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6

2007.12.25

그깟 휴대전화냐, 3대는 기본이냐

“없이 사는 게 권력, 내 생활 완전 보장” vs “무슨 소리, 능력 있는 사람들의 필수품”

  • 정현상 기자 doppelg@donga.com

    입력2007-12-19 14: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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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깟 휴대전화냐, 3대는 기본이냐

    휴대전화의 편리함 때문에 동시에 서너 대씩 갖고 다니는 최민철(맨 왼쪽)·곽영도 씨, 휴대전화가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는 배우 최강희 씨.

    휴대전화는 우리 삶의 한복판에 들어와 있다. 요즘 사람들은 휴대전화로 은행업무도 보고 TV도 보며, 구세군 성금까지 낸다. 길거리를 걸어가며 혼자 중얼거리는 사람들(헤드셋을 낀 채)이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고, 초등학교 1학년 교실에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리며, 들일을 하던 농부들이 휴대전화로 중국 음식점에 전화해 자장면 배달을 시키는 게 현실이다.

    고현범 군산대 교수(철학)는 ‘휴대전화 철학과 통화하다’(책세상)라는 책에서 “휴대전화는 이제 말 그대로 생활의 중심이 됐다. 휴대전화가 고장나거나 분실되면 우리는 불안하다. 그 작은 기계가 마치 우리 몸의 일부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 휴대전화가 없을 때는 불편할 뿐 아니라 마치 섬에 고립된 느낌마저 든다”고 썼다.

    이처럼 현대인의 휴대전화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한꺼번에 서너 대씩 갖고 다니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반대로 중독 내지는 의존증을 비난하며 아예 휴대전화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단순하게 말해, 과연 누가 더 현명하고 행복할까?

    갈수록 심화되는 휴대전화 의존증

    휴대전화를 여러 대 갖고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대선 캠프에서 일하는 이들이 먼저 눈에 띈다. 이들 가운데 전략기획이나 정보 파트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특히 휴대전화를 여러 대 갖고 다닌다. 모 후보 캠프에서 일하는 김모(44) 씨는 “도청에 대한 불안감이 있기 때문이다. 상대 진영에 중요한 얘기가 들어가면 안 되니까 조심한다. 자칫하다간 역공작에 휘말릴 수 있어 중요한 이야기는 노출되지 않은 휴대전화를 쓰고, 사적인 통화를 할 경우에만 자기 명의의 휴대전화를 사용한다”라고 털어놨다.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에 관한 일화는 유명하다. 그는 도감청을 우려해 보통 4~5개의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면서 돌려 써온 것으로 알려졌다. 기자들이 그와 통화하려면 보좌관이나 수행비서에게 전화를 걸어 메모를 남겨야 했다. 그랬던 그가 3년 전 자신의 휴대전화 번호를 공개해 화제가 됐다.

    휴대전화를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가격 비교 등 관련 정보를 제공하는 업체(세티즌)에 근무하는 최민철(29) 씨도 3대의 휴대전화를 갖고 있는 ‘헤비 유저(heavy user)’다. 최씨는 PDA 전화기, 통화용 전화기, 내비게이션용 전화기를 동시에 사용한다. PDA 전화기는 일정 관리, 개인컴퓨터(PC)와의 동기화(Synchronization) 등에 유용하다. 통화용 전화기는 보통 3~6개월 주기로 바꾼다. 물론 전화번호의 연속성이 필요해 번호이동은 잘 하지 않지만, 기기 자체가 매력적이라면 이마저도 무시하고 새로 구입한다고 한다.

    “휴대전화 시장은 경쟁이 심해 신규 가입 시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고, 몇 개월 사용한 중고 휴대전화도 제값 받고 팔 수 있어요. 물론 기본료와 가입비에서 손해를 볼 수 있지만 사용한 만큼 비용을 뽑는다고 생각해요. 새 기기를 사용하는 것이 흥미롭기도 하고요.”

