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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의 주부들’ 인기 비결

“맞아 맞아 리네트는 딱 내 얘기야”

  •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맞아 맞아 리네트는 딱 내 얘기야”

“맞아 맞아 리네트는 딱 내 얘기야”
“남편이 잠든 뒤 혼자 ‘위기의 주부들’을 보는 저야말로 위기의 주부입니다.”

미국 영부인 로라 부시 여사가 만찬 자리에서 이런 농담을 건넸을 정도로 최고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라마 ‘위기의 주부들(Desperate Housewives)’. 미국 ABC TV가 방영한 이 드라마는 조용한 미국 교외 마을에서 벌어진 한 주부의 자살을 둘러싸고 그녀의 친구 4명이 배후를 추리해가는 내용의 23부작 코믹·미스터리물이다.

그런데 국내에도 일요일 밤만을 손꼽아 기다리는 ‘위기의 주부들’이 존재한다. 7월24일 KBS가 이 드라마를 첫 방영한 후 두 달도 안 된 사이에 탄탄한 여성 마니아층이 형성된 것. 다음이나 네이버, 싸이월드 등 포털 사이트에는 ‘위기의 주부들’ 팬클럽들이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이 드라마는 KBS 2TV에서 매주 일요일 밤 11시15분에 2회 연속 방영하고, 케이블 채널인 캐치온 플러스(매주 수·목요일 오후 10시10분)와 OCN(매주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오전 11시)에서도 방영한다. 한국 여성들이 ‘위기의 주부들’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구나 다 벽장 안에는 시체가 들어 있다!

이 드라마가 가진 최대 강점은 ‘공감’이다. 바람난 남편에게 버림받은 후 딸과 함께 살아가는 수전(테리 헤처), 네 명의 말썽꾸러기 자녀와 씨름하는 한때 잘나갔던 전직 커리어우먼 리네트(펠리시티 허프먼), ‘살림의 여왕’을 꿈꾸는 브리(마샤 크로스), 부자 남편 덕에 풍족하지만 늘 욕구 불만에 시달리는 아름다운 전직 모델 가브리엘(에바 롱고리아). 이 네 명의 주부는 여성들이 가정생활에서 가지고 있을 만한 고민과 불만을 모조리 표현해준다.



임상심리학 박사인 ‘부부클리닉 후’의 김선희 실장은 “모든 한국 여성들이 네 주부의 모습을 다 가지고 있겠지만, 특히 리네트의 입장에 공감한다”고 말했다.

일에서 남편보다 훨씬 잘나갔지만 리네트는 결혼 후 네 명의 아이를 낳으면서 집에 들어앉게 된다. 하지만 가정은 직장에 비해 뚜렷한 보상이나 성취감이 주어지지 않아 자신의 의미를 찾기 어려워진다. 해도 해도 티가 나지 않는 일에 지쳐가던 그는 일을 좀 줄이고자 가정부를 들이지만, 남편은 젊은 가정부와 바람이 나고 만다. 남편이 결혼하기 전에 사귀던 여자가 남편과 같은 직장에서 일하게 되면서 리네트의 상실감은 극대화된다. 그는 “낙오자가 된 것 같다”고 되뇌면서도,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백방으로 노력하는 ‘극성 엄마’의 성향을 보인다. 이런 모습에 한국 여성들은 공감하고 있는 것.

두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한국 IBM의 이수정(36) 차장은 “직장 생활을 병행하든 육아에만 전념하든, 아이를 키우는 여성이라면 모두 리네트의 입장에 공감하게 될 것”이라며 “주부 또는 부부들이 고민하는 모든 것이 이 드라마에 담겨 있다”고 덧붙였다.

“맞아 맞아 리네트는 딱 내 얘기야”

싸이월드의 ‘위기의 주부들’ 팬클럽 회원들인 양윤성, 이수정, 오하영, 이호연 씨(왼쪽부터).

