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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이색도시 ③ |이탈리아 볼로냐

‘박람회와 이벤트’ … 이 도시가 사는 법

  • 글·사진/ 볼로냐=이기숙 동아일보 출판기획팀 기자 ks0604@donga.com 한국토지공사 협찬

‘박람회와 이벤트’ … 이 도시가 사는 법

‘박람회와 이벤트’ … 이 도시가 사는  법

볼로냐시 전경.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했던가. 그 길을 따라 이제 모든 문화상품은 이탈리아 볼로냐로 통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으리라. 연간 각종 박람회 65회, 국제회의 400여회, 2만3000여개의 전 세계 기업 부스…. 연중 쉬지 않고 열리는 페스티벌과 이벤트의 도시, 유럽 각국의 대도시로 연결되는 편리한 교통과 세계 최고 수준의 디자인 감각 덕분에 전 세계 장사꾼들이 몰려드는 문화예술의 도시. 박람회와 이벤트로 일군 볼로냐의 현주소다.

로마에 유학 와 10년째 가이드로 일하고 있는 장주호씨(41)는 1년의 절반 이상을 볼로냐에서 살다시피 한다. “박람회 규모로는 화장품과 어린이책이 가장 크지요.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맞기 전까지는 화장품 박람회에 몰려든 인파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일 정도였어요. IMF를 맞으면서 뜸했는데 그 인파가 다시 아동도서전에 몰리는 것 같습니다.”

유럽 最古 대학 등 지적 인프라 막강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운영위원 유타 파케니스씨(45)는 과거 학문의 도시 볼로냐가 오늘날 세계적인 박람회 도시로 부흥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유럽 최고(最古)의 대학’과 ‘볼로냐의 지적 토양’을 꼽는다. “오늘날 이탈리아가 패션은 물론 각종 비주얼 상품에서 세계 최강국의 자리에 오른 데는 축적된 지적, 문화적 풍토가 중요하게 작용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시당국이 힘을 쏟고 꾸준히 정책적 지원을 한 것이 더욱 중요한 요인이라고 생각합니다.”

‘박람회와 이벤트’ … 이 도시가 사는  법

볼로냐대학 인근 상가 골목.시 한가운데에 있는 탑에 올라가면 볼로냐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가리발디 장군 동상.(위 부터)

웅진닷컴 국제부 저작권팀장 김경순씨(40)가 한마디 거든다. “40년 전 세계 유일의 아동도서전을 열어 현재까지 독보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데는 볼로냐의 특성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1088년 세워져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인 볼로냐대학이 상징하듯 볼로냐에는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는 지적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지요.”



인구 40만명이 채 안 되는 작은 도시 볼로냐는 박람회로 먹고사는 정도를 넘어 이탈리아에서 소득 수준이 밀라노에 이어 두 번째로 높다. 그렇다면 이 작은 도시의 무엇이 세계적 규모의 박람회와 이벤트를 가능케 했을까.

볼로냐 한복판에 있는 탑 정상에 올라가보기로 했다. 498개 나무계단을 올라 도착한 정상에서는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맑은 날이면 멀리 알프스까지 보일 정도란다. 서양사람들에게 원을 그려보라고 하면 이탈리아 사람만큼 지름이 일정한 동그라미를 그리는 사람이 없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인지는 몰라도 탑이 있는 마조레 광장을 중심으로 정확히 방사선으로 시가지가 펼쳐져 있다. 의외로 관광객은 눈에 띄지 않는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이들뿐이다.

탑 위에서 보니 도시가 먼저인지, 대학이 먼저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만큼 전형적인 대학도시의 모습이다. 탑에서 내려와 지나가는 사람에게 볼로냐대학의 위치를 물으니 “바로 여기서부터”라며 아케이드 거리를 가리킨다. 유럽의 오래된 대학이 다 그렇듯 카페와 극장, 서점, 주택, 크고 작은 가게들이 한데 뒤섞여 있다. 햇빛과 비를 막을 수 있게 지붕을 덮은 중세 주랑식(포르티코) 건물들을 따라 계속 올라가니 박물관에 이어 대학본부가 나온다.

