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3

2003.05.08

문인들 해외 장기체류 이유 있었네

낯선 곳에서의 다양한 삶과 경험 쌓기 … 새 작품 ‘변화와 전환’의 계기 되려나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입력2003-04-30 17: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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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인들 해외 장기체류 이유 있었네

    시애틀에서 새로운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간 은희경씨.

    지난해 8월 등단 20년을 자축하며 김인숙씨(40)가 딸 선이와 함께 중국 다롄으로 떠났다. 왜 하필이면 중국이고 다롄이냐는 물음에 그는 “누가 오라고 한 적도, 누가 가라고 한 적도 없는 곳, 다만 어딘가에 가고 싶었고 그 어딘가가 내게 아주 생소한 곳이기를 바랐다”고 말한다. 생소한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보기 위해 작가는 주저 없이 짐을 쌌다. 그리고 2002년 ‘실천문학’ 겨울호에 발표한 ‘바다와 나비’가 덜컥 제27회 이상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바다와 나비’는 아이의 조기유학이라는 명목을 내세워 사실은 일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며 중국에 온 ‘나’와, 돈을 벌기 위해 늙은 사내와 결혼해 아버지를 남겨두고 한국으로 떠나는 조선족 여인 채금의 상반된 삶을 다룬다. 김씨는 ‘바다와 나비’ 한 대목에 슬쩍 자신의 ‘중국행’에 대한 변을 끼워넣었다.

    “다만 어딘가에 가고 싶었다”

    “우리들의 대학시절, 아직 청춘만이 전부일 수 있었을 때, 우리는 암호를 대고서야 들어갈 수 있는 밀실에서 중국혁명사를 공부했다. 그때 우리들에게 중국이란 나라는 금단의 나라였으나 또한 금지된 이상이기도 했다.”

    80년대 초반에 대학을 다녔고, 그 치열함으로 작가의 길에 접어든 그가, 등단 20년을 기념해 중국행을 택한 것이 느닷없다거나 우연이라고만 생각하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며칠 전 한국에 온 그는 ‘창작과비평’ 여름호에 실릴 단편을 마무리 짓고 다시 다롄으로 떠날 예정이다.



    지난해 여름 또 한 명의 작가가 한국을 떴다. 은희경씨(43)는 미국 시애틀에 있는 워싱턴 대학 객원연구원으로 초청을 받아 떠났지만 사실 ‘일상으로부터의 탈출’ 쪽에 더 무게가 실린다. 한동안 ‘글 빚’에서 벗어나 마음껏 읽고(책을 12상자나 부쳤다), 낯섦 그 자체를 즐기며 새로운 작품을 구상하는 시간은 작가라면 누구나 꿈꾸는 시간이다. 남보다 늦게 출발했지만(95년 등단) 누구보다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해온 그에게 ‘긴 충전의 시간’은 문학인생의 분기점이 될 것이다.

    문인들 해외 장기체류 이유 있었네

    배수아, 오수연, 허수경씨(왼쪽부터).

    출국 직전 펴낸 소설집 ‘상속’ 말미에 은희경씨는 “재미있게 살아서 재미있는 소설을 쓰고 싶다”고 적어놓았다. 한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습관처럼 여행을 떠났지만 이번 미국행에서 ‘회심의 역작’을 건져 올리겠다는 욕심도 작용했다. 계간 ‘문학동네’에 싣기로 약속한 장편소설이 벌써 두 계절이나 밀린 까닭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시애틀로 전화를 걸어 안부를 묻는다. “집에 없어요.” 4월 말 원고마감을 앞두고 그는 미국에서조차 ‘모처’로 잠적했다.

    지난 3월 장편소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펴낸 배수아씨는 책에 부칠 ‘작가의 말’을 독일 베를린에서 썼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글 ‘책 출간에 관해서 그 리고 그외에’를 인터넷 작가공간 ‘ebook21’에 남겼다.

    “나는 지금 베를린에 있습니다. 인터넷도 없고 전화도 없는 환경이다 보니 좀 답답하지만 그런대로 살아갈 만하군요. 나는 이제 더 이상 직장에 다니지 않습니다. 그래서 몹시 가난해졌지만 그렇다고 죽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이곳에는 실업자가 너무 많아서 그다지 의식도 되지 않아서 좋습니다. 결론은, 행복해진 것 같군요.”

    2001년 독일로 떠나며 처음 비행기를 타봤다는 배수아씨의 해외 체류는 3년째에 접어들었다. 그 사이 ‘이바나’ ‘동물원 킨트’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을 썼고, 휴직 상태였던 직장도 정리했다. 작가가 왜 떠나야만 했는지를 ‘이바나’의 한 구절에서 찾아낸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일상적이고 근본적인 본질이 변화하거나 혹은 어떤 변이가 새로이 발현되기를 원했으며 또 실제로 그것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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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영, 김인숙, 김연경, 김영하(왼쪽부터).

