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36

2006.05.23

고량주의 섬, 주당의 천국

  • 글·사진=윤용인 여행웹진 노매드관광청장

    입력2006-05-22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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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량주의 섬, 주당의 천국

    ‘용호화합’의 상생을 상징하는 입출 표식이 재미있는 연지당 내 용호탑.

    금문고량주’라는 술이 있다. 맛과 향이 탁월한 고량주의 ‘지존’으로, 각종 세계 술 경연대회에서 1등을 휩쓰는 대만의 대표 술이다. 이 술을 소개하는 자료에는 ‘술을 만드는 환경과 물이 매우 깨끗하고 좋은 것이 명주의 비결’이라는 칭송으로 가득하다. 바로 그곳, 금문도를 가보자. 술 익는 마을이 아닌 술 익는 ‘섬’으로.

    금문도로 가는 비행기는 타이페이, 타이중, 까오슝에서 날개를 펴고 접는다. 그중 까오슝은 대만 남쪽의 항구도시다. 무릇 세계의 모든 항구도시는 방금까지 바닷속을 유영하다 갓 잡아올린 생선의 싱싱함이 퍼덕이는 곳인데, 까오슝 또한 다르지 않다. 기분 좋은 번잡함과 현지 사람들의 삶의 의지가 태양처럼 충만하다.

    우리에게 서울과 부산이 있듯 대만에는 타이페이와 까오슝이 있다. 둘 다 자기 나라를 상징하는 첫 번째 도시이자 그 뒤를 잇는 두 번째 도시다. 부산과 까오슝은 국제적인 항구도시를 꿈꾼다는 점에서도 닮은꼴이다. 까오슝은 홍콩, 싱가포르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컨테이너 항구를 가지고 있다.

    까오슝은 관광지로서는 여행자의 이목을 끌지 못했다. 특히 한-대만 단교 이후 타이페이로 한국인 여행자가 집중되면서 까오슝은 한국인에게 더욱 낯선 곳이 됐다. 하지만 이 생소함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어느 특별한 날, 특별한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까오슝으로 떠난다면 분명 새로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타이페이와는 다른, 좀더 함축적이고 농도 짙은 중국문화의 다양한 색깔이 펼쳐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본토와 대만 잇는 교두보 … 전쟁의 섬에서 관광의 섬으로



    까오슝에서 여행자의 발길을 분주하게 만드는 곳은 단연 야시장이다. 연평균 기온 24℃, 한여름에는 35℃까지 올라가는 아열대성 기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태양이 숨을 죽이는 새벽과 밤에 활동적일 수밖에 없다. ‘먹고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그 단순한 철학을 야시장만큼 명료하게 보여주는 곳이 또 어디에 있을까. 게다가 책상과 비행기, 사람을 빼놓고는 다 재료가 된다는 중국 음식의 좌판 행렬은 쇼룸을 연상시키는 진풍경을 만들어낸다.

    연지담(蓮池潭)은 여행자뿐만 아니라 까오슝 사람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는 곳이다. 길이 1.4km, 폭 400m의 이 아름다운 연못에는 도교와 불교를 숭상하는 대만인의 종교관이 표현된 춘추각의 관세음보살, 삼태자, 용호탑 등이 있어 여행자를 즐겁게 한다. 특히 용호탑은 용의 목으로 들어가 호랑이 입으로 나와야 하는 입출의 표식이 재미있다. ‘용호쌍박’의 대립이 아니라 ‘용호화합’의 상생이 행운을 가져온다는 뜻이라고 한다.

    어둑해졌을 때 애하(愛河)를 찾았다. 애하는 낭만적인 이름만큼이나 까오슝의 밤을 로맨틱하게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크루즈를 하면서 바라보는 도시 야경은 비록 강물이 아직 완벽하게 정화되지 않은 단점에도 여행자의 가슴에 설렘의 바람 한 줄기를 선사할 만큼 아름답다.

