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1</B> 강화 나들길.
제주에 올레가 있고 지리산에 둘레길이 있다면 강화도에는 나들길이 있다. 올레와 둘레길, 나들길 모두 우리나라의 아름다움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황홀한 길이지만, 강화의 나들길은 특별한 장점을 가지고 있다.
수도권에서 자동차로 1시간~1시간30분이면 닿는 거리라 그야말로 언제든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어딘가 멀리 걷기여행을 떠나는 것도 좋지만, 마음이 허할 때면 언제라도 봇짐 하나 둘러메고 가볼 수 있는 호젓한 길이 그리웠다. 그래서 강화의 나들길을 만난 반가움이 더 컸는지도 모르겠다.
4개 코스의 아름다운 도보여행길
강화의 아침은 우렁찬 천둥 번개로 시작했다. 부스스 눈을 뜨고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찬찬히 보면서 오늘 걷기는 시작도 못 해보고 끝나겠구나 싶었다. 아쉽기는 했지만 속상하진 않았다. 여행을 다닐수록 길에서 만나는 불가항력적인 힘에 대한 순응도는 높아졌으니 말이다.
한 치 앞이 내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비. ‘이번 여행은 나들길과 인연이 아닌가 보다. 다음 주에 다시 와볼까’라는 생각을 하며 마음을 접으려는 찰나, 세상을 뒤덮고 있던 회색 구름이 밀려가고 파란 하늘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인생처럼 여행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것이다.
나들길 걷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 용흥궁 공원에서 나들길 1코스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들었다. 5개의 진과 7개의 보, 53개의 돈대를 비롯한 수많은 유적이 있어 ‘노천 박물관’이라고도 불리는 강화도. 게다가 생태 갯벌과 아름다운 자연까지 펼쳐져 ‘걷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조건’을 지녔다고 한다.
올해 강화도시민연대가 중심이 돼, 강화의 아름다운 도보여행길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결과 조금씩 강화의 아름다운 걷는 길, 나들길에 대한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현재까지 만들어진 나들길은 모두 4개 코스인데, 제각기 특징이 있다.
1코스는 역사를 따라가는 ‘역사문화의 길’, 2코스는 강화 바닷길을 따라 용당돈대·화도돈대·초지진 등을 거쳐 가는 ‘바닷가 돈대길’, 3코스는 삼랑성에서 시작해 전등사와 석릉·가릉·정제두 묘까지 가는 ‘고려왕릉 길’, 그리고 건평나루·건평돈대·외포선착장까지 강화 서해안의 절경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노을 길’이 4코스로, 모두 3~4시간이면 뿌듯한 걷기여행을 즐길 수 있는 길이다.
역사와 함께 걷는 ‘심도로 가는 길’
그중에서도 첫 번째 코스인 ‘역사문화의 길’은 시간여행을 떠나는 길이다. 고려시대부터 조선, 근대까지 우리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길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이다. ‘역사문화의 길’은 흔히 ‘심도로 가는 길’이라고도 불리는데 한 세기 전 화남 고재형 선생이 1년 동안 강화도를 걸으면서 남긴 시집 ‘심도기행’에 나온 길이다. 여기에서 ‘심도(沁島)’는 강화의 옛 이름이다.
‘역사의 길’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1코스의 출발지도 용흥궁이다. 용흥궁은 조선 제25대 왕인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던 초가. ‘철종실록’에 따르면, 철종이 등극하기 몇 달 전부터 밤마다 이곳에 빛이 비쳐서 사람들이 ‘용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용흥궁’ 이름의 유래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단출한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B>2</B> 성공회 강화성당. <B>3</B> 북문. <B>4</B> 마을 따라 걷는 길. <B>5</B> 연미정.
강화성당은 한옥과 서양의 건축 양식을 혼합해서 만든 성당이다. 마당의 종은 사찰에 있는 범종과 비슷하지만, 내부 구조는 기독교의 전통 예배 공간 양식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 1893년 영국성공회 신부 워너가 선교 사업을 시작하면서 대중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한국형’으로 지은 성당이다. 한동안 성당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성당을 또 본 적이 있던가, 마음속에 일어난 울렁임이 쉬 진정되지 않았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나섰다. 3분쯤 걸었을까. 고려의 실낱같은 운명을 지켜온 고려궁지가 나왔다. 이곳은 고려왕조가 몽골에 대항하기 위해 39년간 머물던 궁터. 소박한 궁터를 돌아보면서 이번에는 고려시대로 날아가봤다. 이 궁터에서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아슬아슬했을까 하는 상상을 하니 마음이 짠했다. 고려궁지에서 나오니 수령 680년 된 은행나무가 여행자를 맞았다.
680년이라니, 80세까지 산다고 치더라도 8대가 넘는 세대가 이 은행나무와 함께 사라졌겠구나. 역사와 함께 여행을 하다 보면 생각의 길이가 조금씩 길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은행나무를 뒤로하고 북문 앞으로 향했다. 북문 앞에는 판화 찍기 체험이 마련돼 있었다. 마음에 드는 그림을 골라 직접 잉크를 묻혀서 찍은 후 배낭 뒤에 예쁘게 다는 것이다. 친구들과 함께 판화로 찍은 서로의 작품을 달아주며 웃음을 나누는 모습이 상큼했다.
‘나와 우리’를 생각하게 하는 귀한 길
북문에 올라 성곽을 따라 넘어가다 보면, 가슴이 탁 트이는 곳을 만난다. 강화가 발아래에 펼쳐진 시원한 광경이 시선을 압도한다. 여기에서는 누구라도 카메라를 찾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숲길. 북문에서 꼭대기까지 오르는 약 5분간의 오르막길만 참고 나면,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밤나무를 비롯해서 햇살을 적당히 가려주는 나무들이 울창한 건강한 숲이 나타난다.
숲 향기를 맡으며 걸어 내려가면 시원하게 목을 축일 수 있는 오읍약수터가 이어진다. 오읍약수터의 물은 생수통에 가득 담아왔던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받게 할 정도로 맛이 좋았다. 이제부터는 슬슬 강화 사람을 만날 수 있는 동네에 진입하게 된다. 마을길은 고즈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알뜰하게 가꾸어놓은 마당에는 가지와 오이와 고추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시원하게 펼쳐진 논밭과 길가의 코스모스는 가을이 왔음을 알려줬다. 잠시 눈을 감고 내리는 햇살을 그대로 맞았다. 한가로운 오후의 작은 평화. 마음이 이렇게 평화로워지는 데는 그렇게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은데, 순간순간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바람과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으로 몸과 마음을 충전하면서 그동안 흩어진 마음을 다독였다.
얼마나 걸었을까. 1코스의 종착지인 연미정에 도착했다. 땀을 바람에 날리면서 연미정 앞에 펼쳐진 강 너머를 쳐다봤다. 연미정에서 본 북쪽 마을은 강북강변로를 달리다 보는 63빌딩보다도 가까웠다. 이렇게 지척에 있는데도 우리는 아직도 바라만 보고 있다니. 역사의 흔적을 돌고 돌아서, 결국 오늘의 현실과 마주했다.
나들길 1코스는 단순히 걷는 길이 아니었다. ‘나들이’하는 기분으로 나섰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나와 우리’를 생각하게 한 귀한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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