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6

2007.12.25

영호남 지역주의 지고 서울 지역주의 떴다

예년과 달리 수도권 표 쏠림 현상 뚜렷… 고향 사람 밀어주기 이젠 옛말 된 듯

  • 송홍근 기자 carrot@donga.com

    입력2007-12-19 14: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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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호남 지역주의 지고 서울 지역주의 떴다

    이명박 후보(사진 위)와 정동영 후보의 서울 유세 모습. 이 후보는 서울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보였다.

    정책과 공약이 실종된 희한한 대선이 끝을 향해 치닫고 있다. 결국 ‘네거티브 캠페인’의 성패가 ‘판’을 갈랐다.

    “국민들은 이명박 후보가 깨끗해서 지지하는 게 아니다. 말 잘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일 잘하는 대통령을 바라는 것이다.”(홍준표 한나라당 클린정치위원장)

    그랬다. 범여권의 네거티브 캠페인은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을 끌어내리는 데 역부족이었다. BBK 폭로전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크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밑바닥엔 서울 표심(票心)이 있었다.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이 바닥을 친 때는 11월 말. 11월30일부터 이틀간 실시된 ‘동아일보’ 여론조사에서 이명박 후보는 한나라당 경선 이후 ‘가장 낮은’ 35.7%의 지지율을 기록했다. 그런데 서울의 분위기는 다소 달랐다. 이명박 42.0%, 이회창 17.6%, 정동영 12.6%.

    한마디로 ‘서울’이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 하락을 막은 것이다. 12월5일 검찰의 BBK 수사발표 이후 서울의 이명박 후보 지지율은 절반에 가까운 47.4%로 치솟았다. 정동영 후보는 11.5%, 이회창 후보는 10.7%(12월8일 ‘동아일보’ 여론조사).



    서울, 조금 더 넓혀 ‘수도권’이 17대 대선의 판세를 가른 셈이다(인천·경기는 12월8일 조사에서 이명박 46.4%, 정동영 11.7%, 이회창 9.8%를 기록했다). 언론사들의 여론조사 결과를 톺아보면 이명박 후보의 지지율은 전국< 수도권< 수도권 40대 순으로 두껍다.

    “서울 표심이 몰아주기로 이명박 후보의 우군 노릇을 했다. 서울 위성도시도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지만 표심은 서울과 맞물려 돌아간다.”(한귀영 한국사회여론조사연구소 연구실장)

    청계천 복원 업적 이명박은 서울 후보?

    여기서 잠시, 지난 세 번의 대선 결과를 살펴보자.

    14대 대선 : 김영삼 후보 36.4%, 김대중 후보 37.7%

    15대 대선 : 김대중 후보 38.5%, 이회창 후보 35.5%

    16대 대선 : 노무현 후보 51.0%, 이회창 후보 44.6%

    역대 대통령 선거에서 서울은 ‘접전지’였다. 박빙이거나 표차가 크지 않았다. 그런데 17대 대선에서 이례적으로 쏠림이 나타난 것이다. 일부 여론조사에서 정동영 후보는 10%를 밑도는 지지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한국일보’는 서울의 표 쏠림 현상을 ‘서울 신(新)지역주의 탄생’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했다. ‘민기획’ 박성민 대표의 분석을 들어보자.

    “‘서울 지역주의’가 생겼다고 볼 수 있다. 교육 부동산 세금 등 구체적 이슈에 대한 시민들의 선택은 과거처럼 연고지 기류와 연동되지 않고 독립적으로 이뤄진다. 이런 가운데 이 후보가 청계천 복원 등을 통해 시장직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시민들이 그를 서울 후보로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 호남 출신인 정동영 후보가 호남에선 다른 후보를 앞서지만 호남 출신의 수도권 유권자들은 이와 연동해 움직이지 않았다.”

    김정혜 KRC 이사의 관점은 조금 다르다.

    “서울의 투표 성향이 원적지(原籍地)에 따라 지역여론의 총합체로 나타나다가 이번 대선에서 특정한 경향성을 띤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울 지역주의가 탄생했다고는 보지 않는다. 서울의 표 쏠림은 영호남의 ‘지역투표’와는 성격이 다르다. 서울시민은 계층적으로 제가끔이고, 의식이나 성향도 특정한 방향으로 수렴되지 않는다. 서울이라는 약한 의미의 지역변수에 정치·경제적 변수가 맞물리면서 쏠림 현상이 일어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서울시민들의 원적지 의식이 약화됐으며, 표심에 나름의 지역색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데는 전문가들 사이에 큰 이견(異見)이 없다. 호남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대기업 간부 K(44)씨의 얘기를 들어보자.

