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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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더미 사연 듣느라 하루가 짧아요”

신용회복지원위 상담원의 24시 … 신용불량자 위로, 양심불량자엔 호통 ‘보람 반 고생 반’

  • 강지남 기자 layra@donga.com

    입력2003-04-30 16: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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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빚더미 사연 듣느라 하루가 짧아요”

    신용회복지원위를 찾는 방문객들의 사연은 서민들의 생활고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이란희씨의 상담 모습.

    ”낮엔 우유공장에서 일하고 밤엔 김밥집에서 일하고…. 도대체 잠은 언제 자요? 이렇게 5년을 버틸 수 있겠어요?”

    4월24일 오후 2시경. 서울 명동 명동센트럴빌딩 내 신용회복지원위원회 방문상담코너에서 상담원 이란희씨가 상담을 위해 찾아온 ‘신용불량자’ 진모씨(32·여)에게 안쓰러운 듯 물었다. 그러나 예상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잠 못 자는 것보다 빚 독촉이 더 힘들어요. 추심(推尋)에만 시달리지 않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진씨 부부는 시어머니 수술비와 생활비를 대느라 4000만원의 카드 빚을 졌다. 개인워크아웃 신청 요건은 갖추고 있지만 ‘심사’를 통과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 부부의 한 달 소득 180만원으로는 생활비까지 감당하며 5년 동안 빚을 분할상환하기란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 ‘카드 돌려 막기’를 위해 빌린 사채 800만원에 대한 이자만도 한 달에 50만원이나 돼 더욱 그렇다.

    “먼저 사채부터 갚을 방법을 찾아보세요. 그래야 지금 소득으로 분할상환할 여력이 생기고, 개인워크아웃 대상자가 될 수 있어요.”



    이씨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많은 신용불량자들이 ‘카드 돌려 막기’로 불어난 빚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사채를 끌어다 쓴다. 빚만 더욱 불어나는 것은 당연지사. 이씨는 “신용불량자들에게 사채만은 제발 사용하지 말라고 충고한다”고 말했다.

    “사채만은 쓰지 마세요” 꼭 충고

    8년간 외환은행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이씨는 ‘개인워크아웃제도’ 운영기구인 신용회복지원위원회의 창립 멤버다. 신용회복지원위원회는 지난해 10월 여러 금융기관에 동시에 채무를 지고 있는 다중채무자에게 신용회복 기회를 주기 위해 금융기관들이 공동으로 설립한 기구다. 현재 100명의 사무국 직원들이 방문상담, 전화상담, 인터넷상담을 통해 채무조정 신청을 받고 채무 상환기간 동안 납부실적을 관리하고 있다. 이씨는 신청 요건을 갖춘 방문객들에게 필요한 서류를 받아 각 금융기관에서 파견 나온 심사역들에게 서류를 넘기는 업무를 맡고 있다.

    신용불량자 300만명 시대를 맞아 이씨와 이씨 동료들은 덩달아 바빠지고 있다. 상담하러 오는 사람들의 수가 하루가 다르게 급격히 증가하고 있기 때문. 당연히 이씨의 하루 일과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가 없다.’

    이씨의 기상시간은 오전 6시. 졸린 눈을 채 뜨지 못한 딸 서윤이(7)와 아들 원재(5)를 집 근처 놀이방에 맡기고 오전 8시30분경 사무실에 도착한다. 간단한 준비작업을 마친 후 오전 9시 정각부터 방문객들을 대상으로 상담을 시작한다.

    “빚더미 사연 듣느라 하루가 짧아요”

    신용불량자가 급증하면서 최근 신용회복지원위를 찾는 방문객이 하루 150~200명에 달한다(왼쪽). 매주 목요일 오전 8시30분경 상담현황과 개선점에 대해 토론한다.

    자리에 앉자마자 부인과 식당을 운영하는 김모씨(45)가 채무내역을 적은 서류를 내밀었다. 불경기 탓에 식당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6000만원의 빚을 지게 됐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에서 빌린 돈 4000만원이다. 신협은 채무조정 협약에 포함되지 않은 소규모 금융기관. 이씨는 “협약에 포함되지 않는 금융기관에서 진 빚이 총채무액의 20% 이하여야 한다”며 “신협 채무를 400만원 이하로 줄여야 신청요건을 만족시킨다”며 김씨를 돌려보냈다.

