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8

2006.06.06

“병보다 더 고통스런 시청률 족쇄”

  • 배국남 마이데일리 대중문화 전문기자 knbae24@hanmail.net

    입력2006-06-05 09:37: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병보다 더 고통스런 시청률 족쇄”

    ‘맨발의 청춘’

    5월24일 충격적인 문자 메시지 하나가 휴대전화로 날아들었다. 한국 드라마사에 한 획을 그으며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던 작가 조소혜 씨의 죽음을 알리는 내용이었다. 지난해 가을 MBC 일일드라마 ‘맨발의 청춘’ 제작발표회 때 만났던 조 씨의 건강하던 모습이 문자 내용과 교차되면서 그녀의 죽음이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다.

    탁월한 이야기로 잘 짜여진 그녀의 작품을 더 이상 방송에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안타깝다. 그리고 그녀를 쓰러뜨린 병마(간암)의 원인이 시청률에 대한 압박이었을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까움은 더욱 커진다.

    작가로서 한창 꽃을 피울 50이라는 나이에 갑작스럽게 세상과 이별한 조 씨, 그녀의 이름 앞에 필연적으로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드라마 시청률에 대한 공식 조사가 이뤄진 1992년 이후 ‘시청률 1위 작가’라는 말이다. 그녀가 1996년 집필한 최수종, 이승연, 배용준 주연의 KBS 드라마 ‘첫사랑’은 역대 드라마 최고의 회당 시청률인 65.8%를 기록했다. 이 시청률은 아직까지 깨지지 않는 난공불락의 기록이다.

    그녀는 1984년 KBS 단막극 ‘드라마게임-선택’으로 데뷔한 이래 ‘젊은이의 양지’(1995년), ‘억새바람’ ‘종이학’ ‘회전목마’ ‘엄마야 누나야’ 등 시청자의 가슴에 남을 드라마 작품들을 집필했다. 그녀의 땀과 눈물, 그리고 숱한 고민과 고통이 낳은 자식 같은 작품들이다.

    “전 쉽게 글을 쓰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대사 한 줄을 100번 고친 적도 많아요.” 생전의 조 씨가 자주 했던 말이다. 그녀는 그만큼 진지한 창작 태도를 견지했던 작가다. 드라마의 자극적인 요소를 시청자 입맛에 맞게 조합하는 작가들과 근본적으로 다른 작가였던 것이다.



    임종을 지켰던 김승수 전 MBC 드라마국장의 말은 더욱 안타깝다. “4월에 새 드라마 구상차 파리를 여행 중이었는데, 갑자기 몸이 이상해 바로 귀국했지만 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고인은 간암이란 병명을 의사로부터 들을 때보다 더 긴장되고 괴로웠던 일은, 지난해 말 방송된 일일극 ‘맨발의 청춘’ 방송 당시 아침마다 시청률표를 받을 때라고 했다.” 스타 작가였던 조 씨 역시 시청률 지상주의가 유일한 미덕이 돼버린 방송 환경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것이다. 졸지에 조 씨의 유작이 돼버린 ‘맨발의 청춘’은 시청률 저조로 조기 종영되는 아픔을 겪었다.

    “우리 아이는 자라면서 엄마한테 들은 말이라고는 ‘나가 놀아’ ‘조용히 해’밖에 없다며 작가만은 하지 않겠다고 해요.”(작가 김정수) “드라마를 쓸 때는 핏빛이 선홍빛이 아니라 검붉은 색으로 변해요.”(작가 이금림) “대사 한 줄은 작가의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작가 김수현) 조 씨의 부음을 접하면서 유명 작가들이 한 말들이 떠올랐다. 모두 창작의 어려움과 고통에 대한 증언이었다. 조 씨 역시 그런 작가들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런 작가들과 너무도 다른 분위기도 있다. 시청률을 위해 선정성과 자극성으로 무장한 드라마의 요소만을 재탕 삼탕하는, 김수현식 표현으로 한다면 ‘드라마를 너무 쉽게 쓰는’ 작가들도 적지 않다. 문제는 드라마의 진정성을 위해 창작의 산고를 치르는 작가들은 시청률의 덫에 걸려 밀려나고, 대신 시청자의 마음밭에 독초를 뿌리며 시청률을 올리는 작가들이 점점 더 브라운관을 점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어느 작가도 시청률에서 자유스러울 수는 없다. 그러나 시청률이 작가로 하여금 자극과 선정주의에 빠지게 만드는 마약처럼 작용하는 이 환경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작품성과 진실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조 씨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더욱 안타깝다. 저세상에서 쓰고 싶은 드라마를 원 없이 쓰기를…. 그녀의 명복을 빈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