영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누구나 다 벽장 안에는 시체가 들어 있다’는 독일 속담이 있다. 누구나 비밀이 있다는 뜻인데, 이 드라마는 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즉 인간이 가진 영악함, 통제되지 않는 욕망, 호기심, 질투, 배신 등을 리얼하게 드러내주고 있다는 것. 또 그런 본성을 적당히 감추고 적당히 거짓말을 하는 등장인물들의 행동이 아이로니컬하게도 현실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너무도 쿨해 보여, 현실 속 인물로 보이지 않는 ‘섹스 앤 더 시티’의 싱글 여성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심 씨는 “TV 화면이 정말 예쁘고 선명하다. 이 마을에는 단 한 번도 비가 내리지 않고 항상 맑은 날씨다.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어 보이는 마을 풍경 때문에 인간이 가진 본능, 어두운 그림자가 더욱 강조된다”고 덧붙였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미국 가정의 허구

“영어 교과서에 나오는 백인 주부의 모습이 딱 브리 같다. 한 올도 흐트러지지 않은 단정한 머리, 트윈 니트에 무릎길이 스커트를 입은 채, 쿠키를 굽고 잔디를 가꾸며 바느질을 하고 인테리어를 하는 브리는 전형적인 중산층 주부의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행복을 상징했지만, 이 드라마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위기의 주부들’을 즐겨 본다는, 대기업에 근무하는 30대 중반의 남성 박용 씨의 이야기다.

살림의 여왕 ‘마사 스튜어트’를 연상시키는 브리는 남들이 보기엔 완벽한 아내이자 어머니다. 하지만 가족들은 브리 때문에 숨 막혀한다. 피학적인 성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남편은 자신의 욕구 불만을 바람을 피우며 해소하고 브리에게 이혼까지 요구한다. 사춘기인 아들도 브리에게 반항하고 문제를 일으킨다. 그럼에도 브리는 늘 미소를 띠고 있다. 집안에 대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불만이 있어도 꾹 참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집안이 무너지면 곧 브리 자신이 무너지는 것이기 때문.

박 씨는 “미국의 아름다운 마을에도 살인과 치정이 있고, 아무리 행복해 보이는 부부도 늘 바람을 꿈꾸고 툭하면 별거하고 이혼하며, 그리고 그런 모습들이 일반화된 것을 보면서 미국 중산층 삶의 이면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로맨스와 서스펜스의 절묘한 조화

싸이월드에서 ‘위기의 주부들’ 팬클럽을 운영하는 오하영(26) 씨는 “탄탄한 구성과 풍부한 에피소드, 그리고 로맨스와 서스펜스, 코믹의 절묘한 조화가 이 드라마의 최대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평온한 일상을 보내던 주부 메리는 왜 자살했을까? 주인공인 네 명의 주부가 친구인 메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파헤쳐가는 과정에서 매회 새로운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그 내용이 로맨스가 됐든, 서스펜스가 됐든 잘 버무려져 이어간다. 이혼녀 수전이 매력적인 배관공 마이크와 사랑에 빠지는 에피소드가 나오면 드라마 말미에 마이크의 미스터리한 모습을 보여줘, 도무지 다음 회를 보지 않고는 못 견디게 하는 것이다.

주인공들은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의 주부들이고 미국 현지에서는 딱 그 나이대 여성들에게서 열광적인 호응을 받는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싱글 여성들이 더 좋아한다.

이 드라마의 팬인 양윤성(29) 씨는 “우리 세대는 유학이든, 어학연수든 최소한 단기 여행이든 미국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다. 그런 직간접 경험이 많은 만큼 미국 드라마를 볼 때 그들의 생활과 문화에 더 공감할 수 있다”며 “또한 우리나라의 30세 전후와 미국의 40세 전후가 성향이 비슷한 것 같다. 미국의 20대는 너무 자유분방해 오히려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싱글인 이호연(26) 씨는 “주부들의 이야기이지만, 수전이 마이크와 사랑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런 떨림은 미혼이든 기혼이든 공감대를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주간동아 2005.09.20 503호 (p136~137)

이지은 기자 smile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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