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19

..

얼짱, 몸짱 대신 연기짱이라 불러다오

  • 입력2006-01-16 09:32: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얼짱, 몸짱 대신 연기짱이라 불러다오

    몸짱과 꽃미남의 상징이었던 권상우는 ‘야수’를 통해 가장 중요한 남자배우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한 사람의 배우에게는 그를 형성하는 독특하고 강렬한 이미지가 있다. 그것이 없다면 그는 아직 배우로서 대중에게 자신의 개성을 부각시키지 못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권상우라는 배우는 배에 왕(王)자 무늬가 새겨진 몸짱, 싸가지 없는 남자, 버릇없는 압구정족 정도로 생각되었다. 그 이미지를 굳힌 것이 전국 500만 관객을 동원한 ‘동갑내기 과외하기’이고, 그 이미지를 깨뜨린 것이 유하 감독의 ‘말죽거리 잔혹사’다. 이 영화에서 권상우가 맡은 현수 역은 남몰래 좋아하는 여자가 친구 우식과 연애에 빠지자 사랑의 상처를 가슴속 깊이 묻는, 혹은 우식이 싸움에 패한 뒤 학교를 그만두자 수많은 패거리들과 옥상에서 장렬하게 대결하는 그런 남자다.

    모델로 데뷔한 뒤 TV 드라마를 거쳐 ‘화산고’ ‘일단 뛰어’ ‘동갑내기 과외하기’ 같은 영화에서 연속적으로 고등학생으로 등장한 권상우가 교복 입는 영화에 더는 출연하지 않겠다는 스스로와의 약속을 깨고 다시 교복을 입고 출연한 영화가 ‘말죽거리 잔혹사’다. 시나리오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는데, 그가 애당초 원한 배역은 이정진이 맡은 우식 역이었다. 그러나 제작자 차승재와 감독 유하의 설득으로 그는 현수 역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점차 폭발하고 발산하는 연기가 아니라, 안으로 감추고 내면으로 다스리는 연기를 배워나갔다. 영화가 완성된 뒤, 자기가 출연한 영화 중에서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라고 했다.

    “야수, 출연 영화 중 가장 애착”

    그런 권상우가 하지원과 공연한 ‘신부수업’을 거쳐 다시, 자신의 출연 작품 중 가장 애착이 가는 영화라고 말하는 작품을 만났다. 김성수 감독의 ‘야수’다. 그렇다면 ‘말죽거리 잔혹사’보다 훨씬 더 만족도가 높다는 것인데, 영화를 보면 권상우의 그런 흐뭇함이 느껴진다.

    ‘야수’는 권상우를 위한 영화다. 상대 배우로 권상우와 동갑내기인 유지태가 등장하지만 영화적 초점은 철저하게 권상우가 맡은 형사 장도영에게 맞춰져 있다.



    장도영 형사는 거칠고 야성적인 남자다. 어머니는 입원해 있고, 그의 의붓동생은 조폭 세계에 몸담았다가 이제 막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장도영은 병든 어머니를 돌봐주는 여자에게 결혼하자고 말하지만 사랑 같은 것은 모르는 남자다. 그냥 ‘네가 해주는 밥이 맛있고 같이 있으면 편안하고’ 그런 게 사랑이라고 믿고 있다. 굉장히 단순 무식해 보이는 이 남자의 상처는 동생의 죽음이다. 술 취한 동생이 거리의 벤치에서 기다리는 동안 장도영은 근처 편의점에서 숙취해소 음료를 사고 로또복권을 구입한다. 그때 조폭 세계의 중간 보스가 다가와 동생을 칼로 찔러 살해한다.

    장도영은 조폭들을 일망타진하려는 오진우 검사 팀에 들어가 악의 심장부인 조폭 보스 유강진을 향해 다가간다. 그러나 교도소에서 나온 뒤 선교활동과 자선사업으로 갱생의 삶을 사는 것처럼 위장하고 있던 유강진은 매우 교활한 남자다. 그는 정치권에도 줄을 대고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한다. 한편으로는 이권을 챙기는 데 방해가 되는 부하나 동료, 혹은 정적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얼짱, 몸짱 대신 연기짱이라 불러다오

    영화 ‘야수’와 ‘말죽거리 잔혹사’ ‘동갑내기 과외하기’(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는 그에게 ‘명배우’라는 명성을 가져다주진 않았지만, 그 역할들에 그만큼 잘 어울리는 배우도 없다.

