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국국학진흥원 박원재 박사가 필자에게 “유교박물관에 서원 모형을 세우려는데 입지 선정에 풍수를 반영해야 하는가?”라고 물어왔다. 서원의 입지와 풍수의 관계를 물은 것이다.
실제 풍수답사기나 학회의 관련 논문들을 보면 적지 않은 글들이 서원 입지 선정에 풍수가 고려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는데, 나중에 서원 모형이 세워지면 혹시 이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자문을 구한 것이다. 유명한 유적지나 산소들 가운데 풍수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는데도 풍수 호사가들이 억지로 풍수 이론에 꿰맞추어 ‘명당이다, 아니다’ 혹은 ‘터 잡은 사람의 풍수 실력이 있다 없다’ 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입지+자신의 처지 맞는 터 잡기가 ‘생활풍수’
질문을 받고 필자는 그동안 답사했던 유명 서원들의 입지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남명 조식), 경기 파주의 자운서원(율곡 이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퇴계 이황) 등이 세워질 때 풍수설이 고려되었을까?
배산임수라는 것 빼고는 입지 선정에 풍수를 고려했다는 뚜렷한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배향된 학자들이 살고 활동했던 곳 가운데 편안한 자리를 선택했을 뿐이다. 따라서 최근의 답사기나 논문들이 지나치게 풍수라는 잣대로 서원이나 이들의 무덤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풍수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는데도 후세인들이 풍수설로 설명하면 그럴듯한 까닭은 무엇인가?
이와 관련, 퇴계 이황 선생의 도산서당(오늘날 도산서원) 입지 선정 과정을 참고해볼 만하다. 도산서원이 최초의 서원은 아닐지라도 이후 세워진 서원들의 본보기가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퇴계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서당 자리를 잡게 된 경위를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곳은) 산이 그다지 높고 크지는 않지만, 터가 넓고 형세가 빼어나며 방위를 보아도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그러므로 주변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이곳을 향해 읍(揖)하며 감싸드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옛사람들이 산을 좋아할 때에는 반드시 명산에 의탁하던데, 그대는 청량산이란 명산에 의탁하지 않고 이곳에 거처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청량산은 우뚝 솟기가 만 길이나 되고, 깊고 험한 절벽에 있어서 늙고 병든 내가 편안하게 여길 곳이 아니다. …내가 청량산보다 이곳(도산서당)을 좋아하는 것은 산과 물을 두루 갖추어 늙고 병든 나를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풍수설 이전에, 산과 물이 편안하게 감싸는 곳으로 늙고 병든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입지 선정의 일차적 이유였다. 또 서당을 짓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 밭으로 쓰고 있었는데, 근처 돌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은둔하기에 좋은 장소(肥遯之所)”라고 생각하여 잡은 자리다. 퇴계의 터 잡기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원래 도산서당은 퇴계의 땅이 아니었기에 넉넉하게 대금을 치르고 사들였다. 그리고 퇴계가 직접 설계를 하고 법련(法蓮)과 정일(淨一) 스님이 공사를 맡아 5년 만에 완공했다.
퇴계 자신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면서 은둔하기에 적절한 땅을 선택한 것이었지, 풍수 술사들이나 일부 논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기존의 풍수설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 이곳에 풍수설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도 대충 부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풍수설의 본래 출발점이 퇴계와 같은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곳 도산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는 하계마을에 자리한 퇴계의 묘 역시 그렇게 해서 잡은 자리다.
주어진 입지에서 자신의 인생관이나 처지에 맞는 땅에 터를 잡는 것, 그것이 본래적 의미의 ‘생활풍수’다.
실제 풍수답사기나 학회의 관련 논문들을 보면 적지 않은 글들이 서원 입지 선정에 풍수가 고려되었다고 단정하고 있는데, 나중에 서원 모형이 세워지면 혹시 이들이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까 염려해서 자문을 구한 것이다. 유명한 유적지나 산소들 가운데 풍수가 전혀 고려되지 않았는데도 풍수 호사가들이 억지로 풍수 이론에 꿰맞추어 ‘명당이다, 아니다’ 혹은 ‘터 잡은 사람의 풍수 실력이 있다 없다’ 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주어진 입지+자신의 처지 맞는 터 잡기가 ‘생활풍수’
질문을 받고 필자는 그동안 답사했던 유명 서원들의 입지에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하서 김인후), 경남 산청의 덕천서원(남명 조식), 경기 파주의 자운서원(율곡 이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퇴계 이황) 등이 세워질 때 풍수설이 고려되었을까?
배산임수라는 것 빼고는 입지 선정에 풍수를 고려했다는 뚜렷한 흔적을 찾기는 힘들다. 배향된 학자들이 살고 활동했던 곳 가운데 편안한 자리를 선택했을 뿐이다. 따라서 최근의 답사기나 논문들이 지나치게 풍수라는 잣대로 서원이나 이들의 무덤을 재단하려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풍수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는데도 후세인들이 풍수설로 설명하면 그럴듯한 까닭은 무엇인가?
퇴계가 직접 터를 잡은 도산서원과 퇴계 묘(위).
퇴계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서당 자리를 잡게 된 경위를 ‘도산잡영병기(陶山雜詠幷記)’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이곳은) 산이 그다지 높고 크지는 않지만, 터가 넓고 형세가 빼어나며 방위를 보아도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다. 그러므로 주변의 산봉우리와 계곡이 모두 이곳을 향해 읍(揖)하며 감싸드는 모습이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묻기를 ‘옛사람들이 산을 좋아할 때에는 반드시 명산에 의탁하던데, 그대는 청량산이란 명산에 의탁하지 않고 이곳에 거처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청량산은 우뚝 솟기가 만 길이나 되고, 깊고 험한 절벽에 있어서 늙고 병든 내가 편안하게 여길 곳이 아니다. …내가 청량산보다 이곳(도산서당)을 좋아하는 것은 산과 물을 두루 갖추어 늙고 병든 나를 편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즉 풍수설 이전에, 산과 물이 편안하게 감싸는 곳으로 늙고 병든 이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 입지 선정의 일차적 이유였다. 또 서당을 짓기 전에는 어떤 사람이 밭으로 쓰고 있었는데, 근처 돌샘에서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을 보고 “은둔하기에 좋은 장소(肥遯之所)”라고 생각하여 잡은 자리다. 퇴계의 터 잡기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
원래 도산서당은 퇴계의 땅이 아니었기에 넉넉하게 대금을 치르고 사들였다. 그리고 퇴계가 직접 설계를 하고 법련(法蓮)과 정일(淨一) 스님이 공사를 맡아 5년 만에 완공했다.
퇴계 자신이 요산요수(樂山樂水)하면서 은둔하기에 적절한 땅을 선택한 것이었지, 풍수 술사들이나 일부 논문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기존의 풍수설을 따른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지금에 와서 이곳에 풍수설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도 대충 부합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풍수설의 본래 출발점이 퇴계와 같은 구체적인 삶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이곳 도산서원에서 그리 멀지 않는 하계마을에 자리한 퇴계의 묘 역시 그렇게 해서 잡은 자리다.
주어진 입지에서 자신의 인생관이나 처지에 맞는 땅에 터를 잡는 것, 그것이 본래적 의미의 ‘생활풍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