    프랑크푸르트에서 쓴 ‘동물원 킨트’ 역시 장소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에서 배수아씨는 ‘이방인놀이’를 즐긴다. “나는 지금 외국에 있다. 나는 이제 금방 비행기에서 내려 이곳에 방을 구했다. 나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동물원 킨트’에서) 그 야릇한 고립감과 어눌한 언어가 제공한 침묵에서 ‘동물원 킨트’가 탄생했다.

    작가들의 해외 체류가 늘고 있다. 작품을 구상하기 위해, 혹은 글쓰기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훌쩍 떠나는 여행 수준을 넘어, 장기간 체류하면서 그곳의 삶을 적극적으로 작품 속에 끌어들인다. 물론 전혀 새로운 경향은 아니다. 90년대 중반 ‘해외여행 문학’이 문단의 논쟁거리로 등장한 적이 있다. 특히 95년에는 외국을 배경으로 한 소설들이 잇따라 이상문학상(윤후명의 ‘하얀 배’), 동인문학상(정찬의 ‘슬픔의 노래’), 한국일보문학상(김인숙의 ‘먼 길’)을 수상했다. 그 밖에 윤대녕의 ‘피아노와 백합의 사막’, 김채원의 ‘달의 몰락’, 조성기의 ‘우리는 완전히 만나지 않았다’ 등 기행소설들이 쏟아지자 일부 평론가들은 “왜 꼭 외국을 무대로 작품을 써야 하느냐”며 비판했다.

    당시 비판을 주도했던 김윤식 명지대 석좌교수는 “최근 해외여행 문학에는 혼이 담기지 않았다”고 했고, 이에 대해 윤후명씨가 “세계와의 교류를 다룬 소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기행문학이다 뭐다 이름하는 것조차 우물 안 개구리식 발상”이라며 반론을 폈다.

    단순 공간 확장 뛰어넘어야

    지금은 8년 전의 논쟁이 무색하리만큼 작가들이 다양한 목적과 방식으로 떠난다. 4월 중순 김영하씨(35)는 두 달간의 일정을 마치고 과테말라에서 귀국했다. 7월 출간 예정인 소설이 1905년 멕시코에 이민 갔다 과테말라까지 흘러 들어간 한국인 이야기여서 이민자들의 흔적을 따라 답사여행을 한 것이다.

    “한 달은 여행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한 달은 호텔에서 집필을 했다. 당시 그들이 거쳐간 길이 널리 알려진 관광코스가 아니기 때문에 풍토, 기후, 음식 등 정보가 필요했다. 하지만 소설을 쓸 때 반드시 현장답사가 필요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박경리 선생은 평생 한 번도 평사리에 가보지 않고도 소설 ‘토지’를 썼고, 쥘 베른이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위해 세계여행을 하지도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지만 이국적, 이질적인 것에서 영감을 얻기 위해 하지는 않는다.”

    연작소설 ‘부엌’으로 2001년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오수연씨(39)는 지금 이라크 바그다드에 있다. 일촉즉발의 전운이 감돌던 3월 중순, 민족문화작가회의에서 ‘젊은작가포럼’을 이끌던 한창훈씨(작가회의 사무국장)가 “작가는 시대의 기록자여야 한다. 여기서 성토나 할 게 아니라 말도 안 되는 전쟁의 실상을 알릴 종군문인을 파견하자”고 제안했을 때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한 사람이 오수연씨였다. 그는 3월14일 출국해 요르단 암만,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서 취재하다 바그다드로 들어갔다.

    오씨의 외국행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97년부터 99년까지 인도에 살며 연작 ‘부엌’을 썼다. 국민대 방민호 교수는 “인도를 초월적 공간으로 본 여타 작품 및 여행기와 구분된다”며 “이 소설에서 인도는 신비화된 공간이 아니라, 패배를 안고 한반도를 떠난 주인공들이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수립해가는 사투장”이라고 했다. 숙명여대 권성우 교수도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이국 체험 그 자체가 문학적인 장점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 짧은 여행만으로는 문학적 밀도를 높이기 어려운 시대”라고 말한다.

    물론 체류기간이 길다고 작품의 질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4월 초에 펴낸 송영씨(63)의 소설집 ‘발로자를 위하여’의 표제작과 ‘모슬기행’은 90년대 초 러시아 페테르부르크와 이라크 바그다드로의 짧은 여행을 소재로 했다. 비록 화자는 여행자 신분이지만 ‘국적과 나이를 뛰어넘는 우정’(발로자를 위하여), ‘문명의 진보와, 선행에 관한 인간 의지가 충돌하는 모순’(모슬기행)을 헤아릴 만큼 깊은 시선을 지녔다.

    이들 외에도 유학 이민 여행 등 다양한 목적으로 해외에 장기체류 중인 문인들이 많다. 캐나다의 박상륭, 독일의 허수경, 러시아의 김연경. 이들로 인해 90년대 한국소설은 공간적 확장을 계속해왔다. 방민호 교수는 “이제 소설 공간의 확장은 단순한 확장으로 끝나서는 안 되며 일종의 한국적 세계시민상을 그리는 데로까지, 세계시민으로서의 경험을 사상화하는 데로까지 나아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소설 ‘부엌’의 해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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