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501

2005.09.06

비밀리에 치러진 눈물의 T-50 초도비행

불사조처럼 일어나 T-50 개발 성공시킨 엔지니어들 … 조국을 12번째 초음속기 개발국으로 진입시켜

  •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입력2005-08-31 17:5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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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밀리에 치러진 눈물의 T-50 초도비행
    8월30일 한국형 고등훈련기 T-50 양산 1호기가 출고되었다. 1992년 10월 시작된 탐색 개발부터 따지면 13년, ‘체계 개발’(97년 10월 시작)이라는 본격적인 개발에만 8년이 걸린 2조원대의 초대형 국책사업이 결실을 보게 된 것. T-50은 대통령이 참석해 출고를 축하해줄 정도로 의미 있는 무기가 됐지만 개발 이면에는 숱한 눈물이 뿌려져 있다.

    ‘골든 이글’이라는 별명을 가진 T-50이 국민 앞에 처음 모습을 드러낸 것은 2001년 10월30일이었다. 이 T-50은 8월30일 양산기(量産機)라는 이름으로 선보인 T-50과는 성격이 다른 ‘시제기(試製機)’였다. T-50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넉 대의 시제기를 만들어 1146회 시험비행을 했는데, 여기서 발견된 잘못을 수정해 안심하고 타도 되는 양산기를 제작해냈다.

    항공기 개발은 ‘이렇게 만들면 이러한 성능을 가진 비행기가 될 것이다’란 가정(假定) 아래 설계도를 만들어 시제기를 제작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인간의 상상에는 한계가 있어, 시제기를 띄워보면 예상치 못한 문제점이 발견된다. 그러면 다시 머리를 맞대 문제해결 방안을 찾아내 이를 시제기에 반영해봄으로써 문제가 풀렸는지 확인해보는데, 이상이 없으면 수정 사항을 양산기용 설계도에 반영한다. 그러니까 시제기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것이 양산기다.

    4대 시제기로 1146회 시험비행

    따라서 시제기를 처음 띄울 때 제작자들은 설렘과 함께 ‘과연 제대로 뜰 것인가’ 하는 두려움에 빠지게 된다. T-50 시제기의 초도비행 날짜는 2002년 10월30일이다. 그러나 이날은 T-50이 진짜로 처음 난 날이 아니다. 시제기는 두 달여 앞선 2002년 8월20일 ‘비밀리’에 처음으로 하늘로 날아올랐다. 왜 T-50 시제기는 비밀리에 초도비행을 했을까.



    이유는 ‘자신이 없었기’ 때문. T-50 시제기를 몰 시험비행 조종사는 공군에서 뽑아주기로 돼 있었는데, 디-데이가 다가오자 공군 지휘부는 T-50 시제기를 신뢰하지 않았다. 때문에 공군에서 T-50 사업을 책임진 항공사업단장 이진학 소장만 애가 타게 되었다. 이 소장은 수십 차례의 점검을 통해 안전을 확신했지만, 지휘부는 “차라리 미국 시험비행 조종사를 불러다 태워라”며 시험비행 조종사의 T-50 탑승을 승인하지 않으려 했다.

    최초의 국산 제트기를 외국인 시험비행 조종사로 하여금 초도비행케 한다는 것은 개발자로서는 치욕이다. 그리하여 갑론을박 논쟁이 벌어져 원래 6월로 잡혔던 초도비행 날짜가 순연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한일월드컵에 정신이 팔려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 그러다 ‘시제기가 추락하는 등 사고가 일어나면 이 소장이 책임진다’ ‘초도비행은 언론에 알리지 말고 비밀로 하라’ 등 무언의 합의가 이뤄져 8월20일이 비밀 초도비행 날짜로 확정되었다.

    비밀리에 치러진 눈물의 T-50 초도비행

    ①1대 치프 엔지니어 전영훈 박사 ②정해주 KAI 사장 ③2대 치프 엔지니어 장성섭 상무 ④3대 치프 엔지니어 하태흡 이사 ⑤T-50 개량 책임자 고대우 팀장 ⑥T-50 수출담당 전완기 박사

    바로 그날 공사 33기를 수석으로 졸업한 시험비행 조종사 조광제 중령은 보란 듯이 시제기를 몰고 창공으로 솟아올랐다가 사뿐히 기지로 돌아왔다. 이 감격적인 장면을 이 소장을 비롯한 몇 명의 항공사업단 장교와 길형보 사장을 비롯한 한국항공의 임직원들만 눈물을 흘리며 지켜보았다. T-50 개발의 일등 공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전영훈 박사 등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눈물의 초도비행이었다.

    그 후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지역 언론이 보도하자 공군과 KAI는 10월30일 언론과 국민을 위한 별도의 초도비행 행사를 준비했다. 이 행사에서 10차례 넘게 시험비행을 한 조 중령은 처음 비행하는 것처럼 비행을 성공시키자 이준 국방부 장관과 김대욱 공군참모총장 등 군 수뇌부들이 조 중령에게 꽃다발을 걸어주고 샴페인을 터뜨리며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이날은 그 누구도 눈물을 훔치지 않았다.