교통경관이 있든지 말든지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들, 담배를 문 채 오토바이를 타는 여대생의 모습, 그리고 여행자를 유혹하는 노천카페의 여유로운 정경 등은 사진 속 모습 그대로다. 한 학기 등록금이 300유로(약 36만원)가 채 안 되는 데다 입학제도에 특별한 제한이 없어 전 세계 젊은이들이 볼로냐대학에 몰려든다. 하지만 졸업하기는 까다로워 10년 이상 학교를 다니는 경우도 허다하다고 한다. 대학건물 곳곳엔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곳 출신 학자들의 조각상이 눈에 띈다. 코페르니쿠스, 에라스무스, 페트라르카, 보카치오, 단테…. 전통의 위력이 바로 느껴진다. 볼로냐대학은 표현기술을 다루는 수사학의 명문이자, 로마법 개정안을 마련한 법학의 명문이다. 오늘날 최고의 감각을 자랑하는 저작물이 나오는 것은 필연인지도 모르겠다.

커피자판기 앞을 지나다 에스프레소가 종류별로 있는 것을 보고 한 잔 빼 들었다. 맛을 보니 내 입엔 호텔 커피숍 커피보다 낫다. 다리도 쉬고 출출해진 배도 채울 겸 시내로 나와 식당을 찾았다.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식도락의 도시 볼로냐에 왔으니 이왕이면 제대로 된 파스타를 먹고 싶어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골랐다. 종업원에게 볼로냐의 대표적인 음식을 물으니 ‘토르텔리니’라며 옆 테이블을 가리킨다. 우리의 물만두와 같은 배꼽 모양의 꼬마만두다. 프랑스산에 버금간다는 이탈리아 와인을 곁들인 토르텔리니의 맛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했다.

‘박람회와 이벤트’ … 이 도시가 사는  법

고대 학자의 조각상이 새겨져 있는 볼로냐대학.상점, 극장 등이 한데 섞여 있는 볼로냐대학의 주랑식 건물. 전망대로 인기 있는 시에서 가장 높은 탑. 볼로냐 시민보다 더 많이 마주치게 되는 한국인 관광객들.(왼쪽 부터)

인구 40만명 불과 … 소득 수준은 최상위권

식당에서 나오니 3일째 내리던 비로 겨울 추위마저 느끼게 하던 날씨가 갑자기 변해 햇빛이 환상적으로 내리비치고 있다. 10여분 정도 걷다 보니 어느새 중앙역. 이곳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가니 박람회장이 보인다. 전세 버스들이 진을 치는 바람에 박람회장 주변의 교통체증이 무척 심해 노선버스가 들어갈 수 없다고 한다. 모여든 관람객과 차들로 번잡한 풍경이 한산한 시내 중심가와 매우 대조적이다. 조용한 고도 볼로냐의 거대한 변신이 아닐 수 없다.

다시 피에라로 돌아오면서 보니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아시아인이다. 그중 들려오는 말의 상당수는 한국어. 이국에서 들리는 고국어에 대한 반가움에 앞서 엄청난 수에 놀랄 수밖에 없다. 4월2일부터 5일까지 열린 국제아동도서전의 외국 관람객과 참가 부스는 예년에 비해 줄었다고 하나 한국인은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주최측은 올해 참가한 62개국 1300여개 부스 가운데 한국 부스는 모두 9개에 지나지 않는데 방문객의 20% 정도가 한국인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하지만 실제 느낌은 행사 관계자를 제외한 순수 방문객의 절반 이상이 한국인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한 사람 건너 부딪히는 이가 한국인이다. 순전히 아동문학에 대한 높은 관심 때문이라고 봐야 할지 잠시 혼란스럽다.