    “지난 금요일(12월7일) 대학(서울대)을 함께 다닌 고등학교 동문 모임에 나갔는데, 이명박 후보 지지자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지난 대선 때는 한나라당 지지자가 별로 없었다.”

    폴컴 윤경주 대표는‘호남의 분열’을 17대 대선의 키워드 중 하나로 꼽았다. 15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 16대 대선에선 노무현 후보 당선에 기여한 수도권에 사는 호남 출신 유권자의 상당수가 한나라당을 선택했다는 것.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 ‘광주의 선택’은 서울에 거주하는 호남민들에게 곧바로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선 호남과 수도권 호남표의 상관(相關)이 크게 엷어졌다. 1997년, 2002년 대선에선 민주화 세력에 힘을 실어준 수도권 호남 유권자들의 상당수가 이명박 후보로 옮겨간 것이다. 오피니언을 이끌어가는 서울의 40대는 민주화가 완성됐다고 본다. 민주-반민주, 냉전-평화 구도는 출신지역이 어느 곳이든 그들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었다. 샐러리맨, 자영업자로 상징되는 서울의 40대는 부모를 부양하는 마지막 세대이면서 부양을 바라지 않는 첫 세대다. 그들의 관심사는 부동산 사교육 재테크 등 ‘먹고사는’ 문제다. 정동영 후보 측이 이번 선거의 핵심 어젠다를 잘못 짚은 것 같다.”

    호남과 수도권 호남표 상관관계 크게 엷어져

    옳든 그르든, 지역주의는 한국의 선거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 중 하나였다. “그동안 서울의 표심은 쏠림 없이 정당들이 표를 골고루 나눠 갖는 지역 민심의 ‘총합’에 가까웠다.”(한귀영 실장) 수도권에서 처음으로 쏠림이 나타난 때는 지난해 5·31 지방선거. 한나라당은 서울·인천·경기의 광역단체장을 석권하고 25개 서울 구청장을 싹쓸이했으며, 수도권 66개 기초단체장 가운데 61개 지역을 차지했다.

    “학력, 소득이 높은 서울 거주자들의 합리주의가 지역주의에 근거한 투표 성향을 약화시킨 것으로 보인다. 서울의 표 쏠림 현상은 탈(脫)이념화, 실용주의, 경제담론이라는 키워드로 설명된다. 서울 표심에서 지역색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을 지방보다 소득이 높은 서울의 계급투표라고 보는 것은 무리지만, 서울시민이 상당 부분의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명박 후보가 서울시장을 거친 것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현택수 고려대 교수·사회학)

    영호남 지역주의 지고 서울 지역주의 떴다


    서울 지역주의는 서울 이기주의인가

    그렇다면 영호남의 지역주의가 ‘지역’으로 웅크리고 서울이 나름의 지역색을 띠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서울이 정치적으로 독립적 정체성을 갖기 시작했다”고 보는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학) 등은 행정수도 이전 , 공기업의 지방 이전 논란 등을 거치면서 서울에 지역색이 나타났다고 분석한다. 노무현 정부에 실망한 유권자들의 가려운 곳(부동산, 교육, 세금문제 등)을 이명박 후보가 긁어줬다는 견해도 있다.

    “서울과 지방의 이해가 충돌하는 이슈가 많아졌다. 예컨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대해 서울시민은 찬성하고 농촌 거주자들은 반대한다. 행정수도 이전과 공기업의 지방 이전 논란에서도 서울과 지방의 이해가 엇갈리지 않았는가. 서울의 표심이 지역색을 띠는 현상은 앞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윤경주 대표)

    “수도권 규제 완화 정책을 비롯해 수도권과 지방의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이슈가 늘고 있다. 서울 거주자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서울 지역주의는 ‘서울 이기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측면도 있다.”(한귀영 실장)

    “이명박 후보 당선 시 재개발, 재건축에 대한 기대도 표 쏠림 현상에 영향을 끼친 것 같다.”(김정혜 이사)

    서울 표심이 각종 선거에서 나름의 지역색을 띠는 경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유권자 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수도권 표심이 다음 대선에서도 판세를 ‘갈라버릴’ 가능성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이명박 후보를 지지한 서울의 표심이 새 대통령의 ‘품질’에 또다시 실망한다면 다음 대선에선 또 다른 방향의 쏠림이 나타날 수도 있다.

    대통합민주신당 내부에선 ‘패배의 질’을 따지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온다. 정동영 후보가 30%대 득표율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지 못하면 내년 총선 때 수도권에서 참패하리라는 위기감이 적지 않다. 한 여론조사 전문가는 “17대 대선 캠페인에서 서울의 표심, 좁게는 서울 거주 40대의 마음을 바르게 읽지 못한 것을 대통합민주신당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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