    까오슝에서 비행기로 45분이 걸려 금문도에 닿았다.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 패배한 국민당의 장제스가 대만으로 내몰린 뒤, 이듬해에 바로 이 금문도에서 전쟁이 벌어졌다. 사흘 동안 본토에서 50만 개의 포탄이 날아왔음에도 장제스는 금문도를 중국에 뺏기지 않았다. 그렇게 금문도는 본토 연안에 있는 땅이면서도 우리의 백령도처럼 대만의 최전방 군사요충지가 됐다.

    고량주의 섬, 주당의 천국

    ① 고량주 공장. ② 까오슝의 육합야시장. ③ 제주도의 돌하르방과 같은 금문도의 상징물 풍사얍. ④ 야경이 아름다운 애하. ⑤ 금문도의 해인사.

    금문도는 밤 10시가 되면 섬 전체가 쥐 죽은 듯 잠이 든다. 금문도의 주요 관광지도 전쟁 유적지거나 전쟁 박물관들이다. 심지어 해인사를 보기 위해 올라가는 태무산의 바위들에도 ‘무망재거’, 즉 ‘잃어버린 땅을 잊지 말자’ 같은 총통의 글이나 사령관 훈시 등이 섬뜩한 붉은 글씨로 새겨져 있다.

    한국에 비해 5분의 1 값으로 여행자들 취중 여행

    그러나 금문도는 지금 본토와 대만을 잇는 교두보이자 관광객을 위한 섬으로 빠르게 변하고 있다. 70년대 말부터 불기 시작한 중국과 대만 간 교류의 중심에 금문도가 있는 것이다. 통상(通商), 통우(通郵), 통항(通航) 등 이른바 소(小)삼통의 무대가 바로 금문도다. 특히 푸젠성(福建省) 샤먼에 공장을 둔 대만 사업가에 한해 금문도를 통한 본토 입성이 허용됨으로써 금문도는 본토로 가는 가장 빠른 관문이 됐다.

    전쟁의 섬이 관광의 섬으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물건은 칼이다. 이 칼은 중국이 금문도에 쏟아부은 공포탄으로 만들어진다. 포탄을 잔뜩 쌓아놓고 5분도 안 되는 시간에 뚝딱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내는 과정은 이 섬에 평화의 물결이 얼마나 빠르게 밀려오는지를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금문도는 온통 녹색이다. 금문주의 재료인 수수가 햇빛을 받아 녹색으로 반짝인다. 이 술은 알코올 도수가 58도지만 중국 고량주가 지니는 독특하고 짙은 특유의 향이 나지 않는다. 화학 첨가물을 전혀 넣지 않은 순수 그 자체인 금문주는 목으로 넘어갈 때도 미끄럼틀을 타듯 걸리는 것 없이 넘어가다가 배 안에서 짜릿하게 용암을 터뜨린다. 독주임에도 자기 주량을 훌쩍 넘기며 취할 수 있다는 점, 다음 날 거짓말처럼 숙취의 흔적이 거의 없다는 점은 왜 그토록 많은 주당들의 입에서 금문고량주가 회자되는지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실용성을 중시하는 중국인의 속성 때문일까? 고량주의 명성에 비해 그 술을 담아내는 술병은 지극히 소박하다. 마치 어렸을 때 어르신들이 마시던 소주 됫병을 연상시키는 병이 진열장 안에 가득하다. 만지기조차 겁나는 화려한 위스키, 코냑 등을 보다가 금문고량주의 외양을 보면 선물용으로 한 병 사는 것이 주저될 정도다.

    하지만 금문도를 방문한다면 이러한 주저함이 여행 후에 얼마나 큰 후회로 남는지를 꼭 기억하자.

    한국에서 10만원이 넘게 판매되는 이 술이 금문도에서는 불과 5분의 1도 안 되는 가격에 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술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 이 술을 선물 받았을 때 얼마나 기뻐할지는 여행에서 돌아와야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래저래 금문도는 평화의 섬일 수밖에 없다. 여행자들이 여행 내내 고량주에 취해 다니는 취중의 섬에 평화 이외에 어떤 단어를 대입할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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