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2

2005.04.26

기러기 아빠와 생존 본능

  • 송경모/ 한국신용정보 평가연구실장ㆍ경제학 박사

    입력2005-04-19 16:01:00

  • 글자크기 설정 닫기
    기러기 아빠와 생존 본능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수양(修養)·구국(救國) 단체인 흥사단의 상징은 기러기다. 수많은 기러기들이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대오를 맞춰 하늘을 나는 모습에 도산 선생이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 어떤 새들도 그토록 질서 정연하게 하늘을 나는 경우는 드물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놓고 보면 뛰어난데 큰일을 도모할 때는 모래알처럼 흩어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했던 선생의 심정을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기러기가 최근엔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다. 바로 ‘기러기 아빠’다. 왜 하고많은 새 중에 기러기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기러기가 가을 하늘을 나는 쓸쓸함과 서로 모여서 외로움을 달래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데서 유래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린다. 실제로 처자식을 해외로 보내고 혼자 남아 쓸쓸한 처지에 있는 이들은 기러기와 닮아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일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진화 법칙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도킨스 교수의 이기적 유전자 원리는 여기에도 예외 없이 적용된다. 모든 생명체는 번식을 통해 자신의 적합도를 극대화한다. 문화적 유전자가 번식한 결과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여러 유형·무형의 성과물, 그리고 생물학적 유전자가 번식한 결과인 자식(子息)의 성장은 이 적합도를 극대화하는 직접적인 수단이 된다.

    그들의 희생 더 큰 기회와 실력으로 돌아올 것

    이기적 유전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적합도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면, 아무리 고상한 이념도 표면상 구실에 불과하다.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재산이나 권력을 조금이라도 늘릴 목적으로 프로그래밍된 메커니즘, 즉 번식 본능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정치가와 기업가는 이를 아예 드러내놓고 살아간다. 반면에 드러내놓진 않지만 결국은 그것을 추구하는 분야도 많다. 심지어 교육이나 종교조차 이 프로그래밍의 고리를 끊은 진정한 소수의 초월자를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이 본능에 종속되어 있다.



    기러기 아빠 역시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노력의 소산이다. 왜 그토록 영어에 한맺혀 있을까. 왜 그토록 외국 학력에 줄을 대려고 발버둥 칠까. 이것은 적합도를 극대화하려는 자연스러운 적응 현상이다. 국내에서 아무리 발버둥 쳐보았자 기회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해일을 눈치 챈 야생동물들이 본능적으로 산으로 오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여기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이 사회가 제공하는 프로그램대로 성실하게 살아도 돌아오는 것은 언제 실직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 고단한 삶, 보장되지 않는 노후뿐이다. 내 자식에게까지 이런 삶을 물려줄 것인가. 다시 말하면, 나의 확장된 유전자에게까지 이런 고통을 다시 지울 것인가.

    그러나 기회는 사라진 것이 아니다. 눈앞의 기회만이 사라졌을 뿐이다. 저 너머에는 더 많은 기회가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우리 눈앞의 기회를 모두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한국에서 발버둥 쳐보았자 더는 뜯어먹을 기회가 없게 하는 것이 차라리 낫다는 것이다. 싱가포르나 홍콩의 국제금융가에는 한국 사람이 정말 드물다.

    인도 사람, 중국 사람이 판을 치고 있다. 아시아 지역의 돈줄을 쥐고 있는 그곳에서 한국 사람은 눈 씻고 찾아봐야 한 둘 정도다. 그 이유를 싱가포르 소재 미국계 은행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친구에게 물었더니, 인도나 중국의 우수한 인재들은 아예 자국에서 일할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이란다. 자국이 워낙 못살고, 기껏 취직해서 받는 월급이래봐야 얼마 되지 않으니, 학교 다닐 때부터 외국계 회사를 목표로 해 공부를 한단다.

    도전과 응전이다. 척박한 환경에서는 그만큼 생존을 위해 분투한다. 그리고 번식한다. 한때 희망은 젊은이들의 창업 정신이자 기업가 정신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안정적인 취업의 기회가 깡그리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 기운마저 사그라지는 것 같다.

    한국은 1970년대 이후 경제성장을 한 이래 아직까진 도전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그런 기회가 한정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배부른 시절은 끝났다. 국내에서 일자리 창출이 안 된다고 볼멘소리를 한다. 기업들이 자꾸 외국으로 나간다고 불평한다. 그러나 오히려 자꾸 나가게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학생들은 나가기는커녕 고시촌의 비좁은 방으로만 몰리고 있다.

    100년 전 도산 선생은 미국으로 갔다. 그의 아호처럼 이땅의 바다에 떠 있던 수많은 섬산(島山)들을 바라보며 갔다. 그는 기러기의 단결을 부러워했다. 지금 기러기 아빠의 처자식들도 미국이나 신천지를 향한다. 그들의 희생이 그냥 이역 땅에서 사라지겠는가. 오히려 더 큰 생존력의 원천이 되어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역설적으로 지금의 절망적인 현실이 오히려 고맙기도 하다.



    댓글 0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