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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反美 분노’ 수위 조절 어쩌나

한나라·민주당 대미 물밑접촉 한창 … 이회창 후보 큰 목소리, 노무현 후보 침묵 의미는

  •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反美 분노’ 수위 조절 어쩌나

‘反美 분노’ 수위 조절 어쩌나

시민들이 11월19일 동두천시 미2사단 캠프 케이시 앞 문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 이들은 미국을 상징하는 허수아비와 성조기를 불태우고 제지하는 경찰과 몸싸움을 벌였다.

11월23일 오후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열린 의정부 여중생 사건의 무죄판결에 대한 항의 집회에서 시민들이 성조기를 찢고 있다.11월27일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진영으로 연락이 왔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여중생 사망사건과 관련해 대사관에 사과 의사를 전해왔으므로 이를 귀당에 알려드린다”는 내용이었다. 한나라당에 대한 미국의 친절한 배려였다.

여중생 사망사건에 대한 무죄판결 문제로 반미감정이 들끓고 있다. 여기에 대통령선거가 겹쳤다. 그런데 이후보는 목소리를 높여 미국을 비판하고 민주당 노무현 후보는 침묵하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반미감정의 유탄을 맞으면 선거에서 패배, 잘 대응하면 대선의 전기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각 후보 진영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미국과의 긴장이 높아지면서 이회창, 노무현 후보의 대미관도 새삼 주목을 받고 있다. 반미감정, 미국과의 관계설정 문제는 대선 정국의 주요 이슈로 떠올랐다.

11월21일 미군 병사에 대한 무죄판결이 알려진 뒤 한나라당은 즉각 이를 비판하는 논평을 냈다. 동시에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개정을 요구했다. 민주당 역시 개정을 요구했다. 그러나 보수, 친미 성향으로 알려진 한나라당이 미국에 반발했다는 점이 더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날 이후 한나라당은 서청원 대표, 이상배 정책위 의장, 남경필 대변인 등이 잇따라 ‘미국 압박’에 나섰다. “만약 한나라당이 사안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해 어정쩡한 태도를 취했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는 얘기가 나왔다.

“Roh No, Lee Yes?”

미국 대사관측은 한나라당의 공식 반응들을 면밀히 분석했다. 한나라당 한 인사는 “친분이 있는 미 대사관 관리로부터 ‘우리는 한나라당 반응에 깜짝 놀랐고 당황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 대학생들의 미군부대 영내 진입 시위, 화염병 등장과 함께 한국 보수정치권의 반발이 미국측에 충격을 줬다는 것이다.



이후보는 11월26일 저녁 TV토론에서 SOFA 개정과 함께 부시 미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했다. 미국 대사관측이 부시 대통령의 사과 의사를 전해온 것은 바로 다음 날이었다. 한국의 대통령후보 중 이후보와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부시 대통령의 공식 사과를 요구하자, 이에 대해 미국측이 응해온 모양새였다. 이후보는 국민의 자존심이 걸린 사안에 대한 미국측의 사과를 받아내는 데 일조한 지도자로 비친 셈이다. 한나라당 이명우 대통령후보 보좌역은 “한나라당은 미국과 ‘할 말은 하는 당당한 우호관계’를 유지하고 있음을 유권자들에게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미국 사대주의에 빠진 정당’이라는 의혹을 벗었다는 것이다.

