 영혼 달래주는 도심의 푸른 메아리

    경기 고양시 마두동성당 미사 모습.

    도심을 벗어나면 성당은 ‘믿지 않는 자’에게도 아름다운 성지가 된다. 삶의 본질적 의미가 점점 퇴색되고, 소설 ‘더 로드’의 유명한 소설가 코맥 매카시가 오프라 윈프리와 가진 인터뷰에서 말한 것처럼, 현대인은 ‘자기의 삶을 살아가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평생 남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데, 바로 그런 지친 영혼들에게는 깊은 산속의 고찰은 물론이려니와 전국의 소읍들, 그 읍내의 아늑한 동산에 올라앉은 성당들이 잠시나마 그윽한 피정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작은 곳에 가면 거룩한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점점 확실하면서도 뼈아픈 진실이 되고 있다. 음향 재생장치의 볼륨을 높여서 억지로 주위 소음과 맞싸우는 종소리가 아니라, 소읍의 야트막한 동산 위에서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만이 이제는 마음 깊이 스며드는 유일한 경전이 되고 있다.

    서해대교를 건너서, 남들 모두 해수욕장으로 질주할 때 잠시 그 행렬을 빠져나와 아산 공세리성당으로 들어가보라. 본당은 물론이려니와 그 아래쪽에 있는 지하예배소에 들어가면 당신은 틀림없이 눈물 몇 점을 흘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친 영혼 달래주는 도심의 푸른 메아리

    경기 고양시 행주성당(왼), 충남 아산시 공세리성당.

    동해안 해수욕장을 목표로 정하고 영동고속도로를 질주하다가 문득 다른 생각이 들어 원주에서 국도로 내려서면 당신은 어쩌면 횡성의 풍수원성당이나 신림의 용소막성당에 들를 수도 있는데, 오랜 풍상을 겪으며 100년 안팎의 역사를 가진 성당 앞에서 어쩌면 당신은 처음인 듯 기도를 올리고 싶어질지 모른다. 풍수원성당의 언덕을 따라 올라가면 작은 성지가 나오는데, 그곳에 이르는 언덕길에 세워진, 판화가 이철수의 연작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의 길’ 앞에서 걸음이 옮겨지지 않는 당신의 마음 때문에 멀미를 앓게 될지 모른다.

    멀리 바깥으로 나갈 것도 없이 강변북로, 자유로를 따라서 일산 쪽으로 달리다가 음식점이 많은 행주산성 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그곳에 아주 작은 행주성당이 있어 그 안으로 들어가 낮은 자세로 앉아 5분이나 10분만 있어도 마음의 먼지들이 흡사 진공청소기로 빨아낸 듯 말갛게 씻어진다. 바로 그때, 성당의 종소리가 울려퍼진다면 그토록 아름다운 순간은 달리 없을 것이다. 시인 김경미의 시 명함에 쓴 편지가 생각나는 순간이다.

    돌아와 베란다 저 밑, 공사 끝나가는 성당을 봤지요/ 봄 되면 가서 많이 뉘우치리라 했던 곳이지요/ 붉은 벽돌 위에 쌓인 흰 눈이 꼭/ 남자의 울던 붉던 눈 같지만/ 폐인 된다더니 안 된 그대/ 그 명함 눈 속으로 날려보냈지요/ 마당에 선 성모마리아, 두 손 벌려 그 흰 종이/ 다 받아드는 것 똑똑히 보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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