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의 대표적 출판사인 민족출판사가 2008년 5월 발간한 ‘안중근이 이또 히로부미를 쏘다’는 한 화가의 신념을 담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그림들에는 하나같이 식민지 청년의 고뇌, 신념, 의기가 빛을 발한다. 저격 장면을 그린 그림에선 죽어가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와 공포에 허둥대는 수행원들을 압도하며 안 의사가 결연히 총탄을 발사한다.
이 그림들을 그린 사람은 1940년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에서 태어난 중국 동포 남영(南榮·69) 화백. 그는 1936년 전북 익산에서 가난을 피해 북만주로 이주한 한국인의 후예다. 그는 안 의사의 의거를 중학생 때인 1950년대에 처음 접하고 일생의 화두로 삼았다.
9월14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만난 남 화백은 “교과서에서 안 의사를 처음 알았다. 학생 때 중국이나 러시아 사람들은 안 의사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다 알고 있었다. 그는 세계 어디에서나 우리 민족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남 화백은 권위 있는 예술대학인 하얼빈예술학원 미술학부 조각학과를 졸업했다. 20대 초반 베이징 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1966년 ‘문화혁명’이 그의 삶을 바꿔놓았다.
“예술가는 ‘자본주의의 싹’이라고 핍박받았어요. 나 또한 하방(下放)돼 종이공장의 하층 노동자로 쫓겨났죠. 시골에서 몇 년을 보냈습니다.”
1971년 우연찮은 기회에 신문사에 입사, 30년을 기자로 일했다. 헤이룽장 성정부에서 발행하는 조선어신문 ‘헤이룽장신문사’에서 편집국장을 지냈다. 또 자매지인 ‘치부정보신문’ 사장을 지낸 뒤 2001년 퇴직했다. 그는 기자 시절 내내 안 의사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하얼빈 역전을 지날 때마다 안 의사가 떠올랐어요. 1985년경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부터 짬짬이 도서관과 서점 등을 오가면서 안 의사 관련 자료들을 모았고 초고를 그리기 시작했죠.”
그림마다 등장인물의 복식과 표정을 세심히 고증했고 유추했다. 틈틈이 그린 그림 144장에 동료의 도움으로 글을 달아 펴낸 게 앞서 소개한 책이다. 무려 20여 년이 걸린 셈이다. 그는 “직장 등 여러 이유로 작업에 몰두할 수 없었다. 본격적인 작업은 퇴직하면서 시작했다”고 말했다.
남 화백은 뜻을 함께하는 조선족 동료들과 함께 ‘안중근과 하얼빈’이란 책을 펴내기도 했다. 안 의사에 대한 중국 측 자료를 집대성한 일종의 자료집이다. 이 책에는 위안스카이(袁世凱), 쑨원(孫文), 장제스(蔣介石), 저우언라이(周恩來) 등 정파와 시대를 달리하는 중국 지도자들의 안 의사 찬양 내용이 소개돼 있다.
그는 퇴임 후 화가로 본격 나섰다. 그의 수묵화는 상당한 경지에 올랐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미 그는 중국 서화가협회 이사, 중국서화연구원 연구원으로 각종 미술전에서 금상 13개 등 다수의 수상작을 낸 국가 1급 화가다. 또한 ‘중국미술가 100선’ 등의 명단에 단골로 이름이 오르내리는 화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인이지만 한민족의 핏줄임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요즘같이 명절을 앞두면 늘 두 곳이 생각나요.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인 전북 익산과 내가 태어난 북만주 헤이룽장입니다. 부모님은 친구들이랑 술이라도 한잔하시면 ‘타향살이 몇 해던가. 손꼽아 헤어보니…’ 하며 ‘타향살이’를 부르셨죠. 그 노래가 지금도 귓가에 맴돌아요.”
그는 한-중 수교 전 1989년 홍콩을 거쳐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당시 김포공항에 내리기 직전 온몸에 전기가 오고 소름이 돋는 경험을 했다.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쳤던 것이다.
“고향에 가보니 부모님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뜰 안의 감나무, 뒷동산 등이 그림처럼 눈앞에 펼쳐지더군요.”
그에겐 한국인 친구가 많다. 남북한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중국에서 태어나 칠십 평생을 살았지만 중국 친구들이 북한을 욕하면 영 듣기 거북하다. 그리고 한국 사람을 보면 고향 사람 같아 자꾸 눈길이 간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