    상담 틈틈이 밀린 업무도 챙겨야 한다. 지난 주말 지방출장을 간 사이 4000만원 규모의 워크아웃을 신청한 최모씨(25·여)의 채무내역을 조회해보니 본인이 밝힌 채무 외에 900만원의 할부금 채무가 더 있었다. 전화로 최모씨에게 사실을 확인하자 2000년 ‘티뷰론’ 승용차를 할부로 구입했다고 했다. 이씨는 “차량 할부금도 채무인데 밝히지 않으면 곤란하다”고 나무란 뒤 “차를 팔아야 채무를 정리할 수 있어 심사에 유리하다”고 설득했다. 이씨는 “최씨처럼 대학 4학년 때 신용카드를 발급받아 마구 사용한 뒤 졸업 후 신용불량자가 된 젊은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오후 4시. 50대의 한 아주머니가 주뼛거리며 이씨를 찾았다. 신용불량자로 등록되지 않았지만 은행 추심 직원이 “납입이 연체되면 경찰에 고소하겠다”고 협박하자 불안해져 상담원을 찾아온 것.

    “두세 달 연체했다고 구속하면 대한민국 국민 300만명이 교도소 가야 돼요. 두세 달 후면 최장상환기간이 5년에서 8년으로 연장될 예정인데, 8년 정도면 지금 소득으로 채무조정이 가능합니다. 채무조정 심사 통과하기가 로또복권 당첨만큼 어렵다고 협박하는 추심 담당 직원들이 있다던데, 그 사람들이 하는 얘기 모두 믿지 마세요. 제일 중요한 건 열심히 돈 버는 겁니다.”

    야근 밥먹듯 … 배우자 내조 필수(?)

    이날 이씨는 아내와 함께 다단계판매업을 한다는 최모씨(40)와 가장 오래 실랑이를 벌였다. 최씨는 “부부합산 월소득이 580만원”이라며 “아내의 카드 빚 3500만원에 대해 워크아웃을 신청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최씨 서류를 살펴본 이씨는 이 부부의 최근 소득이 월 135만원에 불과하고 2001년 그랜저XG를 구입해 월 60만원씩 할부금을 납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곧 소득이 많아질 것이고 승용차는 사업에 꼭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최씨에게 이씨는 “불경기 때문에 다단계판매회사 자체의 매출이 크게 줄었는데 무슨 수로 월 500만원씩 소득을 올릴 수 있겠느냐”며 “생활비를 줄이고 소득을 정정하지 않는 한 신청이 불가능하다”며 최씨의 요구를 거절했다. 이씨는 “조건도 안 되는데 빚 독촉을 피할 목적으로 무조건 신청해달라고 떼쓰는 사람들 설득하는 게 가장 피곤하다”고 털어놨다.

    오후 6시50분. 정규 업무시간을 50분 초과한 후에야 상담은 끝났다. 이날 이씨는 16명, 총 5억600만원의 채무에 대해 상담했다. 점심시간 50분과 화장실을 한 차례 다녀온 것을 빼면 업무 도중 휴식시간은 없었다.

    이씨는 동료 상담원이 준 음료수를 마시며 갈증을 달랬다. 매주 월요일 총무과에서 나눠주는 ‘목캔디’ 두세 박스는 이미 다 먹은 지 오래다. 신용불량자들의 호소를 들어준 지 6개월. 살이 6kg이나 빠져 요새 맞는 옷이 없다. 이씨는 “헐렁한 원피스를 입은 것을 감추려고 춥지도 않은데 카디건을 입었다”며 웃었다.

    이날 접수된 서류를 정리하고 오후 8시가 넘어서야 이씨는 동료 상담원들과 근처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방문객들의 안타까운 사연들이 밥상 위로 쏟아졌다.

    윤요환씨(37)는 “청각장애인이 찾아와 컴퓨터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 1시간30분 동안 화면으로 대화를 나눴다”고 했다. 이상원씨(36)는 “어떤 시골마을은 마을사람들끼리 서로 맞보증을 서 한 명이라도 도주하면 도미노처럼 줄줄이 무너질 지경”이라고 전했다.

    업무가 많아 매일 자정까지 야근이 계속되지만 목요일은 자체적으로 ‘가족의 날’로 지정해 ‘일찍’ 퇴근한다. 오후 10시 빌딩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이씨는 “은행원인 남편은 개인워크아웃제도의 필요성을 누구보다도 절감해 매일 늦는 아내 대신 아이들을 보살피고 있다”며 “은행원 시절보다 신용불량자들을 돕는 지금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훨씬 즐겁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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