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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많아서 야근한다고? 천만에!

습관성 ‘퇴근 기피족’ 상당수…집안일 피해, 밤에 일 잘돼, 공부하기 편해 ‘이유도 각양각색’

  •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일 많아서 야근한다고? 천만에!

일 많아서 야근한다고? 천만에!

습관성 야근은 나름의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서울의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 A(40) 씨. 근속 12년차인 그는 일주일에 나흘이나 야근을 한다. 법정 공휴일인 토·일요일을 빼면 거의 매일 밤근무를 하는 셈. 오전 9시 출근에 정규 퇴근시각은 오후 6시. 하지만 A 씨가 직장 문을 나서는 시각은 언제나 밤 10~11시 전후다. 그렇다고 그의 야근이 ‘피할 수 없는’ 의무사항인 건 아니다. 그의 직장동료 상당수는 거의 정시에 퇴근한다.

“글쎄… 습관이 돼버린 것 같아요. 밀린 일이 있으면 늦게 퇴근하는 게 당연하겠지만, 일이 없을 때도 왠지 퇴근이 망설여집니다. 길게 꼬리를 문 퇴근 차량 행렬을 보면 번잡함을 피하고도 싶고, 어떤 땐 집에 가는 게 싫기조차 해요. 안 그래도 피곤한데 집에 가면 맞벌이하는 아내와 교대해 여섯 살짜리 딸과 놀아줘야 하니까 부담스러운 거죠. 어차피 주말은 가족과 함께 지낼 건데…. 이렇다 보니 ‘취미라도 가져보라’는 아내의 핀잔을 듣기도 해요.”

A 씨는 “나처럼 밤늦게 퇴근하는 직원이 전체의 3분의 1쯤 된다. 직장에서 저녁 식대도 주는 데다 인근 여의도공원에서 밤 운동도 할 수 있으니 시간을 허투루 보내는 건 아니다”며 “오늘(6월13일) 밤 10시에 열릴 독일월드컵 한국-토고전을 집에 가서 볼까, 사무실에서 볼까 고민 중”이라고 말했다.

A 씨 같은 ‘습관성 야근자’들을 우리 주위에서 적잖이 찾아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드는 의문 두 가지. 그들은 도대체 어떤 심리에서 대다수 직장인의 바람인 ‘칼퇴근’을 한사코 꺼리는 걸까. 퇴근을 미룬 그 시간엔 대체 뭘 하는 것일까. 알 듯 모를 듯한 그들의 속내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올해로 입사 6년째를 맞는 미혼의 회사원 B(32) 씨 역시 ‘자발적 야근’에 인이 박인 케이스. 서울 평창동 빌라에서 혼자 사는 그는 하루 중 수면시간을 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직장에서 보낸다.



“집보다 회사가 더 편해요. 다들 퇴근하고 나면 낮에 회의하고 전화 받느라 제대로 하지 못했던 일을 차분히 할 수 있죠. 상사가 자리에 있으면 위축되기도 하고요. 새벽 1~3시쯤에 집중이 가장 잘 돼요. 게다가 전기요금이나 전화비도 안 들잖아요. 흠, 이렇게 얘기하면 회사에서 싫어할 수도 있겠네. 그래도 스스로 하는 야근인 만큼 시간외수당을 신청하진 않습니다.”

B 씨의 퇴근시각은 새벽 3시. 밤이건 새벽이건, 시간 불문하고 사무실을 자주 들락거리는 그의 행적을 아는 동료들로부터 종종 “도깨비 같다”는 소리를 듣기도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다.

“낮엔 뭐 하냐고요? 일도 하고 사람도 만나죠. 인터넷 서핑과 쇼핑도 하고요.”

B 씨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도 ‘출근’한다. 물론 자발적이다. 우선 텅 빈 사무실이 조용해서 마음에 드는 데다 주차 또한 편하다. 오후 6시에 약속이 있으면 2시간 전에 회사를 ‘경유’해서 약속장소로 간다. 그의 책상 옆엔 인라인 스케이트가 놓여 있고, 좋아하는 책들도 한쪽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B 씨에 따르면, 자신과 같은 ‘솔로’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주말에 사무실에 나와 그들이 하는 일은 다름아닌 공부. 각종 자격증을 따려고 학원을 다니거나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면서 사무실을 ‘공부방’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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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뒤엔 일주일 중 하루 정도는 아내와 함께 보내야겠죠? 가족으로서의 의무니까. 그래도 회사가 ‘생활의 중심’이라는 생각은 바뀌지 않을 겁니다. 제겐 직장이라는 공간이 라이프스타일의 ‘허브(hub)’거든요.”