    최씨와 같은 다회선 가입자는 얼마나 될까. 10월 말 현재 국내 휴대전화 가입자 수는 4299만7000명. SKT가 2171만4000명, KTF가 1359만7000명, LGT가 768만5000명이다. 이 가운데 500만여 명이 다회선 가입자로 파악되고 있다. SKT(5월 말 기준)의 경우 2회선 사용자가 280만명, 3회선 사용자가 53만명, 4회선 사용자가 12만명, 5~9회선 사용자가 5만명, 10회선 이상 사용자는 3000명에 이른다. SKT 관계자에 따르면, 이는 법인사업체를 제외한 개인 가입자 수다. KTF(7월 말 기준)와 LGT도 다회선 가입자 수가 각각 99만명, 51만명에 이른다. KTF 관계자는 “요즘 업무용과 개인용을 구별해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고, 여러 대의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가족의 경우 1인 명의로 가입하는 예가 많아 다회선 가입자가 많아졌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휴대전화 한 대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또한 제법 있어 흥미롭다. 이들에게 휴대전화는 문명의 이기가 아니라 귀찮은 존재일 따름이다. 우석대 김두규 교수(독문학, 동양학)는 휴대전화 없는 생활 예찬론자다.

    “수업시간에 휴대전화가 울리고 학생이나 교수가 전화받는 모습이 보기 좋지 않아 구입을 자제했던 것이 계기가 돼 이제껏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전화가 좋은 소식을 전하기도 하지만, 내 시간을 방해하는 경우도 많아 전화를 받고 싶지 않은 이유도 있었습니다. 이젠 휴대전화 가진 사람들보다 나만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되고, 내가 하는 일에 집중할 수 있어 좋습니다. 5000원짜리 공중전화카드 1장이면 한 달 넉넉히 사용할 수 있으니 돈도 절약할 수 있고요.”

    배우 최강희 씨도 휴대전화를 갖고 다니지 않는다. 소속사 관계자는 “최씨는 2년 전부터 휴대전화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전화를 못 받으면 전화번호가 찍히니까 곧바로 전화를 해줘야 하는 부담이 있고, 통화를 길게 하는 것도 싫어하기 때문”이라고 전했다.

    ‘88만원 세대’ 저자 우석훈 씨(성공회대 겸임교수)도 같은 부류다. 몇 년 전 휴대전화를 분실한 그는 “나 싫다고 떠난 놈을 다시 들이는 게 자존심 상해서 안 쓰고 버티기 시작한 게 지금까지 왔다”고 말했다.

    “약속도 잦고 취소도 잦고 옛날 그리워”

    “휴대전화가 없으면 처음에는 고립감이 좀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적응이 됩니다.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죠. 요즘엔 휴대전화 없는 게 ‘권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쉬운 쪽은 휴대전화로 통화하려는 사람들이니까요.”

    물론 불편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김 교수도 급할 때는 주변 사람의 휴대전화를 빌려 사용하고, 점잖은 사람이 휴대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할 때 없다고 해서 오해를 사기도 한단다.

    “어느 겨울 강원도 쪽 답사를 가다 눈길에 차가 미끄러졌습니다. 지나가던 차를 세워 휴대전화를 빌려달라고 하자 매정하게 그냥 가버리더군요. 그래서 추위 속을 1km 이상 걸어가 공중전화를 이용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난처한 경우도 생기긴 하지만, 이젠 휴대전화 없는 생활에 적응돼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휴대전화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존재는 그것에 목매달고 사는 대다수 현대인들에게 자신이 어디까지 밀려가 있는지를 되돌아보게끔 한다. 서울 광화문의 한 직장인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휴대전화가 가져온 많은 변화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지나친 휴대전화 의존증을 깨닫는 것이 더 끔찍할 듯하다”며 푸념했다.

    “말 한마디, 약속이 참 귀했던 시절이 있었죠. 지금은 언제든 연결되는 휴대전화가 있으니 약속도 잦고 취소도 잦습니다. 약속시간 직전에도 휴대전화로 사정을 얘기하면 되니까요. 이런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옛날이 그리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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