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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날벼락, 국가는 책임져라”

1991~93년 혈우병 환자 20명 집단 감염 … 혈액제제·수혈 등 관리 소홀 배상소송

  •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입력
2002-12-27 09: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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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즈 날벼락, 국가는 책임져라”

“에이즈 날벼락, 국가는 책임져라”

혈액제제를 주사 맞고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이 책임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섰다.

혈우병. 작은 상처에도 피가 멎지 않아 평생 혈액응고 인자(혈액제제)를 주사 맞으면서 살아야 하는 만성 유전질환. 피 속에 있는 여러 혈액 응고 인자 가운데 제8인자(A형 혈우병), 제9인자(B형 혈우병)가 부족해 발생한다.

현재 2500~3000명으로 추산되는 국내 혈우병 환자 중 B형 혈우병 환자는 120명. 그런데 이들 중 20명이 에이즈에 감염됐다. 감염시기는 모두 1991년에서 93년. 감염 사실을 통보받았지만 그들은 지난 10년간 아무에게도 감염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당시 에이즈 환자의 매혈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면서 수혈이나 혈액제제에 의한 감염이 의심됐지만 국가도 제약사도 병원도 그 누구도 책임지려 하지 않았기 때문. 책임자를 찾지 못했으니 배상이나 보상이 있을 리 없었다. 당시 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의 대부분은 어린이나 청소년. 설사 어른이라 해도 동성애자도 아니고 에이즈 감염자와 접촉한 사실도 없었다. 에이즈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영문도 모른 채 에이즈에 걸린 이들 환자와 가족의 입에 재갈을 물렸다. 에이즈 통보를 뒤늦게 부모로부터 들은 한 고등학생은 자살을 선택했지만 이마저도 알려진 바 없다.

“피해자 있는데 가해자 없다니”

하지만 최근 이들 에이즈 감염 환자들이 한데 뭉쳐 입을 열기 시작했다. 자신들을 에이즈에 걸리게 한 장본인을 찾겠다며 집단배상소송을 준비하고 있는 것. 그들이 살아온 10년은 우리 사회가 얼마만큼 남의 일에 무심할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다는 게 말이 됩니까?” 1993년 에이즈 감염을 통보받은 김희동씨(45·가명·경남 창원)는 날벼락을 맞은 듯 눈앞이 캄캄해졌지만 아무에게도 감염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결혼해 네 살 난 아이까지 있었지만 차마 부인에게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스무 살 때 군 입대를 위한 신체검사를 통해 혈우병 환자인 것을 안 김씨는 91년 혈우병 재단에서 검사를 할 때만 해도 에이즈에 감염되지 않았었다. 그런데 93년 갑작스럽게 병원으로부터 에이즈 판정을 받은 것. 김씨는 “당시 혈액제제를 바꾼 것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97년 가족에게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린 김씨는 최근 부인과 이혼하고 아이까지 부인에게 맡겼다. 아이의 양육비로 집과 사업장도 넘겼다. 91년에 당한 교통사고의 후유증(혈액응고)으로 99년에 오른쪽 다리를 절단한 상황이었지만 자신의 에이즈 감염 사실을 감당하지 못하는 부인과 아이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기 때문. 김씨는 수술과 관련해 에이즈 환자의 설움을 톡톡히 겪었다. 수술을 하려고 했지만 각 대학병원에서 에이즈 환자라는 이유로 수술을 거부했다. 병세가 악화된 그는 결국 오른쪽 다리를 절단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는 “부인이 나를 멀리하는 데 견딜 수가 없었다”며 “자식을 잘못 낳았다고 늘 자책하시는 부모님 얼굴을 뵐 면목이 없다”고 말했다.



이기훈씨(18·가명·경북 구미시)는 태어날 때부터 혈우병을 앓아왔지만 고등학교 2학년이 된 지금까지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된 사실을 모르고 있다. 92년 혈우재단 검사에서 에이즈 감염 사실이 밝혀졌지만 이군의 부모는 차마 어린 아들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군의 어머니(45)는 “처음 에이즈 감염 사실을 통보받곤 집안이 풍비박산됐다”며 “남편과 헤어져 살았던 시기도 있었지만 아이를 위해 다시 합쳤다”고 말했다. 이군은 현재 등쪽과 어깨쪽에 붉은 반점이 나타나면서 심한 가려움증을 호소하고 있다. 이군의 부모는 죽을 때까지 아들에게 에이즈 감염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당신 같으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을 아이에게 말할 수 있겠느냐”고 되물었다. “혈우병에 걸려 피가 나면 죽는 줄 알고, 학교 체육시간에 교실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것에도 상처를 받는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냐”는 게 이군 부모의 솔직한 심정. 이군의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앞일이 막막하지만 10년간의 이 피맺힌 한을 이번 소송으로 반드시 풀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에이즈 날벼락, 국가는 책임져라”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 집단 감염은 에이즈 환자의 무분별한 매혈에서 시작됐다.에이즈에 감염된 혈우병 환자와 그가 맞은 혈액제제 중 하나(오른쪽).