IMF 외환위기 전후 무차별 구조조정에 떨면서 가정에서조차 소외됐던 40, 50대 가장들이나 겪는 것으로 여겨졌던 ‘퇴근 기피증’이 시대 변화와 더불어 개인주의 성향이 짙은 신세대 직장인 사이에선 웰빙(참살이)이나 여가 선용을 위한 ‘선택’으로 변모하고 있다.

토·일요일까지 자발적 출근하기도

그럼에도 여전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급하거나 특별한 용무가 없는데도 밤늦게까지 직장에 남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저 사람은 분명 가정사가 편치 않을 것”이라고 넘겨짚곤 한다. 그러나 이는 오해인 경우가 더 많다. 습관성 야근자들에겐 나름의 뚜렷한 이유가 있다.

특히 직장 일과 가정 살림이라는 이중고를 떠안아야 하는 기혼 여성 가운데 은근히 퇴근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원인은 대개 직장 일을 마친 뒤에도 감내해야 하는 과다한 육아 및 가사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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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마감하는 퇴근길 행렬.

지난해 첫아이를 낳은 서울 강남의 맞벌이 여성 C(27) 씨가 그런 경우다. 3개월 출산휴가를 마친 뒤 현업에 복귀한 그는 처음엔 아이와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싫었다고 한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퇴근 후 집에서 해야 할 일들에 중압감을 느껴 지금은 오히려 야근을 반기는 형편이다. 일단 회사에 있으면 집안일 생각이 들지 않아 좋다는 것. 가끔은 일찍 퇴근한 뒤에도 일 핑계를 대며 친구를 만나거나 쇼핑을 즐긴다. 아이는 출산 직후부터 살림을 합친 시어머니가 돌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모두 퇴근 기피의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경우다. 문제는 목적이나 동기가 불명확한 퇴근 기피증이 생겼을 때다. 즉, 업무에 대한 완벽주의나 과도한 조바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퇴근을 제때 하지 못하는 경우다.

빈틈없고 야무진 일 처리로 직장 내에서 평판이 좋은 근무경력 15년의 D(39·여) 씨. 그는 일주일에 사흘을 야근한다. 또 다른 이틀은 대개 개인 용무에 따른 약속이 있어서 사실상 평일 내내 밤 10시를 넘겨 귀가한다.

습관성 야근에 대한 D 씨의 변(辯)은 낮보다 밤시간의 업무 집중도가 높은 데다 업무량이 많아 어차피 일찍 귀가하더라도 집에서 잔무를 처리할 것이 분명하므로 차라리 야근을 해서 마무리짓겠다는 것. 친정에서 출퇴근하는 만큼 육아와 살림 문제는 걱정할 것이 없다. 그러나 그런 D 씨에게도 걱정이 없지는 않다.

“야근도 버릇이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야근을 자주 하다 보니 항상 야근할 것을 감안해 업무 일정을 지나치게 빡빡하게 짜곤 한다. 후배들에게서 일중독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다. 사무실 불을 끄고 갈 때의 기분? 그때도 해야 할 일로 여전히 머릿속이 복잡하다. 내일 할 일을 미리 고민하는 것이다. 급한 성격인 데다 일을 쌓아두고 있으면 이것저것 신경이 쓰여 다 지지부진해지는 경우가 생긴다. 그게 못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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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에 과잉 적응된 결과 퇴근에 불안을 느끼는 경우에는 일과 휴식의 균형을 유지하도록 힘써야 한다.

D 씨는 요즘 잦은 야근에 조금씩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그래서 업무시간이 끝난 뒤 공연이나 운동경기를 관람하는 등 야근 자체가 불가능하도록 스케줄을 짜는 방법을 궁리 중이다.

퇴근 기피의 이유는 이처럼 각양각색. 하지만 D 씨 같은 유형의 퇴근 기피증은 아직껏 신경정신과적인 질병으로 규정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은 만큼 반드시 개선되어야 한다.

강북삼성병원 오강섭 정신과장은 “습관적인 퇴근 기피가 격무에 시달린 심신을 조용한 사무실 공간에서 달래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자신의 업무에 과잉 적응돼 퇴근 자체에 불안감을 느끼는 경우라면 불안장애나 우울증이 뒤따를 수 있는 만큼 일과 휴식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지적한다. 한마디로 자신의 인생을 직장에 ‘올인’하지 말고, 시간과 에너지를 적절히 배분해 생활 패턴을 바로잡으라는 뜻이다.

첫째와 둘째, 세 번째 소원이 모두 퇴근인 ‘칼퇴근족’이여, 퇴근을 마다하는 ‘퇴근 기피족’에게 “퇴근 좀 하면 안 되겠니?”라고 무심코 내뱉지 마시라! 그들은 뭔가를 ‘도모’하고 있다. 단 한 가지, 퇴근만 빼고.



주간동아 2006.06.27 541호 (p48~50)

김진수 기자 jock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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