    그날 이후 ‘T-50이 날지 못할 것이다’는 기우를 제기하는 사람은 바람처럼 사라졌다. 대신 ‘T-50은 F-16의 모방품이다(사실 외양은 상당히 흡사하다)’ ‘비행기가 작아서 전투력이 떨어진다’는 등 새로운 마타도어가 등장했다. ‘말 타면 견마(牽馬) 잡히고 싶다’는 속담이 있듯이 시비 걸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기준점이 예닐곱 계단 뛰어오른 것이다. 비판과 망각, 그리고 새로운 고차원의 비판 등장은 T-50 개발 과정에서 비일비재하게 일어난 일이었다. 잠시 시선을 과거로 돌려보기로 하자.

    시비 걸기 좋아하는 사람들 비판

    80년대 후반 KTX(Korean Trainer Experimental)-2라는 아명(兒名)을 가졌던 T-50을 개발해보자는 아이디어를 내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사람은 이 소장과 동기(공사 18기)인 전영훈 중령(미국 미시시피주립대학 공학박사, 현 예비역 대령)이었다. 지금도 ‘전영훈’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그는 대단한 고집쟁이로 통한다.

    경남 사천에 있는 공군 훈련비행단에 가보면 ‘웅웅’거리며 날아다니는 KT-1 기본훈련기를 쉽게 볼 수 있다. 80년대 후반 한국은 KTX-1으로 불렸던 KT-1을 개발하고 있었다. 89년 국방과학연구소(국과연)에 근무하게 된 전 박사는 기본훈련기에 이어 고등훈련기를 만들자는 안을 만들어 요로에 돌렸다. 이때만 해도 사업비는 생각지 않고 자주국방을 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많이 강조되던 시절이라 그래도 쉽게 전 박사는 KTX-2 개발안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무렵 공군은 앞으로 30년간 쓸 새 고등훈련기 도입을 검토했다. 이를 안 전 박사는 즉시 한주석 참모차장을 찾아가 “우리 힘으로 고등훈련기를 개발해낼 테니 외국에서 도입하지 말라”고 읍소했다. 개발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고등훈련기를 만들 테니 수입하지 말라는 억지를 부린 것. 그럼에도 한 차장을 비롯한 공군 수뇌부는 이를 받아들여, 고등훈련기는 꼭 필요한 것만 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90년 공군은 고등훈련기(호크) 20대를 영국의 BAE 사로부터 도입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이 거래가 있기 전 전 박사는 BAE 측과 접촉해 절충교역의 조건으로 ‘BAE는 한국에 고등훈련기 기술을 이전한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리고 호크기 도입 계약이 체결되자 즉각 국과연 기술진을 이끌고 영국으로 날아가 설계 기술을 익혔다. 이때 그는 개발할 고등훈련기의 별명을 영어로는 ‘골든 이글’, 우리말로는 ‘황매’로 정했다. 자연 그가 이끈 팀은 ‘황매팀’으로 불리게 되었다.

    비밀리에 치러진 눈물의 T-50 초도비행

    2002년 10월30일 대국민용으로 치러진 T-50 초도비행 성공 행사.

    황매팀이 1년 남짓 고등훈련기 설계술을 익히고 돌아온 다음인 93년, 공군은 미국의 록히드 마틴(당시는 GD)과 120대의 KF-16을 도입한다는 계약을 맺었다. 이때 절충교역 중의 하나가 록히드마틴은 한국에 고등훈련기 제작기술을 전수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황매팀은 다시 미국으로 날아가 더 수준 높은 설계술을 익히게 되었다. 이때 전 박사는 ‘한국형 고등훈련기는 반드시 초음속이 되어야 하고 미국과 공동투자로 공동개발해야 한다’는 판단을 내렸다.

    전 박사는 옳다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스타일이다. 그가 초음속기 개발 여론을 일으키자 반대 여론도 형성되기 시작했다. ‘초음속기를 개발하면 개발비가 높아져 공군은 새 전투기를 도입하는 데 드는 예산이 줄어든다’는 만만찮은 반론이 등장한 것.

    전 박사는 록히드마틴의 텔업 회장을 만나 “미 공군도 곧 초음속 고등훈련기가 필요해진다. 그러니 한국과 이를 공동개발해 수출하자”라고 설득했다. 그리고 한승수 주미대사에게 몰래 “초음속 훈련기라야 미래 시장이 있다”는 보고를 했다. 이어 김인호 대통령경제수석과 김종휘 외교안보수석, 고건 국무총리와 국회 국방위원들에게 ‘초음속으로 고등훈련기를 개발해야 한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갓 대령으로 진급한 국과연의 연구 부장으로서는 해서 안 되는 정치적 행위를 한 것이다. 만약 기무사가 이 일을 알고 문제를 삼는다면, 그는 중징계를 받고 전역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몸을 던졌던 것. 이 승부수 덕분에 T-50은 초음속기로 나갈 수 있었다. 여기까지가 제1 단계인 탐색개발 단계였다.