92년 겨울 에이즈 감염 사실을 통보받은 최호준씨(32·가명·인천시 부평구)의 소원은 에이즈가 치료돼 건강한 아이를 갖는 것이다. 그는 에이즈 합병증으로 이미 대상포진과 콩팥 기능 상실, 혈소판 수치 감소 진단을 받고 두려움에 떨고 있다. 림프선이 자주 붓고 감기에 걸리면 잘 낫지 않는 증세가 계속되면서 한 걸음씩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에 치를 떨고 있는 상태다. 최씨는 “처음 에이즈 감염 통보를 받았을 때 어떻게 죽는 것이 편할까, 부모님 모르게 어디 가서 죽을까를 고민했다”며 “지난 10년과 앞으로의 삶이 너무나 버겁고 힘들다”고 호소한다.

“처갓집에서는 제가 혈우병 환자인 줄은 알지만 아직 에이즈 감염 환자인 줄은 모릅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처지를 이해하는 부인과 결혼은 할 수 있었지만 처갓집에는 차마 에이즈 감염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최씨는 “가장 무서운 것은 에이즈 환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이며 아무런 잘못도 없이 오명을 덮어쓰고 죽음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 너무나 억울하다”고 호소했다.

뒤늦은 진상조사 성과 없어

그렇다면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사실 국립보건원은 92년 12월 혈우병 환자의 에이즈 집단 발병을 확인하고 역학조사위원회를 구성, 2년 후인 94년 5월4일 조사 최종 보고서에서 “감염원인은 수혈에 의한 것이 아닌, 혈액제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나 원인 제품의 규명은 현재로선 불가능하다”고 결론 내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진 것은 지난 9월 일단의 의학자 그룹이 국산 혈액제제에 의한 감염설을 제기하면서부터. 하지만 해당 혈액제제를 제조한 제약 회사가 “절대 그런 일이 없다”며 해당 의학자를 고소하면서 이 문제는 법정에서 시비를 가리게 됐다.

하지만 이런 눈물 어린 사연을 뒤로하고, 에이즈에 집단 감염된 혈우병 환자들을 정작 분노케 하는 것은 왜 피해자인 자신들이 직접 감염 피해에 대한 배상소송에 나서야 하느냐는 것. 이들은 “혈액과 관련한 사항은 국가가 관리하고, 감염 피해에 대한 원인규명과 책임자 처벌은 국가의 몫인데 지난 10년간 집단 감염 사실조차 알리지 않았다”고 항변했다.

실제 이들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혈액제제나 수혈에 의한 에이즈 감염이 비단 국내만의 일은 아니기 때문. 일본에서는 80년대 미국으로부터 수입한 혈액으로 만든 혈우병 치료제가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염된 채 투여돼 1800여명이 감염되고 400여명이 사망했다. 또 프랑스에서도 80년대 초반 1348명의 혈우병 환자가 수혈을 통해 에이즈에 감염돼 625명이 목숨을 잃었다.

하지만 이들 나라의 대책은 우리 정부와 너무나 달랐다. 일본은 역사상 처음으로 후생성 보건의료국장이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구속됐고, 국가와 제약회사가 감염자에게 4500만엔씩을 지급했다. 프랑스의 경우도 당시(1985년) 총리와 사회장관, 보건장관이 특별법정에 세워졌으며 보건장관은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뿐 아니다. 지난 11월20일 캐나다 경찰은 70년대와 80년대 오염된 혈액과 혈액제제를 주사 맞고 1200명이 에이즈에 감염된 사건과 관련, 혈액 수혈 서비스를 담당한 캐나다 적십자사 직원과 미국 제약회사 책임자, 관련 의사들을 법정에 세웠다.

뒤늦게 사건이 확대되자 국립보건원은 지난 9월16일 에이즈 집단 감염에 대한 재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진상 파악에 나섰지만 지금껏 새로운 성과는 없는 상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도 국정감사에서 이 사건을 다뤘지만 별다른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도대체 국가는 무엇을 위해 존재합니까?” 이제 정부가 환자들의 이 같은 질문에 답을 내놓아야 할 차례다. 정부가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고 있다면.



주간동아 366호 (p68~69)

최영철 기자 ftdo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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