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의 불꽃, 어느 날 나타난 그를 보는 순간 나에게 도덕은 한순간에 사그라지는 종이쪽지에 지나지 않았다.’
각종 문학작품부터 세태풍자 콩트까지 남녀 간의 ‘은밀한 관계’는 호기심의 대상이 되게 마련이다. 신문 가십난에는 현대판 카사노바가 단골손님처럼 등장하고 유명인의 성적 탈선은 대중에게 호기심을 넘어 야릇한 쾌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간통과 혼인빙자간음의 역사
과거 성 문제는 인구, 보건, 도덕 문제와 직결되면서 국가의 개입이 당연시됐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자기결정권과 프라이버시라는 화두가 불거지면서 성과 관련된 문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데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짜릿한 ‘원나잇 스탠드’에 이은 쿨한 이별이 현대 남녀가 공히 갖춰야 할 매너이자 능력으로 통하고, 연애하는 이들의 80% 이상이 ‘성관계가 연애를 지속하는 중요한 요소’라고 답한 조사 결과가 발표되는 세상이다.
혼인 외 정사가 만연하고 이혼율 또한 높아진 실정에서 지극히 은밀하고 사사로운 성생활에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시대적 추세에 역행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법리를 떠나 법감정을 표현하는 여론조사를 보면 최근까지도 일반인 사이에 간통죄, 혼인빙자간음죄의 존치를 주장하는 의견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쁜 짓을 하면 당연히 벌을 받아야 하고, 성적 문란을 예방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는 유지돼야 하며, 법원이 인정하는 위자료 액수에 현실성이 없으므로 민법이 개정되기 전까지는 형사처벌이 병행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현재 우리 법원이 배우자의 간통을 이유로 이혼하는 상대방에게 인정하는 위자료는 많아야 4000만원 정도다. 반면 미국은 남자의 간통이 이혼 사유가 되면 아내에게 가진 재산의 거의 전부를 내놓아야 하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는 일부 주를 제외하고는 간통죄가 존재하지 않지만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가 존재한다. 일찌감치 성관계가 자유화한 서구와 달리 유교적 도덕관이 여전히 지배적인 우리 사회에선 혼인을 전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 헤어지게 됐을 때 남자보다 여자 쪽이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이 현실이다.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지만 속으로 ‘남자는 외도, 여자는 정절’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공식이 여전히 들어맞는다고 생각하는 이도 많다. 혼인빙자간음죄는 통일 전 서독 형법의 ‘사기(詐欺)간음죄’에서 유래했다. 우리나라는 1953년 형법 제정 당시 사기간음죄를 형법에 포함시켰지만 정작 원조 격인 독일은 1969년에 이를 폐지했다. 해외에서는 현재 미국의 일부 주와 터키, 쿠바, 루마니아만 혼인빙자간음을 처벌한다.
혼인빙자간음죄 사건 중 가장 유명한 것은 ‘박인수 사건’이다. 1955년 제대한 해군 대위라고 속여 상류층 여성 70명을 농락한 박인수가 피해자 2명의 고소로 체포됐다. 그는 법정에서 “만난 여자 중 처녀는 미장원 종업원 한 명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1심 재판장은 그의 혼인빙자간음죄에 대해 무죄를 선고하며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정조만 보호한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러나 성 개방 풍조를 부추긴다는 비난이 일어서인지 2심과 3심에서는 징역 1년을 선고했다.
최근에는 “새로운 여자친구와 사귀면서 옛 여자친구와 결별하려고 노력하고, 또 생일처럼 의미 있는 날들을 새로운 여자친구와 함께 보냈다면 혼인빙자간음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결이 화제를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간통과 혼인빙자간음은 지난 4월 종영한 KBS 드라마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의 단골 소재였다(좌). 2007년 9월, 전남편 박철 씨가 제기한 이혼소송 과정에서 간통 혐의가 알려져 세간에 큰 화제가 된 탤런트 옥소리(우).
통계를 보면 혼인빙자간음죄로 고소된 사건은 2004년 784건, 2005년 703건, 2006년 764건, 2007년 601건, 2008년 559건, 2009년 7월까지 285건으로 꾸준히 감소했다. 또 이들 중 기소가 이뤄진 사건은 최근 3년간 34건, 25건, 16건에 불과했으며, 재판을 통해 실형을 선고받은 경우는 더욱 줄어들어 같은 기간 중 6건, 8건, 3건이었다. 판례는 유부남이 미혼이라고 속인 경우나, 동거하면서 다른 여자와 결혼한 경우 정도만 죄를 인정한다.