    이 무렵 전 박사는 또 하나의 승부수를 던졌다. T-50은 그가 몸담고 있는 국과연이 아니라 T-50 생산을 담당할 삼성항공(KAI의 전신)이 맡아야 한다는 도발적인 주장을 내놓은 것. 그는 “개발자와 생산자가 다르면 사업이 잘못될 경우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는지가 불분명해진다. 책임을 분명하게 하려면 생산자가 개발을 맡는 것이 옳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평온하던 국과연이 발칵 뒤집혔다. 그와 함께 설계술을 익혀온 황매팀원들까지도 경악을 금치 못하고 ‘전 박사를 처벌하라’는 내용의 사발통문을 만들어 돌렸다. 그러나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전 박사의 주장이 옳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국방부는 삼성항공에 초음속기 개발과 생산을 모두 맡기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국과연은 전 박사를 해사(害社)분자로 규정해 대기발령에 해당하는 직권면직 처분을 내렸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 박사가 삼성항공의 부탁을 받고 삼성항공에 개발과 생산권을 주자고 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지만 이는 결단코 아니다. 당시 삼성항공은 초음속기 개발이 실패할 수 있다는 부담 때문에 개발권을 맡지 않으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다 국방부의 강권으로 떠맡게 됐는데, 결과적으로 이 결정이 T-50 개발 성공을 가져온 초석이 되었다.

    이 무렵 정부는 2조원대로 추정되는 고등훈련기 개발비를 어떻게 마련할지를 놓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KTX-2 사업은 또다시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몰린 것. 예산 문제에 대해서는 전 박사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었으므로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다. 재정경제부는 한국개발원(KDI)에 타당성 조사를 하게 한 뒤 전 박사가 주장했던 대로 개발비의 30%는 개발업체인 삼성항공(17%)과 록히드마틴(13%)에 부과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정부는 지갑이 얇아서 업체 측에 개발비 일부를 부담케 한 것인데, 이것이 업체를 적극적으로 뛰게 하는 ‘채찍’이 되었다.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기며 97년 10월 드디어 KTX-2 체계개발이 시작됐는데 바로 IMF 외환위기가 터져 필요한 장비를 달러로 발주한 삼성항공은 심각한 경영위기를 맡게 된다. 이 위기를 반은 사정, 반은 협박으로 읍소하며 버티다 환율이 정상화됨으로써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기총·레이저 탑재하면 공격기

    항공기 개발을 책임지는 최고 기술자를 ‘치프 엔지니어(Chief Engineer)’라고 한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치프 엔지니어는 고공정찰기인 SR-71을 개발한 켈리 존슨인데, 항공기 개발자들의 꿈은 제2의 켈리 존슨이 되는 것이다. 삼성항공은 연구진을 상대로 누구를 KTX-2 치프 엔지니어로 임명할 것인가 논의했는데, 압도적인 다수가 ‘집에서 놀고 있는’ 전 박사를 추천했다.

    치프 엔지니어의 상급자로 전체 사업을 총괄하는 사람을 프로그램 매니저라고 하는데, 이 자리는 삼성항공에 있던 장명광 상무가 맡게 되었다. 그 후 장명광-전영훈 조는 미친 듯이 연구진을 ‘족치며’ KTX-2 상세 설계도를 만들게 했다. 연구원들은 록히드마틴 연구원을 졸졸 따라다니며 배우면서 일하는 이중 일을 수행한 것이다.

    그 결과 2000년 6월에는 한 달 평균 1000장의 도면이 생산돼야 정상인데, 무려 2051장이 생산되는 진기록이 연출되었다. 하지만 그 뒷면에는 설계도를 그릴 수 있는 컴퓨터를 차지하기 위해 집에 들어가지 않는 연구원과 코피를 쏟는 연구원이 즐비한 ‘눈물겨운 모습’이 펼쳐졌다. 그리하여 2001년 10월31일 드디어 시제 1호기를 내놓게 되었다.

    시제기는 모두 넉 대가 제작돼 10개월간 지상 시험을 하고 2002년 8월20일 처음으로 하늘로 날려보낸 것이다. 이렇게 T-50이 개발돼오는 과정에서 엔지니어들은 어떻게 만들 것이냐를 놓고 ‘장이’로서 자존심을 건 심각한 대립을 펼쳤다. 그 결과 불사조처럼 살아온 전 박사가 KAI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KAI는 생산비를 줄이기 위해 록히드마틴이 맡기로 한 T-50 주익 생산권을 가져왔는데 여기에 불법 요소가 있다고 하여 감사원 감사를 받는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장성섭 상무에 이어 하태흡 이사가 치프 엔지니어를 맡은 T-50 사업은 성공을 거두고 양산기를 내놓게 되었다. T-50 개발의 이면에는 치열했던 장이들의 분루(憤淚)와 분투가 숨어 있다. 이들은 T-50 초도비행을 남몰래 해야 하는 서러움을 이겨내며 한국을 세계에서 12번째로 초음속기를 개발한 반열에 올려놓은 진짜 애국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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