‘反美 분노’ 수위 조절 어쩌나

11월21일 페르난도 니노 병사 무죄판결 항의규탄대회에서 일부 시민들이 판결 무효를 요구하며 태극기 위에 혈서를 쓰고 있다

한나라당이 공세적 전략으로 반미 분위기를 이후보의 이미지 변신 기회로 적극 활용했다면 민주당 노후보는 그 반대였다. 민주당은 미군 무죄판결에 대해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대책위원회까지 구성했다. 그러나 정작 노후보는 이 문제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의도된 침묵이었다. 민주당 유재건 후보특보단장 겸 외교안보특보는 기자에게 “오해를 사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노후보가 민감한 시기에 미국을 비판하면 노후보의 대미관이 과격하다는 인상을 더욱 굳힐 우려가 있으므로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민주당 국제관계위원회 고위 관계자는 “노후보가 아무 말 하지 않아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이미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반미감정이 노후보에게 불리하지 않다는 게 민주당측 판단이다. 그동안 노후보는 미국에 호의적 태도를 보이지 않아 일부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어왔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반미감정 확산 이후 이런 노후보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사회적 이슈가 북한 핵문제에서 반미감정으로 옮겨간 것도 노후보에겐 나쁘지 않은 일이다. 시민단체들은 부시 대통령의 간접 사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대한 비판 수위를 낮추지 않고 있다. 대선 내내 반미 분위기가 팽배해질 수 있는 상황이다. 반미가 대선에 뜻밖의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는 예측도 나오고 있다.

‘反美 분노’ 수위 조절 어쩌나

토머스 허버드 주한미국 대사(왼쪽)와 리언 라포트 주한미군 사령관이 11월27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미 대사관 공보과에서 합동 기자회견을 갖고 있다(위).

한나라당은 노후보의 태도에 당장 문제를 제기했다. 한나라당 고위 당직자는 “자신의 ‘반미주의자’ 콤플렉스를 감추기 위해 국민감정을 시의적절하게 대변하지 않는 것이 대통령후보로서 바람직한 일인가”라고 공격했다.

한편에선 반미감정의 ‘역작용’이 나타날 것이라는 예측도 나온다. 반미감정은 스스로 절제될 수밖에 없으며 이후 “각 후보들이 미국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있느냐”의 문제가 논의의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노후보의 경우, 미국측에선 “노후보가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다”는 쪽이다. 관계를 논할 ‘관계 자체’가 형성돼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물밑에선 노후보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미국측 반응이 자주 감지된다. 한나라당 조웅규, 윤여준, 박진 의원은 10월28일부터 나흘간 미국 백악관과 의회, 주요 연구소 내 한반도 정책담당자 및 전문가 30여명을 만났다. 눈길을 끄는 대목은 백악관 내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아시아담당 마이클 그린 국장의 반응이었다. 한 언론 보도에 따르면 지난 4월 노후보의 외교특보는 미국 행정부 관계자에게 노후보를 설명하는 자리에서 “미국은 한국 대선에서 손떼라”고 말했다. 발언 당사자와 노후보는 그런 말 한 적 없다고 수습에 나섰지만 파문이 일었다. 그때 노후보측 인사가 만났다는 미국 행정부 관계자가 바로 그린 국장이었다. 그린 국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노후보측과는 첫 대면이었고, 대화 내용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는데 노후보측이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대화 내용이 공개됐다. 나중에 보도를 접한 뒤 당황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노후보와 백악관의 간접적 첫 대면에서 노후보에 대한 백악관의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는 게 한나라당의 주장인 셈이다.