    “세 남자가 모든 것을 잃고 파멸하는 엔딩이 마음에 들었다. 관객들이 그런 허무한 감정을 느끼고 극장을 나섰으면 좋겠다.”

    권상우는 이 영화에 끌린 이유를 이렇게 말하면서 “우리나라 영화상이 갖고 있는 문제점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야수’의 장도영 역으로 남자 연기상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야수’에서의 연기에 자신감이 있다는 뜻이다. 데뷔 초, 혀 짧은 발음 때문에 얼굴과 몸은 그럴듯하지만 연기가 안 된다는 비웃음을 사기도 했던 권상우는 그러나 ‘말죽거리 잔혹사’를 거쳐 ‘야수’에 이르면, 그가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남자 배우로 성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상우는 매우 솔직하다. 그는 인터뷰에서 정제된 말로 미사여구만 나열하지 않는다. 가령 영화 속에서 연인관계에 있는 엄지원과의 러브신이 없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렇지 않아도 감독님께 한 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제의했었다. 어머니를 화장시키고 돌아가는 호송차 안에서 뛰어내리는데, 마지막으로 엄지원과 이별하기 전 어떤 식으로든지 두 사람의 로맨스가 들어갔으면 좋겠다고 제의했지만, 영화적으로는 두 남녀의 만남이 어긋나야 하니까 감독님이 나의 제의를 들어주지 않았다.”

    권상우는 ‘야수’ 다음 작품인 ‘청춘만화’의 상대 배우 김하늘과 스캔들이 있었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 과외하기’에서 호흡을 맞춘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두 사람이 결혼할지 모른다는 추측 보도도 있었다. 권상우는 이런 소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액션 직접 소화 ‘열정 가득’

    “영화라는 작업이, 대자본이 들어와 좋은 베이스가 깔려 있는 상황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인간적인 관계가 중요하다. ‘야수’는 감독님이 좋았다. 촬영 내내 나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또 함께 출연한 유지태 씨가 있었다. 믿음직스러운 두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힘들고 지치는 상황이 와도 기분 좋게 촬영했다. 지금까지 찍은 영화 중에서 ‘야수’가 가장 애착이 간다. 이 영화 한 편으로 나를 둘러싼 소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하고 싶다. 나는 연기자다.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권상우는 욕심이 많다.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찍을 때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화산고’에선 장혁을, ‘일단 뛰어’에선 송승헌을 이겨보고 싶었다.”

    동년배 다른 남자 배우들에게 지기 싫어하는 그의 성격상 ‘야수’에서도 유지태를 많이 의식했을 것이다. 1975년생 동갑내기인 두 사람이지만, 유지태는 이미 ‘동감’ ‘봄날은 간다’ ‘올드보이’ 등으로 권상우에 비해 연기력이 낫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유지태는 허진호, 박찬욱 등 우리 시대 최고의 감독들과도 작업을 해봤지만 권상우는 대중적 성격이 강한 영화에 더 많이 출연했다. 권상우, 유지태 두 사람이 서로에 대해 하는 발언을 들어보면 서로의 연기를 얼마나 강하게 의식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야수’에서 보스 역을 맡은 손병호 씨는 누구나 다 아시다시피 연극부터 영화까지 두루 잘하는 선배다. 현장에서 그의 연기를 보고 기가 죽어 집에 들어갔다. 유지태는 좋은 보이스로 연기를 잘해주었다고 생각한다.”(권상우)

    “손병호 선배와 함께 연기할 수 있어 영광이었다. 그동안 영화를 13편 했는데 대부분 선배들과 작업했다. 이번에 권상우의 열정을 엿본 게 고맙고 기뻤다.”(유지태)

    ‘야수’는 자신의 비극적 삶을 의식하면서도 그 비극 속으로 멈춤 없이 걸어 들어가는 주인공들의 삶을 비장미 넘치게 보여준다. 1995년 장현수 감독의 ‘게임의 법칙’이 나온 이후 ‘초록물고기’ 등 수많은 누아르 영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가장 대중적 흥미를 끌 만한 영화다. 그 중심에 권상우가 있다. 연기폭이 아직 넓고 깊지는 못하지만 모든 액션을 직접 소화할 정도의 열정, 그리고 강인함 속에 깃든 연약함이 주는 매혹. 권상우는 ‘야수’로 다시 한 번 충무로의 주목을 받을 것이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