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69

2005.01.18

“신약 개발, 승산 있는 싸움이죠”

생체사업단장 유성은 박사 … “인적 자원 풍부, 연구 몰두할 환경 만들어주었다면”

  • 김홍재/ 사이언즈타임즈 기자 ecos@sciencetimes.co.k

    입력2005-01-14 11: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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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약 개발, 승산 있는 싸움이죠”
    “삽 한 자루 가지고는 불도저와 경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불도저 한 대를 갖고 있으면 노력 여하에 따라 수십대의 불도저와도 겨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힘으로 신약을 개발하기 위해 만든 생체기능조절물질개발사업단(이하 생체사업단)을 이끌고 있는 한국화학연구원 유성은 박사(54·사진)의 말이다. 과학기술부의 21세기 프런티어 사업으로 2001년 출범한 생체사업단에는 2011년까지 해마다 100억원씩 총 1000억원이 투자된다. 그러나 수십년간 금맥을 보장하는 신약 개발에 대한 선진 각국의 거대한 투자 규모를 고려하면 매우 힘겨운 싸움이다.

    “미국의 제약회사 머크가 1년에 기술개발(R&D)에 투자하는 액수만 24억 달러(약 2조5000억원)입니다. 한 회사가 투자하는 액수가 국내 전체 바이오테크놀로지 투자액보다도 훨씬 많죠. 그러나 생체사업단은 불도저 한 대를 갖춘 셈이기 때문에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맨손으로 하는 일에는 한계가 있지만 최소한의 장비만 갖추면 경쟁할 수 있다는 ‘불도저론’을 펼치면서 자신감을 내비치는 유 박사. 그는 고혈압 치료제와 먹는 항암제, 뇌중풍(뇌졸중) 치료물질 등을 개발한 국내 최고의 신약 개발 전문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약효·투여 방법·안전성 만족까지 인내가 중요



    보건산업진흥원이 펴낸 ‘국내 발명자의 미국 출원 의약품 특허 동향’에 따르면 유 박사는 가장 많은 미국 의약특허를 갖고 있는 한국인이다. 그는 2004년 올해의 한국화학연구원(KRICT)으로 뽑혔고, 6억원의 기술료를 거둔 성과를 인정받아 한국화학연구원 최초로 ‘영년직 연구위원’으로 임용되기도 했다. 영년직 연구위원이란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정년을 61세까지 보장하고 연봉의 20%를 더 지급하는 제도를 말한다.

    “최근 국가적 화두가 되고 있는 국민소득 2만 달러 시대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고부가가치 사업을 창출해야 합니다. 생체사업단이 도전하는 신약 개발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이런 과제를 성공해야 선진국 진입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이 어떻게 개발되는지 물으면 유 박사는 항상 철인 3종 경기 얘기를 꺼내곤 한다. 수영을 3.9km 하고 사이클을 180km 탄 후 42.195km를 달려야 하는, 인간 한계에 도전하는 경기다.

    “신약 개발은 약효와 투여 방법, 안전성을 모두 만족시키는 물질을 찾는 일입니다. 철인 3종 경기의 우승자를 뽑는 것과 같죠. 어렵게 약효가 좋은 물질을 찾아내도 투여 방법이나 안전성이 부족하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자각 증세가 없는 환자에게 하루 세 번 먹어야 하는 약은 먹지 않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효과적이지 않습니다.”

    약효와 투여 방법, 그리고 안전성이라는 3박자를 고루 갖춰야 하기 때문에 새로 개발한 치료물질이 실제 약이 되기까지는 보통 10~15년의 긴 시간이 걸린다. 그가 2001년 개발한 뇌중풍 치료물질만 해도 현재 영국에서 임상 1단계 시험이 진행하고 있어 실제 시판되기까지는 아직도 여러 해를 더 기다려야 한다.

    “국내에서는 아직까지 연구개발 성과가 바로 나오길 기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신약 개발은 특히 인내가 중요합니다. 제가 승산이 높다고 말한 까닭은 신약 개발은 결국 머릿수 싸움인데, 우리는 인적자원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은 100명 가운데 1명만 똑똑해 나머지는 그 사람을 보조하고 있지만, 우리나라는 100명이 모두 똑똑하거든요.”

    유 박사는 “인적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은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지, 현재 능력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면서 “신약 개발의 산업적 가치를 고려해 일생을 걸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줬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2011년까지 후보물질 20여개 발굴 야심찬 목표

    초등학교 때부터 과학자를 꿈꿨다는 유 박사의 이력을 살펴보면 화려하기 그지없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그는 미국 예일 대학에서 유기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하버드 대학에서 박사후 과정(Post Doctor)을 밟았다.

    “하버드 대학에서 일라이어스 제임스 코리 교수 밑에서 연구했습니다. 상당히 활달한 분으로 많이 혼나기도 했는데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받았습니다.”

    코리 교수는 복잡한 분자의 합성을 단순화하는 기술인 역합성 분석법을 개발해 1990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역합성 분석법은 물질을 섞어 화학물을 만드는 대신 화학물을 쪼개 단순한 출발물질을 찾는 방법이다. 효율적으로 유용한 물질을 합성하는 방법을 찾아내는 지름길을 제공한 것이다.

    공부를 마친 유 박사는 세계적인 화학회사 뒤퐁에서 79년부터 86년까지 연구원으로 일했다. 뒤퐁 중앙연구소에서 8년간 신약개발 연구를 진행하면서 잘나가던 그가 돌연 귀국을 결정한 이유는 20년 전 하와이 와이키키 해변에서 마신 맥주 한잔 때문.

    “하와이에서 열린 학회에 참석했다가 나중에 과학기술부 장관을 역임한 채영복 한국화학연구원 소장을 만났습니다. 그날 저녁 그분이 맥주 한잔을 하시면서 국내에 돌아와 연구했으면 한다는 유혹에 넘어갔다고나 할까요?”

    87년 유 박사가 귀국할 당시 국내에서는 신약 개발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막 퍼지고 있었다. 같은 해 물질특허가 발효되면서 로열티 때문에 국내 제약회사들이 엄청난 타격을 받게 됐기 때문이다.

    “87년 당시 우리 제약회사들은 외국에서 물질을 들여와 가공하는 수준에 머물렀습니다. 이제 그동안 그렇게 높게 생각되던 세계 수준의 벽을 넘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생체사업단은 2011년까지 치매, 고혈압, 당뇨, 비만 등에 대한 라이선싱이 가능한 신약 후보물질을 20여개 발굴한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 시간은 좀더 걸리겠지만 이들 중 상당수가 진짜 신약으로 탄생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국내에서 개발된 신약이 아직까지 다섯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상당히 야심 찬 계획이다.

    “어려운 연구에 전념할 수 있는 원동력은 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이것을 성취했을 때 맛볼 수 있는 보람입니다. 하루라도 새롭지 않은 날이 없다고나 할까요. 열심히 하면 대가는 반드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유성은 박사 약력

    1950년 서울에서 태어남

    1972 서울대 화학과 졸업

    1974 서울대 대학원

    1997 미국 예일 대학 이학박사

    1977 미국 하버드 대학 연구원

    1979~1986 미국 E.I. Dupont Co. 선임연구원

    1987 한국화학연구원

    1988 한국화학연구원 의약연구부 부장

    1991 한국화학연구원 신물질연구사업단 단장

    1993 한국화학연구원 의약연구부 심장순환기계연구팀 팀장

    1997 (현)한국화학연구원 화학물질연구부 심장순환계연구팀 팀장

    2001 (현)생체기능조절물질개발사업단 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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