지극히 주관적인 남자의 결혼 의사 유무를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혼인빙자간음죄 사건은 그리 드물지 않았으나 최근에는 순전히 간음만의 사유로 고소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대부분 돈 문제로 사기죄와 함께 고소하는데, 이때 돈 문제가 해결되면 합의로 끝난다. 우리 형법이 혼인빙자간음을 친고죄로 규정하기 때문에 남성이 빌린 돈을 다 갚고 합의를 하면 여성이 고소를 취소하면서 사건이 끝나게 되는 것이다.
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인 경우도 그러하다. 처벌되는 사례 중에는 물론 처음부터 자신이 유부남인 것을 속이고 여성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정조를 빼앗고 금전적 피해까지 입히는 악질적인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한때 연인이라 생각하던 당사자에게서 배신당한 여성이 남성을 향한 앙갚음의 수단으로 이 법을 이용한 측면도 있다. 상대 남자가 유명인이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을 때는 합의금의 액수도 천정부지로 올라간다.
수사기관에서도 당사자를 구속해 엄벌하기보다 양자 간의 합의를 유도하며 시간을 주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점을 악용해 이른바 ‘꽃뱀’이 상대방에게 돈을 뜯어내기 위해 누명을 씌우는 도구로 활용하기도 했다. ‘전통적 의미’의 혼인빙자간음죄를 저지른 이들은 대개 자신의 신분과 학력을 속여 여성에게 접근해 환심을 산다. 피고인이 사칭한 직업은 그 자체로 당대의 세태를 반영한다. 과거엔 군 장교가 인기였고 고시 합격자도 단골손님이었다.
명문대학생, 사업가, 유학생, 기자, 교수, 의사, 재벌 2세를 사칭하는 사례도 많다. 벤처 열풍이 불 때는 벤처사업가 및 코스닥 상장회사 오너가 인기였고 펀드매니저도 이에 합류했다. 스타가 되는 데 판타지가 있는 여성에게는 영화감독과 방송사 PD라는 ‘가면’도 유용하다. 카사노바들의 활동반경만 보더라도 과거에는 카바레나 댄스홀 등이 주무대였으나 지금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사냥감을 찾는다. 수법도 훨씬 다양해졌다.
과거에는 주로 번듯한 외모만 가지고 여성을 유혹했으나 지금은 휴대전화, 캠코더까지 동원해 협박용 ‘자료’를 수집한다. 간통죄는 더욱 다양한 법률적 사연을 갖고 있다. 상대방이 결혼한 사실을 몰랐다고 우기면 처벌하기 난감해지고, 자신들의 취향에 따라 통상적 성관계가 아니라 유사 성행위만 했다고 주장한다면 이 또한 처벌하기 어렵다. 죄형법정주의에 따라 형법에서 정한 행위만을 처벌할 수 있고, 확대해석은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 때문에 간통죄에 대해 위헌제청을 한 어느 재판부는 소위 ‘스와핑’이나 수간, 근친상간은 처벌하지 않으면서 간통죄만을 처벌한다는 것은 형평에 맞지 않는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현실적으로 이미 간통 고소는 본래의 목적보다는 이혼 시 위자료나 양육 등 이혼조건 협의에서 유리한 위치를 얻기 위한 압박수단으로 이용되는 경우가 많다. 간통죄로 고소하려면 반드시 이혼이 전제돼야 하기 때문이다.
꽃뱀과 협박 그리고 이혼
‘폐지해도 될 만큼 성 의식이 성숙하지 않았다’는 반론에도 ‘국가가 이불 속 문제까지 따져야 하느냐’는 주장이 판결로 확정된다면 간통과 혼인빙자간음을 둘러싼 공방은 이제와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것으로 보인다. 상대방의 간통이나 혼인약속 위배로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당사자는 상대방이 사기나 폭행 등을 함께 저지르지 않은 경우 형사책임을 묻기 어려워진다. 부부라면 이혼소송을 제기함과 동시에 간통 당사자에게 위자료를 청구하고, 혼인약속을 어긴 당사자에게는 불법행위에 따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수밖에 없다.