한나라당 방미단은 귀국 후 ‘방미 조사 활동보고서’를 당 지도부에 제출했다. ‘주간동아’는 ‘대외비’로 되어 있는 이 보고서 내용을 최근 확인했다. 한나라당 의원들이 미 행정부 관리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10월 중순 북한 핵문제와 관련 미국이 워치콘3를 워치콘2로 격상시키려 했으나 한국측이 반대했고 청와대 수석비서관이 워싱턴에서 “북한의 농축우라늄 핵개발 사안이 한국 사회에서는 별로 놀랄 일이 아니다”라고 연설했다는 것이다. 연설 장소는 공교롭게도 미국 공화당의 싱크탱크로 통하는 연구소였다. 워싱턴 내 한반도 문제 연구소인 AEI에서 릴리 전 주한미국 대사는 한나라당 의원들에게 외교적 수사가 배제된 직설적 표현으로 한국 정부를 평가했다. 릴리 전 대사는 “햇볕정책은 잘못된 정책이며 대북문제를 오히려 복잡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노후보는 한때 ‘미군 철수’를 주장했다. “광주사태가 일어난 데는 미국도 일부 책임이 있다”, “미국에 사진 찍으러는 가지 않겠다”, “미국에 굽실거리지 않겠다”는 발언도 했다. 미국 정부와 주한 미국 대사관이 노후보에 대해 공식 견해를 밝힌 적은 없다. 그러나 ‘햇볕정책을 계승하겠다’는 노후보 발언을 주목하는 분위기다. 언론은 더 직설적이다. LA타임스는 노후보를 ‘낯선(obscure) 변호사’라는 부정적 단어로 표현했다. 뉴욕타임스는 노후보를 아예 ‘좌파(left)’로 규정했다. 영국의 파이낸셜타임즈는 “12월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면 한미관계는 건강하게 복원되겠지만 노무현 후보가 당선되면 한미 군사동맹의 쇠락이 끝내 종말을 고할 수 있다”고 직격탄을 쐈다.

노후보측은 이런 미국측 반응에 내심 충격을 받았다. 상당한 위기의식도 느끼고 있다. “후보 경선 이후 민주당이 혼란에 빠지면서 해외에 노후보를 제대로 알리는 작업이 부족해 외국의 오해를 사게 됐다”는 반성론까지 나왔다. 민주당은 부랴부랴 외신담당특보, 외교특보를 새로 채용했다. 노후보 관련 소식을 매일 팩스로 보내는 등 서울 주재 외국 특파원들과의 접촉도 강화했다.

노후보는 미국에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의 한반도 전문가들이 한국에서 와서 노후보를 만나는 일이 벌어졌다. 스티븐 보스워스 전 미국 대사는 노후보에게 “미국에서 ‘노무현이 누구냐’는 질문을 내게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내가 제대로 답변을 못해 괴로웠다. 그래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아보기 위해 서울에 직접 왔다”고 말하기도 했다. 포컬 패터슨 백악관 전 수석전문위원이 방문한 자리에서 노후보는 “국회 환경노동위에만 있어서 미국에 갈 기회가 없었다. 미국에 안 가고 당선되는 기록을 세우겠다”고 말했다. 유재건 특보단장은 “이들을 통해 노후보가 미국의 동반자로 손색이 없음이 미국에 알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외교 준비가 전혀 안 된 후보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며 맹공 태세를 갖추었다. 박신일 후보특보(외신담당)는 “정치-경제-군사적으로 한국에 막대한 영향을 주는 우방국과 신뢰관계를 갖고 있는지 여부는 사대주의와는 차원이 다른 문제”라고 말했다. 이후보는 두 차례의 방미 과정에서 딕 체니 부통령 등 백악관, 국무성, 국방성, 의회 내 한반도 문제 고위급 담당자들을 만나 친분을 쌓아두었다는 게 한나라당 얘기다. 이번에 미국을방문한 한나라당 세 의원도 미국 행정부 내 차관급 이상 관리들로부터 ‘잦은 접촉에서 오는 따뜻한 환대’를 받았다는 것.

이에 대해 민주당측은 “대미관계는 전체적인 한반도 문제의 틀 속에서 다뤄야 할 문제며, 한나라당의 경우 한반도 정책이 냉전-수구-보수이므로 대미관계도 미국의 입장에 끌려갈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하고 있다. 민주당 관계자는 “미국에게 당당한 노후보의 주체적인 태도가 유권자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에서 미국은 영향력을 거의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이 이회창-노무현 후보 중 누구를 원하는가’는 전혀 의미가 없는 논의가 됐다. 여중생 사망사건 이후의 반미 움직임도 과거와 다른 판단기준을 요구하고 있다. 유권자들은 지금 ‘이회창-노무현 후보 중 누가 미국과 상대할 때 더 경쟁력이 있는가’를 따져보고 있다.





주간동아 363호 (p48~50)

허만섭 기자 mshu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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