박람회장에 들어서니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로 선정된 작가들의 작품이 픽션 부문(85명)과 논픽션 부문(41명)으로 나뉘어 전시되어 있는 것이 먼저 눈에 띈다. 어린이 그림책 작가의 등용문이라 할 수 있는 이번 행사에서 조재영 경민대 디지털만화과 교수(42)와 그림책 작가이자 번역가인 조은수씨(38)가 국내에서 활동하는 작가로는 처음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조재영 교수는 “기쁜 마음에 달려오긴 했지만 박람회 주수입원으로서의 한국시장에 대한 인사치레라는 느낌이었다”면서 한국이 최근 5~6년간 최대의 고객이면서도 행사에 대한 영향력은 전무한 데 대한 안타까움을 나타냈다.

‘박람회와 이벤트’ … 이 도시가 사는  법

국제아동도서전이 개막된 피에라(박람회) 전경. 홀과 홀 사이를 작은 야외공원으로 연결해놓았다. 주말 아이와 함께 학습서 코너에 몰려든 이탈리아 부모들. 교육열은 어디나 마찬가지인 듯.(왼쪽 부터 시계방향)

홀에 들어서니 부스마다 개성이 넘쳐 마치 그림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듯한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다. 홀과 홀 사이도 야외로 연결되어 있어 벤치에 앉아 있노라면 산책 나온 기분이 들 정도다. 홀 양편으로 나 있는 여러 개의 출입문은 환기에도 큰 도움이 돼 내부에서 담배를 피워대도 참을 만하다. 관람하는 내내 쾌적한 느낌이 드는 건 동선을 최소화한 까닭도 있지만 역시 신선한 공기 덕분이다. 실제로 관람객은 물론 출판 바이어들이 하루 종일 박람회장 안에서 미팅하고 헌팅하기 위해 홀과 홀을 옮겨 다니면서도 피곤을 느끼지 않도록 고려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기저기 앉아서 피자를 먹는 사람들이 눈에 띈다. 피자 굽는 냄새를 따라 홀 한켠에 있는 바로 가봤다. 역시 절반이 한국인이다. 5년째 한국 관람객을 인솔해 볼로냐를 찾고 있다는 CNC투어 김미숙 과장은 “과거엔 출판 관계자들이 99%였지만 2~3년 전부턴 타업종 사람들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많이 방문한다”고 말했다. 방문자 명단을 보니 벤처투자회사, 홈쇼핑업체, 완구업체 직원 등이 전체 직원 참가자의 20% 이상은 돼 보였다.

국제아동도서전 한국인들로 북새통

이런 면에서 창립 초기인 1997년 단 4개의 품목으로 독립 부스를 차린 뒤 지금까지 7년째 거르지 않고 우리 저작물을 소개하고 있는 이호백씨(42)의 경우는 한국 출판인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화가이자 동화작가인 그가 해마다 국제아동도서전에 참여하는 감회는 남다르다.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편집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좋은 책’에 대한 감각과 균형감각을 익힐 수 있어 다소 무리가 되더라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곳에 와서 깨닫게 된 사실은 우리의 출판시장에 이미 유럽적 정서가 보편화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의 것을 무차별적으로 들여온 한국 출판업자들의 책임이 크죠. 실제 유럽인들은 유럽적인 것 외엔 그다지 관심이 없습니다. 유럽적인 것을 넘어 이미 세계적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고요. 이는 엘리트들이 아동출판에 뛰어들도록 만드는 풍토와 교육적, 정책적 투자가 바탕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볼로냐 도서전에만 부스를 차리는 이유에 대해 이씨는 “제품개발을 위한 정보가 가장 알차고, 지금도 얼굴을 마주 대하는 만남(face to face meeting)을 좋아하는 유럽인들과 친분을 쌓아놓으면 언제든 조언과 협력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부스를 찾았던 독일의 한 동화작가가 자신의 책에 그림을 그려달라고 몇 년째 조른다”며 “앞으로 우리의 전통예술을 현대적 감각으로 재구성해 세계에 소개하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주간동아 383호 (p78~81)

글·사진/ 볼로냐=이기숙 동아일보 출판기획팀 기자 ks0604@donga.com 한국토지공사 협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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