간통이나 혼인빙자간음죄로 처벌받게 하겠다며 남성을 협박해 돈을 뜯어내던 꽃뱀의 전형적 수법도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다. 지금까지는 상대방을 고소해 구속 혹은 입건되게 한 뒤 더 유리한 위치에서 협상을 진행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스스로 상대방의 불법행위와 자신의 손해를 주장하고 입증해야 하는 부담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론적으로는 이혼은 하지 않은 채 배우자의 불륜행각을 들어 손해배상만 청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법원은 과거보다 위자료를 증액해 악질적 행위를 한 배우자를 응징하려 할 것이고, 법원이 여전히 소극적 태도를 보인다면 민법을 개정해 징벌적 손해배상을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에 더욱 힘이 실릴 것이다. 무엇보다 배우자의 간통 현장을 덮쳐야 한다는 다급한 신고전화를 받고 함께 은밀한 현장을 급습, ‘관계의 흔적’을 일일이 수집해야 하는 경찰의 업무상 고통은 사라질 것이다. 화가 난 배우자 앞에서 황급히 알몸을 가리다 수치스러운 몰골로 경찰서로 향하는 광경 또한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남게 될 것이다.
토라져버린 연인과 부부 사이에서 중재 아닌 중재를 해야 하는 수사기관 종사자의 애로도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변호사나 법률전문가의 경우 어떻게 증거를 수집해야 불법행위를 더 확실하게 입증할 수 있을지 상담을 받고 고민하는 사례가 지금보다 훨씬 늘어날 것이다. 남성도 강간죄 피해자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최근의 입법론에서 보듯, 여성의 간통이나 혼인약속 배신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남성이 상대방 여성에게 민사소송을 제기하는 경우도 일반화할 수 있다.
법과 제도가 점차 남성과 여성의 차이를 줄이는 추세에 있음에 비춰볼 때 사회적 약자로 전제한 처벌 법규들이 사라지면, 과거의 남성 우위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여성을 건전하고 독립된 인격적 주체로서 당당히 인정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 인식과 교육 현실 또한 성역할의 차이는 존중하되 차별은 용납하지 않는 쪽으로 진화할 것이다. 물론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날로 신장하는 것을 보고, 과거 인습에 따른 제도 때문에 역차별을 당한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남성도 줄어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점에 대해 깊이 고려하지 않은 마초적 남성들 가운데는 형사처벌을 가하는 장치가 없어졌으니 이제 마음껏 ‘성적 방종의 자유’를 누리게 됐다고 환호할 이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민사소송 절차를 통해 자신의 부끄러운 행위가 법정에서 속속 제시되고, 불륜의 상대방이 증인으로 출석해 은밀한 순간까지 상세히 묘사하며 증언을 한다면, 당사자는 몇 개월의 옥살이보다 훨씬 가혹한 정신적 고통을 겪게 될 수도 있다.
이상적인 결혼생활을 유지해온 한 부부가 아내의 불륜으로 흔들리는 모습을 그린 영화 ‘언페이스풀’(2002년 개봉) (좌). 2004년 개봉한 영화 ‘주홍글씨’. 불륜과 치정 살인사건을 소재로 했다(우).
남성 우월적 사고에서 비롯된 순결과 정절의 윤리에서 자유롭지 못하던 여성들 또한 사회윤리적 굴레에서 더욱 자유로워질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한 책임이 수반되므로 좀더 신중한 판단과 결정을 위한 능력과 자제력을 길러야 한다. 그리고 두 ‘범죄’의 폐지론을 계기로, 결혼을 막연한 환상으로만 생각하며 물질적 조건에 현혹되던 여성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주체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사랑을 돌아봐야 한다.
또한 소중한 가정과 부부간의 신의를 국가에 기대어 보장받으려던 이들은 좀더 냉철하게 자신의 애정과 가족에 대한 책임을 돌아봐야 한다. 사랑과 결혼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더불어, 신뢰를 바탕으로 아름다운 사랑을 일구어가는 모습이 사회 일반의 현상으로 자리매김한다면 더욱 바람직한 일이 될 것이다.
모름지기 국가가 개인의 자유와 도덕을 억압하고 제재하는 것은 최소한에 머물러야 한다는 게 입헌민주주의의 기본이다. 법이 세상을 선도하지는 못하더라도 퇴행적인 과거를 반성하는 기능을 할 수 있다면, 이불 속으로부터 국가의 매서운 눈초리를 쫓아내고자 노력한 이들에게는 확실한 보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